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는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 장군과 관련된 장소와 일화가 많이 있는데요. 오늘은 복지겸 장군과 관련된 장소와 설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기지시에서 순성 승마장을 지나 면천으로 가다보면 커다란 돌비석에 '武恭祠(무공사)'라는 한자가 써 있는데요. 이곳은 복지겸 장군의 묘역을 비롯해 부대시설이 위치한 곳입니다.
면천 복씨 대종회에서는 1991년 11월 당진시 순성면에 ‘고려 개국 일등 공신 태사 복무공 휘지 겸 사적비’와 복지겸의 묘역을 정비하였는데요.
2007년부터 당진군과 충청남도의 지원을 받아 복지겸을 제향하는 사당인 무공사와 부대시설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2008년 12월에 완공하였습니다.
○ 고려개국공신 복지겸 장군 유적지
충남 당진시 순성면 순성로 73
정비사업 덕분에 복지겸 장군 유적지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서 비석과 설명문을 볼 수 있습니다.
<면천 복씨 대동보>에 신라 말에 학사 복한림이라는 인물이 당나라에서 건너와 현재의 면천면에 정착하여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고 백성을 보호했는데, 복지겸은 복한림의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는데요.
복지겸은 원래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마군 장군이었습니다. 포악무도한 궁예가 민심을 잃자, 918년(태조 1)에 홍유·신숭겸·배현경과 함께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웠는데요. 이후 개국 일등 공신에 봉해졌고, ‘사귀’라는 이름도 ‘지겸’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 후 마군 장군 환선길의 반역 사건을 사전에 탐지해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는데요. 순군리 임춘길이 청주에서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알고 태조에게 알려 모두 평정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지겸은 고려 초 국가와 왕실이 안정되는 데 많은 공을 세우고, 노년에 이르러 혜성군(현 당진시 면천면)으로 낙향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가면 외삼문을 볼 수 있는데요. 외삼문의 우측 문이 열려 있어 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내삼문까지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길 바깥쪽으로 양쪽에 관리사와 문간채로 추정되는 두 개의 건물이 보이네요.
정충문으로 들어서면 ‘무공사’라 적힌 현판을 볼 수 있는데요. 이는 복지겸을 제향하는 사당으로, 태조 왕건이 복지겸 장군에게 내린 시호를 따 이와 같은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공사 뒤로는 복지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데요. 사당이 있는 공간에서 우측으로 난 작은 문을 지나 오르면 단정하게 조성된 묘역을 볼 수 있습니다.
묘역엔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과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과 석물이 조성되어 있는데요. 이곳엔 석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준공 당시 조경사업도 함께 진행되어 꽤나 아름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는데요. 배면에서 마을을 바라봅니다
복지겸 장군이 양팔을 크게 벌리고 마을을 평화롭게 감싸고 있는것 같은 모습인데요. 그래서일까요. 마을의 풍경이 마냥 평화로워 보입니다.
순성을 지날일이 있다면 이곳에 잠깐 들려서 문화유산에 대한 조예도 키우고, 멋진 풍경을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주된 건물이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옆쪽으로는 ‘복지겸 장군 기념관’도 조성되어 있는데요. 아쉽게도 문이 굳게 닫혀 있어 관람하지는 못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서술된 <당진군사>에 의하면 복지겸의 주택은 면천 공립 보통학교의 부지 내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진군사>가 기록되던 당시까지 복지겸의 주택이 현지에 있었는지 아니면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조선 시대의 면천 객사와 현재의 은행나무와 인접하여 복지겸이 거주하던 주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면천 공립 보통학교는 면천 객사 건물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2그루의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년 전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에 관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복지겸 장군이 면천에 귀향하여 병을 얻어 앓고 있었는데 그 어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딸 영랑이 아버지의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아미산에 올라고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요.
100일째 되던 날 영랑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이야기를 해줬다고 합니다.
“아미산에 활짝 핀 두견화(진달래꽃)와 찹쌀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의 물로 빚고, 100일이 지난 다음 이를 아버지께 마시게 하고, 뜰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 나을 수 있다.“
이에 영랑이 그 말대로 술을 빚고 은행나무를 심어 지성을 다 하자 복지겸이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영랑 설화에 나오는 진달래꽃, 안샘, 은행나무, 안샘물로 빚은 술은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들이라 신빙성을 더해 주는데요.
당시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안샘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서 1,1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위엄을 뽐내며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당진의 중심지였던 면천의 역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운동장 안쪽에 서있는 나무는 밑줄기가 썩어 커다란 구멍이 있으나 치료를 통해 정상적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쪽으로는 복지겸 딸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영랑 효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효공원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신령이 찹쌀로 술을 빚을때 넣으라고 한 안샘물을 만날 수 있는데요. 안샘물은 수로를 타고 이동해 군자정으로 흘러 갑니다
안샘 위쪽으로는 면천막걸리 주조장이 보입니다. 면천막걸리는 생 막걸리로 열처리를 하지 않아 유산균이 살아 있어 보통의 막걸리와 차별화된 맛이라고 하는데요. 오전에 가면 소매도 가능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