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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지역 지연작전
1. 작전 개요
동해안지역 지연작전은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가 주축이 되어 1950. 6.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북한군 제5사단과 동해안으로 상륙한 제766부대, 제945육전대의 남진을 축차적으로 저지시킨 공방전이다.
동해안은 강릉-옥계-삼척-울진-영해-영덕으로 해안선을 따라 전투가 이루어지는데 내륙은 태백산맥의 높은 준령이 동서를 구분하고 있다.
6월 27일 강릉을 점령한 북한군 제5사단은 동해가도로 남진하기에 앞서 상륙부대인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를 울진 방면으로 선행하게 하여 제5사단이 포항으로 신속하게 진출하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였다.
반면에 국군은 6월 28일 제8사단이 강릉에서 제천방향으로 전환시키고 대신 부산에 있는 제3사단을 투입해 지연 저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수도권 방어가 무너지자 제22연대를 수도권 방어에 투이하고 제23연대 1개 연대로 동해안을 전담토록 하였다. 이에따라 제23연대는 기차로 대구를 경유하여 포항에 도착한 다음 29일 차량으로 울진 남쪽의 왕피천까지 진출하였다.
따라서 7월 1일에 울진을 점령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병행하면서 동해안 60km의 공간에서 지연전을 수행한다.
그러나 북한군 제5사단은 1개 연대를 산악기동토록 하여 스스로 전투력을 분산시키고 진출속도가 지연되어 사전에 침투한 육전대와의 협동작전이 원활하지 못해 그들의 작전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국군과 미군은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에서 지연전이 실시 되고 있었다.
가. 북한군과 국군 현황
(1)북한군 상황
북한군 제5사단은 사단장 소장 김창덕부터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보병 3개 연대 연대장 모두가 같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는 총참모부의 직접 통제하에 운용되는 부대로 개전 당일 임원진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88여단 출신 오진우 총좌가 지휘하는 부대로 주로 남로당원 및 강동 정치학원 출신으로 편성되었으며 상륙 직후에 일부 병력은 일월산-영양-청송을 향하여 태백산맥으로 들어갔으며 일부가 울진 방면에 죽변에 위치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후방에서 무장폭동을 유발하고 사전 침투한 유격대(*제주 4.3사건의 주범인 김달삼이 이때 들어와 보현산 일대에서 활동후 울산 신불산지역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나 전사에는 정선 고양산에서 죽은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와 지방 공비와의 연계를 꾀하면서 철도와 수송시설을 파괴하고 국군의 퇴로 및 증원부대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제945육전대는 개전초기에 정동진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1경비여단과 합동으로 강릉 북방에서 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동해가도를 따라 포항으로 진격하는 임무였다.
(2)국군상황
반면 국군 제3사단은 '47. 12.1일 부산에서 제3여단으로 창설되며 이때 부산주둔 제5연대, 대구 주둔 제6연대, 제주도 주둔 제9연대를 기간으로 '48년 제주 4.3사건, 여순 10.19사건, 대구 6연대 반란 사건이 발생하자 진압부대로 차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9연대를 제5여단에 편입시키고 새로이 3개연대(제15,16,18연대)를 창설하여 제15연대는 '48. 11월 25일에 제5여단에, 제18연대는 '49. 2월 1일부로 제2여단에 각각 편입되었다.
이어서 '49. 3월 15일에 반란 사건에 연류된 제6연대가 해체되고 4월 15일에 제22연대로 개편되고 6월 20일에는 제23연대가 창설되고 제16연대가 제2사단에 편입 되었다. '49. 5월 12일에사단으로 승격 되면서 '49. 7월 10일에 제5연대를 제2사단에 편입시키고 예하에 22,23연대만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제22연대는 대구에서 제23연대가 부산에 위치하면서 '50. 6월 25일에도 태백산 서쪽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계획을 광주의 제5사단과 합동으로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전면남침으로 이 작전을 중지되고 명령에 의거하여 제22연대와 사단 공병대를 서울로 올려 보내고 6월 27일에 적이 강릉을 점령하자 사단은 명에 의거 6월 28일부로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을 사단에 배속 시켰다. 독립 제1대대는 일명 서울유격대로 '48. 12월에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북한의 남파 유격대를 소탕하기 위해 창성된 부대였다. 그리고 영등포학원 부대는 '49. 2월 29일에 서북청년단원 367명을 기간으로 하여 유격전 임무수행을 위해 창설되었으며 창설 당시에 단대호는 호림부대였으나 '49. 8월 13일에 영등포학원으로 개칭하였다.
나. 작전경과와 유해발굴 및 탐문결과
(1)울진전투
이곳은 제23연대가 북한군 제766부대와 7월 1일부터 7월2일까지 울진을 중심으로 치른 공방전이다. 강릉이 피탈되면서 국군 제8사단은 지금의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평팡에서 제천-단양으로 이동해 가거 강릉에서 울진까지 92km는 무주공산으로 개방되었다.
당시에 미극동군사령부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동해안 4개 지점에 3,200~3,800여명의 북한군이 상륙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주문진에 400~600명, 호산(삼척시 원덕읍)에 2,000여명, 울진에 400~600명, 구룡포에 400~600명 등이었다. 여기서 주문진에 상륙한 병력이 정동진에 상륙한 제945육전대원이고 나머지 3곳이 제766부대였다.
임원진리 왕바위 해변에 상륙한 제766부대는 26일 자정에 선발대가 울진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울진의 남대천 연안에 배치하고 나머지 부대원들은 이미 사전 침투한 유격대와 통고산, 일월산 방면에서 결합하였다.
한편 , 육전대인 제945부대는 6월 25일 정동진에 상륙후 1개대대 규모가 강릉을 목표로 북상중 군선강 일대에서 국군 제8-21연대와 교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야 했다.
제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7월 1일 새벽에 남대천을 도하하여 울진을 탈환키로 작전계획을 발전시키고 08:00경 점령하였으나 적이 곧바로 6대의 장갑차를 선두로 역습을 해옴으로써 점령 3시간만에 다시 남대천 이남 왕피천 차안상으로 축차 철수를 하게 된다.
"왕피천에 떨어진 미군기를 찾아라"
남대천에서 대안상으로 올라서면 불과 150m정도의 낮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아군이 기습하여 도하작전으로 북한군 제766부대 선발대를 척결한 장소로 사실 올라가니 개인호등 많은 전투 흔적은 없었다.
또한 마을 분들의 제보역시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새벽녁에 국군이 들어오고 이어서 낮에는 북한군이 장갑차를 몰고 나타남으러써 국군은 바로 왕피천 이남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피천 남안에서 전투시는 미군기가 나타나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몰려드는 북한군에 기총소사를 하였는데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한 분을 만났다.
"비행기 조종사는 어떻게 되어습니까?"
"비행기가 바로 저기에 곤두박질하고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는데 조종사는 이곳에 떨어졌는지 알지 못해요. 북한군들이 수십명 달라붙어 뭘 확인하는지 요란을 떨었는데 우리는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요."
"나중에라도 비행기 잔해는 어떻게 처리 되었습니까?"
"얼마동안 그대로 있다가 사람들이 달라붙어 떼어가고 뭐 북한군이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 군에 갔다오니 흔적도 없어요. 누가 말하기는 홍수가 나서 씻겨 내려갔다는 말도 있고."
"미군들이 이곳에 와서 찾지는 안했는지요?"
"왔지. 전쟁이 끝나지 않했는데 코쟁이들이 왔고 동네아이들이 우르르 따라 다녔는데 조종사를 찾으러 왔다는데 차지못했다고 해요. 조종사는 비행기 추락시 함께 떨어져 화염에 휩싸여서 타버렸다고도 하고 강물에 혼자 떨어졌는데 시체를 북한군이 건져 갔다는 말도 있고 잘 모르겠어요."
"매화리에서 만난 아주머니~?"
나는 의문점만 들고 걸어서 남대천 차안상, 왕피천 차안상을 거의 거러어서 지역주민을 만났고 전투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 개인호를 구축하여 정상적인 방어이무를 했다고 판단할 만한 것은 식별하지 못한체 지역주민들의 "총 몇방 쏘고 떠나갔다'는 이야기만 귓속에 담았다.
그러다 매화리를 지나는데 웬 아주머니가 좀 보자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주머니인데 상당히 단단하게 생기셨다.
"뭐 찾으러 그렇게 동네 아저씨들을 다 만나고 다니나요?"
"예 우리는 유해발굴팀인데 6.25전쟁터를 찾고 전사한 군인의 유해를 찾아 발굴하는 국가사업을 하는 군인들 입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여기는 시간낭비입니다. 저 산골 속으로 들어가야 있어요."
"네? 산골이 어딘데 찾을 수 있다는 것인지 좀 알려주세요?"
"여기서 말하면 오래 걸리니 사달동에 가서 어르신을 만나세요."
우리는 사달동을 지도에서 찾았다. 매화리에소 매화저수지를 지나 정말 깊숙히 내륙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매화초등학교 갈곡분교가 있는 곳이였다. 함께 하고 있는 국방부 박인영 중령, 그리고 사계전문가라는 예비역 해병대 장교분이 말을 거들었다. 너무 길도 없고 외길인데 그런 곳에 전투가 있기보다는 게릴라가 숨어들어 은거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00년~) 솔직히 아무런 전사지식이 없다. 그저 전사책 한권(한국전쟁 요약본)을 들고 겨우 찾아보는 수준이다. 동해안 7번국도는 남북으로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길인데 이길을 벗어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북한군이 내륙으로 들어갈리는 없을 것 같은 판단이 나도 들었다. 결국 우리는 매화리에서 점심만 해결하고 평해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지나 나는 2006년도에 증평의 제67보병사단 및 제37보병사단의 포병 연대장(''03.5~'05.12)을 마치고 다시 국방부 유해발굴지역 조사팀 팀장으로 육본에 들어와 정덕이와 준화 2명의 중사를 데리고 전국을 조사하러 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피해가 많이 발생했다는 영덕지구 전투현장을 조사 나오면서 동해안 축선을 타고 강릉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 과정에 다시 평해에 들어와 외선미리로 이동해 혹시나 이곳에 전쟁관련 비화는 없는지 확인해 보았으나 군인도 북한군도 별로 보지도 못했다 한다. 백암온천에 들러 한여름의 흐르는 땀을 싯어낸 후에 평해 기성리에 갔다. 기성리와 바로 위에 있는 사동리(하사동)는 제23-2,3대대가 축차적으로 방어하고 내려오는 것이고 그 내륙인 사달동은 같은 제23-1대대가 평해에서 추진배치 되어 있다가 후퇴한다는 기록에서다.
"또 다시 마주친 그 아주머니, 내가 당사자요"
하지만 전투 흔적이 없다. 주민들도 그저 왔다가 내려가고 북한군도 그저 왔다가 밑으로 갔지 별 전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몇해전 만났던 그 아주머니를 만났다. 내가 알아본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 복장을 보고 다가선 것이다.
"사달동에 가보셨나요?'
"예 갔는데 동네 어른들이 없어서 몇몇 물었는데 잘 모른다고 해 조사를 길게 못했습니다."
"아니 내가 그곳에 살았는데 창피해서 말 못하겠고만. 국군도 들어오고 북한군도 들어오고 집집마다 들어와 잠을 자고 먹을 것 다 빼앗아 가고 여자는 모조리 겁탈하고 갔는데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하니 내가 당자자인데 뭘 조사하는 거예요?"
"아주머니 죄송합니다. 우린 싸우다 전사한 군인을 찾는 거라... ."
"누가 몰라요, 요즘 TV에도 자주 나오는데. 우리동네 집집에 들어와 잠자던 군인이 북한군에 죽어서 그냥 집마당에 시체가 있기도 하고 20명도 넘게 죽어 동네에서 다 묻어버렸는데 모른다고?"
나는 빨리 그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대답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언제 나고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는데 산골에 집이 한곳에 집단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뜸하게 있는 곳으로 들어온 군인들은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른다.
이미 전쟁전부터 북한군 일부 유격대들이 들락달락거렸고 전쟁중에도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온 유격대 선발들이 자유롭게 지나간 곳이다. 낮에 들어오는 군인 다르고 밤에 들어오는 군인 다르고 그나마 먹을 것도 없는데 봄에 뿌릴 씨앗까지 다 돌려가버려 동네는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여지들만 몇 남아 있던 동네다. 남자들은 걸어다닐만 하면 다 북한군인지 아군인지 모르지만 따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얼마동안은 들어가 살지도 못했다. 산속에 숨어있는 인민군 잔당들이 아예 제집처럼 죽치고 다녔기 때문에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켰다 한다. 그래서 결국 어디서 왔는지 나중에는 여기저기 피난민들이 들어와 화전을 해서 끼니를 해결하는 동네였다며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그 실체는 확인되지 못했다.
(2)영해 부근 전투
영해 부근전투는 울진에서 전투를 한 제23연대가 해군포항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북한군 유격대를 맞아 7월 3일부터 7월 13일까지 평해-영해를 중심으로 치른 전투다.
연대는 울진에서 철수하여 7월 2일 05:00에 평해에 도착하여 유군으로부터 배속받은 독립 제1대대와 영등포학원 병력을 받아 기성리 일대에 배치 하였다.
북한군 제766유격대는 계속하여 아군을 추격하여 오고 일부 병력은 내륙으로 들어와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사전 침투한 유격대들과 규합한바 칠보산(810m), 등운산(767m), 내륙의 운서산(520m),독경산(518m) 일대에 약 1,20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연대는 내륙에 들어와 있는 북한군 유격대를 격멸하기 위해 산악지형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대에 유엔군의 항공 지원이 병행 되었다. 지휘소는 형해에서 영해로 다시 7월 7일에는 전방지휘소를 평해에 개설하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준비하였다.
7월 9일 기성리 전방으로 북한군이 접근하였으나 격퇴되고 비행기 폭격으로 북한군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한편 영해 이남인 포항의 죽장면 구암산 지역에서는 해군 육전대가 청송방면에서 포항으로 침투하는 북한군 유격대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해군 육전대는 7월 1일부로 포항경비부에 배속된 묵호경비부 대원들과 포항경비부 기지 근무 장병을 기간으로 7월 5일 중대규모로 창설되어 일명 '용호대'라 불리다가 7월 9일에 진해에서 증원병력이 도착하여 대대 규모의 '강호대'로 증편되었다.
해군 육전대는 포항에 본부를 두고 보현산과 구암산 일대의 유격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7월 13일에는 영천 북안면 구룡산(674m)에 1개중대 규모가 잠입했다는 것을 포착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8명 사살에 30명을 생포하기도 한다.
"경주 서쪽에 들어선 북한군 유격대 또는 친 게릴라부대"
사실 이 내용으로 보면 전쟁 당시에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이 전국 곳곳에 포진하고 있고 실제 전쟁전에 남파된 유격대들이 주요 목을 선점하고 있었으며 남침을 개시한 적 제12사단이나 5사단, 여기 제766부대원들이 팔로군에 소속되었던 조선의용군이나 남한에서 올라간 인원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 정규군의 성격보다는 게릴라부대였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도 그렇것이 사실 이 동해안은 아무런 방어태세가 없었음에도 밀어붙이지 못하고 괜스레(?)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이나 하고 시간을 허비하여 서울에서 3일간 지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방어준비를 하도록 시간적 여유를 준셈이 된다.
따라서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예군이라 하는 제12사단이나 5사단, 그리고 제766부대(총좌 오진우의 고향이 함남 북청이라하는데 어느 경주 지방 사람이 자기동네에서 태어나 북으로 갔다고도 함)는 남한 인원이 많아 혹시나 향수에 젖어있지는 안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우리도 보국대대니 영등포 학원이니 하는 구성원들이 북에서 월남한 인원들이 많았고 실제 그 사상을 검증하기 위해 주로 남한에 투입딘 게릴라 토벌작전에 집어넣어 시험을 했다는 설과도 맥락이 비교 된다.
사실여부를 떠나 어쨌든 구룡산으로 침투한 게릴라를 소탕하는 등 해군 육전대의 활약등에 힘입어 북한군의 포항 영일 비행장을 조기에 무력화 시키려던 계획은 차질이 초래되며 미군은 7월 7일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에게 제19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영일 비행장과 포항에 대한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내가 해군 육전대로 구암산지역에서 싸웠다."
그러던 어느날에 한 참전용사께서 증언을 해왔다. 본인이 직접 전투를 했다고 하며 전사한 전우를 현장에서 화장하여 묻었다는 이야기다.
이에 우리는 해병대 유해발굴팀을 이끌고 있는 유소령과 협조하여 2009년부터 2012년 어간에 1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실제 몇구는 화장된 형태로 발굴 되어 그 증언을 밑받침하여 주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당시에 육전대가 격멸작전을 하러 들어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벌써 북한군 유격대가 들어와 산속에 머물고 있으면서 밤이면 내려와 약탈해 가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복작전을 감행에 야간에 망르에 내려오던 적들을 일망타진 하는 가운데 희생자도 생겼고 포로를 1명 잡았는데 본대가 구암산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본대의 통제로 구암산 진격을 멈추고 바로 죽장면쪽으로 내려와 보현산 우측에 있는 수석봉일대에 대한 수색정찰을 강화하면서 포항으로 들어오는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한다.
"칠보산-등운산에 북한군만 왔다 갔지."
나는 전사적 사실을 확인하러 필보산 일대를 탐사하려고 울진 온정에서 조금리-원수목이 경로를 택했다. 그러나 원수곡에 이르니 지역주민이 여기서 오르면 힘들고 동쪽 유금사란 절쪽에서 오르는 오르는 길이 있어 쉽게 탐사를 할 수 있다하여 다시 차릏 후포로해서 병곡면 금곡리로해서 유금천을 따라 들어 갔다.
물론 원수곡 일대의 주민들은 나중에 들어와 그런 흔적이나 이야기를 발견했거나 들은 적이 없다하였다. 이동하는 구간은 정말 산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집들 또한 별로 없다.
그러다 유금사가 가까워지는데 산능선이 완전히 동쪽에서 서쪽-남쪽으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실제 들어가니 계곡이라기 보다는 조용한 산골마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정도 들어가니 삼거리가 나오고 밑으로 가면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나오고 계속 앞으로 이동하면 유금사 들어가는 길인데 평야지대같이 공간이 넓게 펼쳐진다.
"무슨 전쟁이요?" 유금사 주지스님의 질문이다.
"전사에 이곳 칠보산-등운산에 많은 적 유격대가 들어왔고 우리가 토벌작전을 했다 합니다."
"전쟁은 없고 군인들이 길을 잘못들어 왔다가 바로 나가고 사실 능선에는 공산군만 왔다갔지."
동해안에서 함포사격이 이어지고 있어 인민군은 능선 너머 원수목이에서 삼계리로 빠졌고 국군은 다시 진출할 때에 길을 잘못 들어 이곳으로 왔다가 바로 나갔다는 것이다.
우리 탐사팀이 오라 실태를 확인결과 실제 능선에는 개인호가 별로 굴토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금곡리로 나와 이곳에서의 전투흔적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주민들 이야기가 국군은 왔다가 바로 뒤로 밀려나가고 공산군도 바로 뒤따라 오지도않고 전쟁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인데 다만 바다에서 칠보산 쪽으로 매일 엄청난 포탄을 퍼부어 구경꺼리가 장관이였다 한다.
(3)해군의 해상지원
1950년 6월 27일 미 해/공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극동해군사령관은 일본 사세보에 기지를 둔 한국지원전대를 편성하고 주노함과 4척의 구축함을 동해안에 출동 시켰다.
주노함은 개전이래 최초로 6월 29일에 묵호 북방의 북한군에 5" 포탄 400여 발을 발사하였고 7월 2일부터 주문진-삼척-울진 등 동해안 연안지역의 북한군 병력과 보급, 수송시설에 대규모 공격으로 이어졌다. 7월 4일에는 영국 호위함 블랙 스완함, 자마이커함이 가세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5사단은 울진에서부터 공습이 매우 심하여 비행기 소리만 들어도 쥐구멍을 찾았다고 하며 주간이동을 포기하고 야간에만 이동해 진출 속도가 느렸고 따라서 7월 8일에 울진을 점령하고선 5일 이상이 걸려 7월 13일에야 평해에 이르렀다.
(4) 국군 제3사단의 영덕 방어선 형성
7월 10일에 사단장을 유승렬 대령에서 이준식 준장으로 교체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사단은 영해-영덕에 3중의 축차진지를 편성해 최대한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다.
적은 아군 해상화력의 위력앞에 고개를 숙이고 내륙으로 분산됨에 따라 울진점령후 12일까지 별다른 공격을 못하고 국군은 이 시기에 재편성과 진지를 견고하 하여 적에게 맞서는 대비를 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한미 양군은 7월 5일부터 차령산맥의 평택-충주-울진에 연하는 전선에서 12일까지 약 1주일간 적을 지연하였으며, 금강-소백산맥을 잇는 방어선으로 작잔상 철수를 하여 미국이 금강선을, 국군이 소백산선을 도맡아 지연작전을 계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