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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살아야 영화·뮤지컬이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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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리(연극연출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송환」이 2만 명을 약간 넘기는 다큐멘터리 영화사상 대기록을 수립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객 수로 봤을 때는 그 차이가 엄청나다. 그렇다고 「송환」은 「태극기 휘날리며」의 1/500밖에 안되니, 그 가치도 1/500밖에 안된다고 할 수 있는가? 상업 뮤지컬 「맘마미아」가 10만 명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소극장 연극 중 한 달 공연에 3,000명 정도가 들어 온 경우 대박(?)으로 여긴다(회당 100명 정도의 유료관객이 들어온 경우이다). ‘대박이 터졌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극장 연극은 「맘마미아」의 1/30의 가치밖에 없는가? ‘그렇다’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확신한다.‘왜 아닌데요’라고 다시 물으면 막연하게나마 ‘예술을 관객 숫자로만 가치판단 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라는 답이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이렇게 답까지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뻔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관객이 적은 기초예술분야 지원문제에 대해서는 그와는 다른 소리들이 나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이익을 창출해 낼 수 있는 산업으로서의 문화예술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모습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멋진 논리들을 내세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예술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잖아, 비록 가난하지만. 우리 보통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데, 그저 먹고 살려고’ 필자의 친구들도 그런 소리들을 한다. 연극의 가려진 영향력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머리를 쥐어 짜 생각해 낸 것이 연극 같은 기초예술이 문화산업의 발전에 즉 돈벌이가 되는 예술에 암암리(?)에나마 얼마나 도움이 되어 왔는가를 실증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방법이다. 독보적인 극형식이었던 연극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탄생한 이후, 관객을 향한 직접적 영향력이 많이 떨어지긴 하였으나 대신에 타 드라마 장르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간접적 영향력을 대대선전하는 것이다. 연극이 비록 원조이긴 하지만, 식당 같은 곳과는 달리 원조라고 떠들어 봤자 손님이 몰리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개성있는 TV나 영화 출연자들이 연극 출신이 아닌가? TV 드라마에선 주로 얼짱이나 몸짱들을 받쳐 주는 역할들이긴 하지만 그들이 빠지면 재미없어서 못 본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치 않을 것이다. 맨 앞에서 언급했던 두 편의 영화감독들만 하더라도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적어도 몇 편의 연극에 참여했던 사실도 아시는지? 영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연기자도 영화계 최고라 불리는 이들은 연극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가? 이름을 대보라면 자랑스레(?) 외쳐대기까지 할 수도 있지만 좀 구차스러운 것 같아 이 정도에서 접기로 하겠다. 연극의 특수성 인정해야 이제는 연극 자체로 돌아가서 이 연극이라는 장르가 안고 있는 운명적 비극성(?)에서부터 얘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희극적인 연극도 안고 있는 비극성 말이다. 모든 공연예술의 공통점이지만 연극은 매일 밤 태어났다가 죽는다. 낮 공연이 있는 날은 하루에 두 번 태어났다가 죽는다. 비디오 테이프에 복사해 놓아도 소용없다. 여지없이 죽는다. 무대 위의 연기자들과 관객들이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서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서로가 교감하는 동안에만 연극은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상호인식에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작품의 줄거리나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이 중요한 것이라면 책을 사서 읽으면 될 터이다. 연극은 만남, 나눔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라이브. 음반으로도 즐길 수 있지만 콘서트에 기를 쓰고 달려가듯이. 이처럼 현장성이 연극의 생명이라 할 수 있으니 복사할 도리가 없다. 복사가 안 되니 대량생산 판매할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1일 5회 상연할 수도 없다(벗기기 연극이 한창 인기절정일 때 연속공연을 했던 때가 있긴 하지만). 게다가 꼭 여러 명이 모여서 집단으로 장기간 연습까지 해야 하는 등 경비도 많이 소요된다. 누군가는 그랬단다. ‘모든 예술 중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라고. 물론 이는 인건비를 정상적으로 지급했을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니 제작판매희망자의 입장에서 볼 때 상품으로서는 비인기, 무관심 품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가치에 대해 학식 높으신 분들이 정신적이 지원이라도 아끼지 않는 품목은 되고 있는가?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단적으로 소위 일류대학이라는 곳들 중 연극과가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여기서 일류대학이라는 표현은 그저 사회통념적인 기준에 따른 것임을 밝혀 둔다.
이번엔 기특한 얘기 하나 전해야겠다. 2000년도에 모교 개교 40주년 기념동문합동공연의 연출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다음은 그 당시 프로그램에 썼던 글의 일부분이다. “거의 10년 만에 메리홀을 찾았다. 그러나 반가워야 할 이 만남은 곧바로 서글픈 만남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공간이 탄생한 이래 그 얼마나 많은 ○○인들이 이곳에서 그들의 젊음을 불태웠으며, 온몸을 던진 사랑을 나누었던가? 그런 귀중한 장소가 이토록 무관심속에 방치되어 있었다니? 아니, 아예 버려져 있다니? 1960년대 이제는 은퇴하신 ○○○ 선생님 덕분에 모습을 들어 낸 메리홀은 전국 대학연극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대학교에는 연극관련학과도 예술대학도 없다. 그러나 메리홀을 통해 연기자 ○○○, □□□, △△△ 등이 탄생했으며, 연극연출가로는 ○○○, □□□, △△△ 등이 맹활약 중이고, 인접분야인 영화계, 방송계와 광고계로부터 굴뚝산업, 최첨단 벤처산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과연 그들은 메리홀에서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개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남들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하는 21세기 인간을 미리 봤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문화가 삶의 인프라라는 21세기 삶의 방식을 미리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인용이 길어졌지만 연극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심정이 현재의 연극계를, 우리 사회를 바라 보면서의 느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특하다는 것이 서글픔과 아픔을 주었던 필자의 모교의 경우는 그 후 동문들과 학교 측의 적극적인 협조와 노력으로 30여억 원 이상이라는 사학으로서는 거금을 들여 내부시설을 개보수하여 재개관을 목전에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700석이었던 객석을 과감하게 500석으로 줄이고, 무대미술갇연출가 등 전문인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는 점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실제 관주도의 공연장 설립 시 전문인력의 자문을 귀찮아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았던가? 연극학과가 있는 대학의 공연장 마련 때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다는 소문도 꽤 들어 왔다). 이런 얘기를 길게 늘어 놓는 것은 모교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다. 아니다. 자랑이라고 보아도 할 수 없다. 연극의 가치를 인정해 준 드문 사례를 보여 준 모교니까. 그것도 연극학과도 없는 대학교에서… 솔직히 수많은 대학에 연극과가 생겨났지만 제대로 된 공연장을 갖춰 놓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 연극을 위한 기본공간도 마련해 놓지 않고 연극교육이 가능한 것인가? 기초예술로서의 연극이 중요해서 과를 신설한 것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서인가? 그 답은 굳이 듣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 공간, 시간에 대한 투자 절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다. 기초예술로서의 연극의 중요성을 인정만이라도 한다면 국가가 문화정책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수밖에는. 연극을 살리기 위한 여러 가지 지원책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부분만을 얘기해 보겠다. 바로 인간, 공간, 시간에 대한 투자이다. 첫째, 인간에 대한 투자로서 연극인들의 재교육을 위한 시스템 구축이다. 요즘 연극은, 또 사회는 ‘감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은 ‘감각’만 좇고 있고, 또한 연극인들은 좇는 ‘끼’만으로 버텨 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인들에게 요구되는 인문적 사고와 상상력을 끊임없이 축적·확대해 나아갈 수 있는 장을, 또 장인으로서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건 예술가 각자 알아서 하라고? 이런 반응엔 이렇게 우는 소리로 답을 드리는 수밖에 없다. “팔팔한 20대에는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나 그 이후로는 쉽지 않습니다. 연극인들의 수입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는 건 아시잖습니까? 재교육을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현실의 장벽이 너무 크고 또 마땅한 곳도 없고요” 최근에 어떤 조사에 의하면 연극인의 월평균 수입은 40만 원이 약간 넘는다. 몇 해 전 문예진흥원에서 공연예술 아카데미를 없애면서 그 대신 연기자 재교육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나마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새싹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다 자란 나무를 제대로 가지치기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둘째, 공간의 문제로 중형극장의 설립이 절실하다. 우리나라의 연극공연장은 두 가지 규모밖에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무지막지하게 크거나 지나치게 작거나. 개발독재시대에 과시용으로 만들어 놓은, 황당하게 큰 무대와 객석으로 이루어져 무대와 관객사이의 교감이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는 극장이거나, 서로의 호흡은 생생하게 느껴지나 너무 가까워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극장이거나. 이처럼 양극단에 놓여 있는 극장에서만 공연을 해야 하는 우리 연극인들에게 전세계의 표준적(?) 공연장 형태인 중형극장을 제공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중형극장에서의 공연경험도 제대로 가져볼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세계로! 세계로!’만 외쳐대며 몰아댄다면 이는 무기 없이 적진으로 뛰어들라는 얘기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극장의 크기에 따라 연기자의 발성·신체연기 연출자의 동선 만들기, 무대미술, 조명 등 연극전반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다행히 서울의 경우 명동예술극장을 되살린다고 하는데, 전 연극인에게 무대를 밟을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혹시 특정 연극인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될까봐 우려가 돼서 하는 이야기다. 셋째, 시간의 문제로 투자의 열매를 너무 성급히 따먹으려 하지 말라는 얘기다. 기초예술분야에서야 말로 인내심 있게 ‘느림의 미학’을 실천해 보자는 말이다. 열매가 깊은 맛이 들게 제대로 영글려면 알맞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지 않은가? 제발 속성 재배방법만을 요구하지 말자. “예술인들이 결코 대접받고자, 대우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술이 그렇게 좋은 입장에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예술인들은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업자’ 또는 ‘상품’만으로서 취급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최소한의 바람이 있을 뿐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저작의 고통이 이해되고 저작의 기쁨이 사람들과 함께 공유되고 예술작업과 유통과정이 예술적이고 문화적으로 이뤄지길 바랄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