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학습백과 초등 창의적 체험활 - 동강화도
인기멤버
hanjy9713
2023.10.28. 20:56조회 5
댓글 0URL 복사
천재학습백과 초등 창의적 체험활동
강화도
1. 강화도가 나라를 지키던 군사 도시라고요?
준비물: 사진기, 필기도구, 운동화, 물 * 흥미로운 점을 기록할 수 있도록 사진기와 관찰 일지를 챙겨 두세요. * 야외 유적지를 둘러볼 때는 운동화와 물을 준비하세요. |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에요. 강화도는 우리나라의 중심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예부터 중요한 국방1) 도시였어요. 삼국 시대부터 군사 시설을 설치했고, 고려 시대에는 몽골군이 침입해 오자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골에 대항하기도 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강화도를 군사 요지로 삼아 5진, 7보, 54돈대를 설치했어요. 또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갑곶 돈대 같은 군사 시설이 차례로 정비되어 강화도는 완벽한 요새로 변화했어요.
강화도에는 왕실의 중요한 자료를 모아 두는 시설도 만들어졌어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 태조의 초상화를 모신 봉선전,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는 외규장각 등이 세워졌지요.
19세기 말에는 서양의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많은 전투가 벌어졌어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는 외국 함대가 쏜 포탄의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요. 강화도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했던 조상들의 호국2) 정신을 배워 보도록 해요.
진·보·돈대는 무엇인가요?
진과 보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군사들이 주둔하던 성곽이나 군사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에요. 진은 보보다 규모가 조금 더 컸으며, 부대가 머물던 곳이에요. 돈대는 흙이나 돌로 쌓은 소규모 방어 시설로 그곳에 대포를 배치하여 나라를 지켰어요.
고려는 왜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을까요? 고려 조정은 유목민인 몽골군이 말을 타고 다니는 기마 부대여서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약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도성과 가까운 큰 섬인 강화도를 피난처로 택하고, 백성들도 강화도로 피신을 시켰답니다. |
2. 옛날 강화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강화도는 선사 시대부터 역사가 시작된 곳이에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인돌 공원이 있으며, 단군이 제사를 올렸다는 참성단 등 유적들이 가득하지요. 강화도에서는 언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 선사 시대의 강화도
강화도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모여 있는 중요한 선사유적지예요.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 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무덤이지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확인된 고인돌 6만 여 기가운데 절반 정도가 우리나라에 있어요. 강화도의 고인돌은 전라북도 고창과 전라남도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답니다.
강화도에는 고조선 시대의 유적도 남아 있어요. 마니산에 자리 잡고 있는 참성단은 기원전 51년 단군왕검이 봄과 가을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3)이라고 해요. 참성단은 아래를 둥글게 하여 하늘을 상징했고, 단은 네모로 쌓아 땅을 상징했어요.
마니산은 백두산 천지와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지금도 전국 체육 대회 성화가 이곳에서 피워지지요.
단군왕검은 누구인가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한 사람이에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아들로 고조선의 임금이 되었다고 해요.
2) 삼국 시대의 강화도
삼국 시대에는 강화도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어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령했던 5세기 무렵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가 번갈아 가며 강화도를 점령하고, 강화도에 요새를 설치하여 국방에 힘썼어요.
국가 사적 제130호로 지정된 삼랑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롭게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요.
삼랑산성은 다른 지역의 산성과는 달리, 성의 안쪽에 오직 전등사만 있기 때문에 역사성과 희귀성을 함께 간직한 산성으로 유명하지요. 전등사는 삼국 시대에 지어진 사찰이에요.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81년에 지어져 1,6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요. 약사전, 범종, 목조 삼존 불좌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답니다.
삼국 시대에 강화도의 이름이 3번이나 바뀌었다고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무찌르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강화도가 백제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주인이 바뀌자, ‘갑비고차’에서 ‘혈구군’으로 지명도 바뀌었어요. 곧이어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공격하고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강화도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지요. 신라는 강화도를 ‘해구군’이라고 불렀어요. ‘강화’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부터 불렸어요. |
3) 고려 시대의 강화도
고려는 몽골군이 침입해 오자 40년간 강화도를 도읍으로 삼아 몽골군과 항쟁4)했어요. 고려 왕실은 1232년에 강화도로 피난을 떠나 군사를 정비했고, 강화도에 왕궁을 세워 고려의 정신을 이어 갔어요. 또한,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고자 마음을 모아 팔만대장경판을 만들었지요.
고려의 특수 부대인 삼별초는 몽골군과 맞서 긴 전쟁을 치렀답니다. 삼별초는 고려 왕실이 몽골군에게 항복한 후에도 끝까지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모두 패배했어요. 강화도 외포리에는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삼별초 항쟁비’가 세워져 있지요.
고려 시대의 유적지로는 고려 궁지와 강화성이 있어요. 고려의 제23대 왕인 고종은 강화도에 성곽을 쌓고 궁궐을 짓게 했지요. 강화도의 궁궐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승평문만 남아 있어요.
4) 조선 시대의 강화도
조선 시대 말 강화도는 도성을 지키는 요새였어요. 이 시기에는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가 군함을 이끌고 쳐들어왔지요.
1866년 프랑스 군대는 강화성을 공격하고 무기와 서적을 빼앗았어요. 이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 군대를 크게 이긴 전쟁을 병인양요라고 해요. 1871년에는 미국이 군함과 군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조선을 침략했어요.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지요. 미국은 전투 끝에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갔어요. 이를 신미양요라고 해요.
강화도는 임진왜란 무렵 조선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사고를 설치한 곳이기도 해요. 조선 왕실은 강화도에 마니산 사고를 설치해 전주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했어요. 그러나 병자호란과 화재로 피해를 보자, 새로 전등사에 사고를 설치하여 문서들을 보관했답니다.
사고가 무엇인가요?
사고란 왕실의 실록 같은 국가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곳을 말해요. 조선 시대에는 한양의 내사고 외에 충주, 상주, 전주 등 지방 세 곳에도 외사고를 설치해 운영했어요.
3. 강화의 역사를 따라가 볼까요?
추천 체험 학습 코스 ①
고인돌 → 공원 고려 궁지 → 강화 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