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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는 지금으로부터 2800여년 전 중국 대륙 내 찢어진 나라들이 550여년간 싸우고 흥하다 망하는 과정을 거듭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 어지러운 상황에서 중국문화가 꽃피고 사상이 정립되며 정체성이 확립됐다.
청계산 첩첩산중에 숨은 고수가 도를 닦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니, 그 이름이 귀곡처사다.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는 방연과 손빈이다. 방연은 사람이 진중하고 학문이 깊었다. 나이 어린 손빈은 방연을 형으로 선배로 깍듯하게 대했고, 방연은 손빈을 후학으로 동생으로 아꼈다.
방연은 손빈보다 먼저 하산해 벼슬자리를 찾아 중국 위(魏)나라로 갔다. 위나라가 있던 곳은 현재 허난성(河南省)이 됐다. 위나라는 원래 땅이 기름져 인구가 많았다. 위왕은 방연을 친히 등용했고, 방연은 귀곡처사에게 배운 학문과 병법을 펼치며 열과 성을 다해 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방연은 10여년 만에 위나라 대장군이 됐다.
시간이 흐른 뒤 손빈이 위나라로 동문인 방연을 찾아갔다. 방연은 손빈을 반갑게 맞았다. 손빈 역시 장군까지 올랐다. 형제 같은 방연과 손빈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위나라 조정에서 이간질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방연은 사람이 가볍지 않아 이간질을 물리칠 줄 알았으나 그 가슴 속엔 쌓이고 쌓였던 열등감이 싹을 틔웠다. 귀곡처사 밑에서 공부할 때도 방연은 죽기 살기로 공부해도 손자의 후손이자 천재인 손빈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열등감이 시기·질투가 되고 적대감으로 변했다. 방연은 그 모든 걸 가슴속에 감추고 드러내지 않다가 마침내 때가 온 걸 알아챘다.
“손빈은 제(齊)나라의 첩자다.”
간신들이 국경을 맞댄 적국 제나라(지금의 산둥성)의 첩자로 손빈을 몰아가자 방연도 합세했다. 무릎을 파내 앉은뱅이로 만드는 빈형에다 발꿈치 인대를 자르는 월형을 받고 이마에 죄목을 문신하는 자자형까지 받았다. 손빈은 애타게 방연을 찾았다. 방연이 와서는 사형에 처할 뻔했지만 자기 덕택에 목이 날아가지 않았다고 시치미를 뗐다. 손빈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며 절을 했다.
제나라 세작이 스며들어 모든 사실을 손빈에게 알려줬다. 손빈은 분통을 터뜨리기 전에 어떻게 하면 위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는 돼지우리로 들어가 함께 뒹굴며 미친 척했다.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제나라 세작들이 손빈을 탈출시켜 마차에 싣고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에서는 진작에 병법의 천재인 손빈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친하게 동문수학한 비범한 두 병법가는 이제 철천지원수가 됐다.
위나라는 방연을 대장군으로, 제나라는 복수에 불타는 손빈을 군사(軍師)로 앞세워 전열을 가다듬었다. 방연과 손빈은 직접 맞닥트리진 않았다. 위나라가 조나라를 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나라를 도우려 손빈은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갔다. 손빈은 앉은뱅이로 말을 탈 수 없어 병사 넷이 어깨에 멘 가마를 타고 전장을 누볐다. 그때마다 무릎을 보며 이를 갈았다.
“방연 네 이놈, 복수의 칼날이 네놈의 목을 벨 때까지 나는 한시도 잊지 않겠다.”
평릉전투에서는 손빈이 방연의 위군을 몰아붙여 함락될 뻔한 조나라를 구하고 위군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위군을 괴멸시키진 못했고 방연의 숨통도 끊지 못했다. 기원전 430년 이릉골짜기에서 건곤일척(乾坤一擲). 위나라와 제나라가 붙었다. 위나라 대군이 제나라를 밀어붙이자 일합을 치러보지도 않고 손빈의 지휘로 제나라 군대는 퇴각했다. 방연의 위군이 퇴각한 제나라 진지를 살펴보니 부엌엔 아궁이가 십만 군사 밥을 지을 만큼 있더니, 다음 퇴각한 자리엔 오만 군사 밥을 지을 만큼만 남아 있었다. 방연이 무릎을 쳤다.
“제나라 군에 탈영병이 속출하는구나! 가자!”
계속 퇴각하는 제군을 쫓은 뒤 남은 아궁이를 세니 불과 삼만명분밖에 되지 않았다. 방연이 보병을 남겨두고 기병으로만 숨 가쁘게 추격했다. 어스름이 내릴 때 이릉골짜기 끝자락 개활지에 다다랐다. 큰 나무 한그루에 붉은 천이 나풀거렸다. 나무둥치 껍데기가 벗겨지자 어떤 글귀가 적혀 있는 게 어른거렸다.
“불을 밝혀라!”
횃불이 타오르자 글씨가 나왔다.
“방연아 잘 가거라.”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방연의 몸뚱어리는 고슴도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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