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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25강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말씀/행27:1-44
요절/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이름 없는 시골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역사가 어떻게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헬라까지 확장되어 가는지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복음이 제국의 수도이며 심장인 로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로 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루한 2년간의 법정공방을 겪으며 인간의 간계와 싸워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을 뚫고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를 위해 당신의 종들과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권력이든 자연의 힘이든 바울의 로마행을 막아설 수는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도우시는가, 또 어떤 사람이 자신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위기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는 바울과 또한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을 믿노라 (1-26)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황제에게 상소했기에 몇 명의 죄수들과 함께 백부장 율리오의 감독 하에 로마로 보내지게 됩니다. 여기 다른 몇 사람의 죄수들은 중죄인으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처형될 죄수들입니다. 이들은 가이샤라에서 출발해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 연안여객선인 아드라뭇데노 배를 탔습니다. 이 배는 원래 시돈을 거쳐 구브로 남서 해안을 지나 아드라뭇데노로 가고자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 때문에 길리기아와 밤빌리아의 해안선을 따라 우회하여 소아시아 남단의 무라 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로마로 가는 곡물운반선인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습니다. 무라를 떠난 배는 또 강풍을 만나 더디 가서 여러 날 만에 간신히 그레데 섬 남쪽 중간에 있는 미항에 도착합니다. 일정이 참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9절에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항해하기가 위태로워졌다고 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유대의 대속죄일을 가리킵니다. 양력 9월말이나 10월 초순입니다. 지중해는 9월 중순이 지나면 항해가 위험해집니다. 11월 중순 이후에는 모든 항해가 금지되었습니다.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여행 덕분에 나름 항해경험이 많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 보면 이미 세 차례나 파선을 당해 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선원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아무리 봐도 여기서 더 움직이지 말고 미항에서 겨울을 보낸 후 항해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11). 선장과 선주도 월동을 한 후 이듬해 봄에 지중해를 횡단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같습니다. 그러나 미항은 너무 작은 항구라 많은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항을 떠나 보다 크고 쾌적한 환경을 갖춘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제안합니다. 뵈닉스는 미항에서 약 65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항구였습니다. 선장은 그 정도 거리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 자신만만했습니다. 그 동안 쌓인 자기 경험과 기술을 믿었습니다. 다수의 승객들도 어차피 겨울을 나야한다면 목욕탕과 영화관도 있는 뵈닉스항으로 가자고 합니다. “당신이 바다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소? 죄수면 죄수답게 닥치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시오.” 바울을 향해 대놓고 면박을 주었을 것입니다. 때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뵈니스항으로 항해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그들은 뜻을 이룬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뵈닉스로 향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가자마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 광풍은 그레데 섬의 지형 때문에 생겨난 강력한 북동풍입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시커먼 먹구름으로 뒤덮어 버렸습니다. 잔잔했던 물결은 집채만 한 파도가 되어 뱃머리를 후려치기 시작합니다. 선장이 키를 잡고 노력해 보지만 배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배가 기우는 쪽으로 이리 밀렸다 저리 밀렸다 짐짝처럼 굴러다닙니다. 이때 선원들이 뭐합니까? 선원들은 구명보트가 배를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배 안으로 끌어올리고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아 배를 보호합니다(17). ‘스르디스’라 불리는 악명 높은 모래톱에 걸리지 않기 위해 급히 닻을 내렸습니다. 풍랑이 더욱 심해지자 수송 중이던 곡물도 버리고 배 안에 있는 기구도 바다에 내버렸습니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항해 전문가로서 실력과 경험을 살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되는 악천후 속에서 그들의 지식이나 기술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짙은 구름이 낮의 해를 덮었고 밤에는 별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해와 별도 보이지 않고 당시에는 나침반도 없었으니 지금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배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나뭇잎처럼 떠돌았습니다. 이러다 언제 어디서 암초와 부딪쳐 침몰할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습니다(20). 그들은 절망과 탄식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절망에 빠져 입맛도 잃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오직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21절 바울의 말처럼 애초에 미항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피할 수 있는 재난이었는데 선장이 만용과 과욕을 부려 무리한 항해를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지내보려다가 엄청난 재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가 표류하게 된 과정을 보면 인간 세상의 축소판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 순풍이 불 때 사람들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사람들은 머리와 능력과 경험과 상식을 의지합니다. 이런 것들을 믿고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판단합니다. 이리 가는 것이 위험해 보이면 저쪽으로 핸들을 돌리면 되고 저쪽으로 가다가 실패할 것 같으면 이쪽으로 키를 꺾을 수 있습니다. 몇 차례 성공도 거두고 미래의 진로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설령 위험하다해도 나 정도 되는 베테랑에게는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곧 자신감이 지나쳐 자만이 되고 과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주변에서 그러면 안된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순풍만 있지는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갑작스럽게 광풍이 불어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의 항해 속에 광풍이 불어 닥칠 때가 되면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인생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떠밀려가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물론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광풍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사방으로 해결책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구원의 여망마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아예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은 순풍과 광풍이 교차되는 사이클 곡선과도 같습니다. 인생에 있어 영원한 순풍은 없습니다. 한번 잘 나가던 사람이 영원히 잘나가란 법이 없습니다. 1965년도 우리나라 100대 기업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겨우 10개가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광풍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과 재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광풍은 이 세상이 사람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절대주권 가운데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과 재주로만 모든 일이 잘 되고 잘 풀리면 얼마나 우쭐대고 뻐기고 교만하겠습니까? 자기보다 능력 없는 사람은 무시하고 의기양양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소에는 가만히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광풍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십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 광풍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풍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속아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기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음성에 겸허히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절망의 순간에 나선 사람이 누구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그 순간 바울이 나섭니다. 만약 이 말이 바울의 자기 확신에서 나온 말이라면 희망고문 밖에 되지 않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바로 지난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천사는 바울에게 ‘네가 죽지 않고 살 것이다’ 말하는 대신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 말합니다.
이 말 뜻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생명이 그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지금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아직 그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인이 그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그의 생명을 지켜 보호해주십니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도 보호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에서 요나가 떠오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배타고 도망칩니다. 그 배는 요나 한 사람 때문에 큰 풍랑을 만나 침몰할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로마로 향하는 바울이 탔습니다. 이 배는 큰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 한 사람 때문에 276명의 승객 전원이 생명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불 심판을 받았지만 이 배에는 바울이라는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이 있는 덕분에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죄수라고, 이렇게 바람이 좋은데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무시당했던 바울이 이제는 무리 가운데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 주저앉아있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런 리더십과 위기관리능력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바울이 이전에 세 번이나 파선한 경험이 있어 이제는 익숙해져 그렇습니까? 천사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한 것을 볼 때 바울 역시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바울은 다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붙든 것뿐입니다. 출렁거리는 큰 파도와 거센 바람 너머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약속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울은 바라보았습니다. 역경의 순간에 빛이 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요 하나님께 대한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가 오기 전 사람들은 다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의 방주는 해외 토픽에 나올만한 희대의 엽기행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홍수가 왔을 때에 가장 요긴한 것은 바로 노아가 1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만들고 있던 방주였습니다. 그때에 노아와 방주를 비웃던 사람들은 다 물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노아는 그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더 많이 오면 올수록 세상은 물속으로 점점 더 깊이 잠겨 가는데 노아의 방주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역경의 순간에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그 리더십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우리 신자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무한경쟁시대에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냐? 시간 아껴서 공부해야지, 취직준비해야지, 실력을 쌓아야지... 교회는 무슨? 물론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야 합니다. 무한경쟁시대에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실력이 무엇입니까? 학점만이, 영어점수만이 실력이 아닙니다. 진정한 실력은 어떤 위기상황이 닥쳐와도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내공을 키우는 것이 실력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가 학문이 부족해서 외국어실력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광야훈련을 시키셨겠습니까? 바울이 아는 것이 부족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역경과 환란의 터널을 거쳐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나 바울은 많은 연단을 통해 믿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 광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역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역경의 때에 매번 도와주는 것보다도 그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근본처방인 믿음을 우리에게 키워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은 이 믿음을 쌓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은 위기 가운데 구원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참된 리더는 위기의 때에 그 진가가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절망하고 엎드러질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리더는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고 생명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준비되어져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앞서 진정한 실력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II. 마침내 다 구조되니라 (27-44)
27절을 보십시오. 배가 미항을 떠나온 지 2주째 되는 날 밤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밀려가고 있습니다. 자정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워지는 줄을 짐작하고 바다 깊이를 재어보니 대략 38m였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대략 27m입니다. 이는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동시에 암초에 부딪칠 위험성도 높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닻을 4개나 내리고 거기에 머물러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때 사공들이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구명보트를 내려 도망치려고 합니다. 승객들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려고 했습니다. 선원들이 사라지면 누가 배를 육지 가까이 댈 수 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이 모습을 바울이 목격했습니다. 즉시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구명보트와 연결된 줄을 끊어버렸습니다. 분명 11절에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이제 사실상 이 배의 선장은 바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승객들은 2주 동안 심한 배 멀미와 풍랑과 싸우느라 먹지 못하고 굶주렸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도 헤쳐 나올 힘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음식을 먹도록 권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바울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떡을 떼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안심하고 받아먹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신뢰하고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배불리 먹게 한 후 남은 곡식을 바다에 버려 최대한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날이 새자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지만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원들은 키 줄을 풀어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받아 해안을 향해 나아갑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칩니다. 두 물이 합쳐져 흐르는 곳을 만나 배 앞머리가 모래와 진흙에 박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충돌했을 때의 충격과 파도에 의해 배 후미가 깨져나갔습니다. 잠시 후면 물이 차올라 배가 침몰할 상황입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만약 죄수들이 도망치면 그들을 지키던 군인들이 죄수들이 받을 형벌을 고스란히 대신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백부장이 바울을 살리려하여 군사들을 막아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부장은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을 먼저 뛰어내리게 하여 육지에 헤엄쳐가도록 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배 물건을 의지해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276명 전원 구조됩니다.
이 파선 사건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바울 한 사람을 리더로 쓰셔서 모든 사람을 구원받게 하신 사건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핍박을 받아왔고 이제는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이루어드리고자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더 큰 시련과 역경을 만난 것입니다. 대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사명을 감당하다 광풍의 환란을 만나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해 의심과 회의가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주실 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시며 또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사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10:13). 하나님의 계획에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출발할 때는 일개 죄수의 신분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목자나 리더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극렬한 태풍에 떠밀려갈 때 두려웠을 것이고 몸도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광풍에 시달리면서도 백부장을 비롯해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양으로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그는 위기의 때에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두려워 떠는 자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을 내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연단을 통해 바울을 이방지역에서도 목자요 개척자로 쓰임 받을 만한 리더로 계속해서 빚으시고 계셨습니다. 난파 직전의 뱃속에서 영혼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충만케 하시고 구원의 손길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도록 바울을 도우셨습니다.
또한 배가 이리저리 광풍에 밀려다닐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 방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를 향해 정확하게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연단 속에 있을 때 광풍을 만나더라도 내 인생이 파선되거나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까 염려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도록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청년시절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는 완전히 다른 실패의 길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에서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큰 리더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인도자 주님이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주님의 비전대로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에게 광풍을 통해 고생하는 것 이상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하셨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셨습니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리더로 쓰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 항해의 진정한 선장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결론: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죄 가운데 침몰해가는 캠퍼스 영혼들의 리더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자기 현실의 어려움만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의 비전과 말씀을 붙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 고백을 기초로 양들에게 믿음을 심고 그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우리가 계속해서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