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안내
*맨 위 : 우스리스크
조선인이 개척한 마을. 발해의 옛 성터가 남아 있다. 1917년 5월 하순에 전로한족회의가 개최되어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조직한 곳. 연해주 각 지역에 지방회 설치. 기관지 <청구신보> 발행. 1919년 한족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 노령 임시정부 수립. 현재 고려인문화센터, 최재형 고택, 안중근 의사 기념비, 홍범도 장군 기념비와 4월 참변 위령비가 있다.
*위에서 두번째 : 라즈돌노예
1937년 10월에 고려인 강제 이주 시발역인 라즈돌노예역이 있고 이상설 유허비가 라즈돌노예 강변에 있다.
*위에서 세번째 :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마을이었던 개척리와 신한촌이 있었다. 지금은 신한촌 기념비만 외롭게 서있다.1910년에서 1920년까지 고려인 독립운동의 최대 거점이었던 러시아 극동 최대의 도시.
*위에서 네번째 : 추가노보
연추에 세워진 첫번째 고려인 마을
*위에서 다섯번째 : 크라스키노
연추와 지신허를 포함하고 있는 러시아의 변방 마을. 언덕에 항일 러시아 용사들을 기리는 크라스키노동상이 있다. 러시아와 한국 문화 교류센터가 있으며 항일역사 교육관이 있다.
*위에서 여섯번째 : 자루비노.
조선인들이 러시아 군대를 찾아가 보호와 도움을 요청한 곳
*아래서 두번째 : 포시예트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지신허 마을이 동북쪽 가까이에 있다.
*맨 아래 : 하산.
러시아 남행 열차 마지막 역이 있는 곳. 중국의 방천, 조선의 두만강역과 인접해 있다.
[조선인들의 연해주 이주]
연해주는 1860년 이전까지는 청나라의 땅이었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땅이 되었다.
**위에서 아래로 우스리스크, 라즈돌노예, 블라디보토크, 추가노보, 크라스키노, 자루비노, 포시예트,하산.
1860년, 당시 조선인들은 연해주로 들어가는 것을 "강동"에 간다고 하였다. 연해주가 두만강 동쪽에 있어 강의 동쪽 편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농민과 소작인들의 연해주 이주, "강동 바람"은 조선의 잦은 징병과 과도한 세금과 흉년과 관리들의 수탈과 양반토호들의 학대를 피해 살 길을 찾고자 하는 탈출이자 대 모험이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1860년 이전 부터 두만강을 건너와 몰래 계절농사를 지었다.
1863년에는 무산 출신의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농부 13가구와 함께 포시예트에 들어가 지신허 마을를 개척하였다.
러시아측 공식기록에 최초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일은 1864년 9월 21일로 되어 있다. '한인 13가구 60명이 연해주의 지신허 마을에 정착했다'는 그 지역주둔 사령관의 보고가 근거이다.
지신허와 연추에서 출토된 고려인들의 유물. 솥단지.
수저와 숫돌, 칼 도막들
유기 밥그릇과 퍄편들
연해주 원주민들의 다양한 유물들 또한 전시되어 있다.
포시예트박물관 정원
포시예트만
포시예트해변
포시예트만.
포시에트만 일대에는
두만강을 건너 들어오는 조선인들이 처음 정착한 지신허, 연추 여러 마을들이 각각 근거리에 있다.
지신허와 연추는 1864년에 60여호로 늘었고, 1868년에는 165호로, 1869년에는 766호로 늘었다.
**포시예트민간박물관 소장 지도.
좌로 부터 하산, 추가노보, 크라스키노, 포시에트.
굵은 청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선
1884년 연추일대의 조선이주민은 1,764호에 5,447명에 달하였다.
상별리, 중초리, 하별리와 지신허 등 10여개의 조선인 마을이 세워짐으로 연추는 러시아에서의 조선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연추는 러시아어로 '얀치헤'이고 어원은 이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강 이름인 연추하에서 왔다. 연추의 러시아식 공식명칭은 시모노보로 알려져 있다. 이 명칭은 당시 연해주 군무지사였던 시모노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937년 10월 고려인 대추방으로 조선인들이 개척한 마을들은 황폐해져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오늘날은 하산스키군에 있는 크라스키노와 그일대를 연추와 지신허 마을이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한다.
최재형의 가족이 처음에 정착한 곳은 지신허 였으며 다시 이사 한 곳은 연추였다.
연추는 김치보가 덕창약국을 열어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시작한 곳이며,
황병길,김기룡, 백규삼 등이 이범윤과 함께 의병운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며 헤이그밀사들이 거쳐 간 곳이며,
안중근이 1907년 망명하여 늦가을에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동의회가 결성되어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과 엄인섭, 안중근 등이 1908년 여름에 조선에 진입하기 위해 출발한 곳이며,
1909년 정초에 김치보의 집에서 10여 명의 청년이 단지결맹을 한 곳이다. 단지결맹 단원들은 이토오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3개조로 나뉘어서 저격을 위해 대기하였다고 한다.(이 기록은 황병길의 딸인 황정일과 김치보의 자녀들을 인터뷰한 리광인의 기록에 나온다)
연추(크라스키노)에는 일찍이 학교가 세워지고 러시아정교회가 세워진 곳으로 20세기 초에 많은 청년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또한 연추에는 러일전쟁시 군납으로 돈을 번 부호들이 출현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함으로 연해주 고려인들의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
기도 하였다.
라즈돌노예역은 1937년 10월과 11월에 20만 고려인들을 결집시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시발역이다. 20만 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 우주베키스탄, 타직스탄 등에 도착하였을 때는 숫자가 17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주하는 사이에 기차 안에서 3만 명이 사망한 것이다.
하산은 러시아 연해주 서남쪽 끝의 하산스키군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하고 있는 국경도시이며 중국 훈춘의 방천과도 접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와는 기차로 연결되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70년대부터 조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886년에 400명,1891년에 840명이 되었다. 1893년 시당국은 한인집단 거주지 '카레이 스카야슬라보드카(개척리)'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1911년 페스트 창궐을 기화로 삼아 조선인들을 시 서북편 2킬로 미터 떨어진 곳, 산비탈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있는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1915년 신한촌의 조선인은 약 1만 명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망명인사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범윤, 홍범도, 유인석, 이진룡, 이상설, 이위종,이동녕, 정순만, 안창호, 정재관, 이강, 이종호, 이갑, 유동열, 조성환, 박은식, 신채호, 이동휘. 백순 등이 모였다. 그들은 귀화 조선인 원호 최재형, 최봉준, 문창범, 김학만 등과 함께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국제 공산당의 1국 1당정책과 1920년 4월 참변,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말미암아 러시아에서
조선독립운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024년 4월 8일
우담초라하니
**비고
1860년대 초에 형성되기 시작한 연해주 고려인 마을들은 1900년대 초기에 성황을 이루었다.
조선인들이 생명을 걸고 러시아로 월경을 한 것은 생존을 위해서 였다.
당시 농부들과 소작인들은
첫째 조선정부 관리들의 세금수탈.
둘째 양반 토호들의 수탈과 학대.
셋째 자연재해로 인한 극빈으로
기아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앉아서 죽기보다 스스로 구명도생의 길을 찾아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갔다.
그들은 황량한 무인지경의 땅을 일구어 마을을 만들어 정착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면서 독립운동을 원하는 망국지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1920년의 4월참변,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과 레닌의 죽음으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은 끝이 났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일군 터에서 살수 있었으나 1937년 10월 스탈린에 의한 강제숙청으로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게 되어 고려인 마을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연해주 고려인마을들의
성립,
발전과
그 종말을 안다.
역사적 비극!
소수민족 박해!
이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의분을 일으키며 나라 없는 자들이 당하는 역사적 교훈을 주지만
누가 이 교훈을 명심하겠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