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6.25 전쟁 때 미군공습으로 인해 완파되었습니다.
그때의 사진을 다수 발견했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건 또 남다르더군요.
특히나 불타버려 촉석루를 새로 지었다는 건 알지만, 텅빈 공간을 보는건 더 남다르고요.
그만큼, 상심한 시민들을 위해 개천예술제를 연 설창수 시인의 마음은 대단합니다.. |
출처는 파비아노님의 '맨날 추억에 사네' 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실테고요. 강추강추~ |
사진은 미 8035 통신부대원이 찍었다고 하는데요.
1950년 7월 31일부터 9월 25일까지가 인민군 점령기간이었으니,
파괴된 진주대교 옆에 임시부교가 설치된 걸 보면 촬영시기는 10월 전후일 듯 합니다.
강너머 저쪽이 진주 북쪽인 촉석루쪽일까요? 아니면 남쪽일까요?
그 답은 산고개의 나무 한그루가 말해줍니다.
1935년 진주고등학교 졸업앨범 속의 진주고 뒤편 모습입니다.
바로 그 나무로 짐작됩니다. 검색을 해보니 지금도 당당히 서 있더군요.
그러니까 진주 백년사를 저 위에서 두눈 뜨고 지켜본 산증인과 다름없습니다.
다리는 비행기 공습으로 그리 쉽게 파괴되지 않나 봅니다.
골조 전체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고 상판만 도중도중에 파괴되어 햇살이 비켜들어오네요.
저멀리 역시 느티나무가 보이는군요...~
진주에 대한 기억이 하도 오래되어 가물거리지만, 진주시민들은 여기가 어디쯤인지 잘 알겠죠.
비봉산을 좌로 돌아 산청 쪽으로 북상하는 길일까요.
탱크는 오래전 미군의 폭격에 의해 완파된 북한 탱크로 보이는데요.
Welcome US Army라는 글자가 확연합니다.
차량 우측으로 한국군이 북상하는 모습입니다.
저들 앞으로 아직도 전쟁은 3년이나 남아있다는 이야기.
이곳이 진주 한복판일 것 같은데요. 얼마나 막막하고 황막했을까요.
전쟁 중에도 설창수 시인에 의한 개천예술제는 진행되었는데요.
서울에서 대거 내려온 문단계의 이영도 시조시인이었던가.
'천장 뻥 뚤려 밤별들이 그대로 보이는 극장에서 문학행사를 하였다는' 뜻깊은^^ 감회를 밝힙니다.
저멀리 교회가 이곳이 어디쯤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내에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진주 인근에는 이정도로 파괴된 곳은 없을 것 같은데요.
시민들은 다시 돌아왔을 때 이 모습 보고 어떠했을까요.
이곳 역시 진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통신장비를 설치하기 좋은 곳은 비봉산일테니 그 아래쪽쯤 되겠죠...~
이제 촉석루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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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 관한 이런 책이 있었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
김경현씨가 최근 펴낸 <민중과 전쟁기억-1950년 진주>
(도서출판 선인, 475쪽, 2만6000원).
김경현은 또한 '진주 이야기 100선' 도 썼다고 하는데요.
도민일보에 이 책을 소개한 글을 보면
대단한 기개와 집념이 있으신 분 같습니다.
미군의 남한 도시 폭격에 관해서는
이 책에 관한 또다른 소개글은
그리고 이책을 소개한 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의 글을 더 읽으시려면
'아군이 짓밟은 진주' 그 날의 기록 |
친일진상규명위 김경현 조사관 한국전쟁 상황 책으로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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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경현씨가 최근 펴낸 <민중과 전쟁기억-1950년 진주>(도서출판 선인, 475쪽, 2만6000원). | | | 6·25전쟁 당시 진주시민들은 인민군보다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입증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있는 김경현씨는 최근 펴낸 <민중과 전쟁기억-1950년 진주>(도서출판 선인)라는 책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성폭행 = 이 책에 따르면 인민군이 진주를 함락하기 전에는 최소 수천여 명의 보도연맹원과 교도소 재소자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특히 미군은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된 1950년 7월 31일부터 초토화작전에 따른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8월 3일 진주시 주약동 약골 진치령 기차터널에 모여 있던 피란민 40~50여 명이 미군의 기총소사와 폭격에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등 경남 일대의 희생자 수만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미군은 또한 진주 탈환에 실패하고 마산으로 후퇴하면서 진주지역의 농촌 부녀자와 피란 온 부녀자들을 성폭행, 납치, 살해했으며, 특히 이반성면의 한 마을에서는 수십 명을 성폭행한 후 탱크와 트럭에 실어 납치했다는 기록도 나왔다.
뿐만 아니라 아군이 진주를 탈환한 후에는 미처 피란하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이 부역자로 몰려 처벌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주를 포함한 경남 일대에서 검거된 부역자는 2786명이었으며, 이 중 1931명이 송치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석방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또 1950년 7월 31일부터 9월 25일까지 인민군 점령기간에도 86명이 반동분자로 몰리거나 보도연맹원 유족들의 보복학살로 피살됐고, 250여 명이 인민군 의용군이나 부역군으로 끌려갔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진주·진양에서 납치된 인원은 모두 96명이었다.
◇진주시민에겐 '생존전쟁' = 김경현씨는 이런 사실을 근거로 진주시민에게 6·25전쟁은 처절한 '생존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김씨는 특히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던 당시 군·경과 공무원, 기득권층이 겉으로는 '진주 사수'를 외치며 시민들을 속인 후 정작 자신들은 은밀히 진주를 탈출해버린 사실에 주목했다.
심지어 진주가 함락되던 날(7월 31일) 비로소 휴교조치를 한 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진주시장과 진양군수, 경찰서장은 물론 소방서와 신문사 등 결사항전을 외쳤던 기관장들은 지역민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김씨는 "이승만 정권의 허위선전과 기만적인 직장사수 명령 및 경찰의 피란 금지령으로 미처 탈출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인민군 치하에서 반동분자로 처단당하거나 수복 이후 부역자로 전락했다"고 개탄했다.
9월 25일 아군의 진주 수복 후 남아 있던 진주의 모든 시민들이 부역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피란 가지 못한 교사나 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대해 한 교사는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언동이냐!…최후까지 직장을 사수하라는 지시만 남기고 피란 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린 당신들이 무슨 면목으로 이제 찾아와서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울분을 털어놨다는 기록도 있다.
| | | | | 미군에 의해 불타기 전인 1940년대 촉석루의 모습. | | |
| | | | |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돼 흔적도 없는 촉석루의 모습. | | | ◇국보였던 촉석루마저 폭격 =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인민군 주둔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시민 생활과 직결된 병원이나 약국, 학교, 성당과 교회는 물론 국보였던 촉석루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지금은 경남문화재자료 8호로 격하돼 버렸지만 촉석루가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기 이전까지 국보 제276호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리 전쟁 때라도 문화재에 대한 폭격만큼은 피하는 게 세계적인 관례다. 그런데 미군은 왜 촉석루를 폭격했을까.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진주에 낙향해 있던 서울대생 김일은 "미군 폭격기가 인민군이 주둔해 있던 배영국민학교를 폭격한다는 것이 그만 오폭으로 빗맞아 엉뚱하게 국보였던 촉석루가 불탔던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B-29의 공습으로 진주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고, 그런 와중에서도 시민들은 촉석루 근처로 몰려나와 촉석루가 불타는 것을 망연자실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폭격 시기는 8월 중순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국군 조종사 장지량은 "8월 중순 정찰과 지상군 지원 폭격에 나서고 있는데, 미해병 전투기들이 진주 남강의 촉석루를 폭격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며 "(원래 미군의 폭격은) 지상부대의 연락을 받고 미공군이 폭격을 하는데, 때로 그들의 편의대로 폭격을 감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촉석루 폭격도 그 경우였다"고 술회했다.
이같은 무분별한 폭격의 결과 당시 지상에 서 있는 건물은 진주극장과 상업은행만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군부대(G-2)에 배속돼 있었던 조웅대 씨마저 "뒤에야 안 일이지만 이것은 적인 인민군의 만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군인 미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한 것"으로서 "수많은 생령들이 희생되고 단 한푼의 보상도 없이 시민들의 재산은 잿더미로 화하고 만 것"이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
물론 촉석루도 불타고 새로이 지었다는 건 아는데요. 사진으로 보니 남다르네요.
파괴되기 전 모습입니다.
눈부시게 아름답네요.
책에 의하면 촉석루는 국보 제276호였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어째 이런 일이...
이곳이 촉석루가 아닌 전혀 다른, 텅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건물이 자연과 한몸이 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촉석루가 이곳에서 화룡점정의 위치에 있었다는 걸 잘 알 수 있습니다.
1956년 제7회 개천예술제 기사에는 촉석루지(矗石樓址)라고 해서 터 지(址)를 써고 있네요.
위키에 의하면,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떄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인간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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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 사진출처
1953년 경 서울 시내와 저 멀리 인왕산 모습입니다.
인왕산이 너무 불쌍히 보여서 제대로 눈을 못맞추겠습니다.
인왕산에 관해서 가장 애처로운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출처
1964-5년 동두천쪽에서 근무한 미군이 찍은 사진인데요.
제가 보기에는 일산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뒷^^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좌로부터 인수봉 - 숨은벽 - 백운대 - 염초봉으로 이어지는....
출처는 위와 같고요,
1964년 동두천의 국수공장 모습이라고 합니다.
국수를 잘라서 저렇게 대나무에 걸쳐서 말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처음 봅니다.
국수를 좋아하는 이로서....^^
참고로 지금도 국수면발은 냉면처럼 '뽑는'게 아니라, 칼국수처럼 '잘라'서 만든다고 하죠.
1968년 의정부에서의 국수공장 모습입니다.
주변 환경이 상당히 '막^^'국수 스럽군요..
해방이후 국수말리는 모습을 시대적으로 보시려면
*사진출처
1954년 미군에 의해 찍인 중앙청과 그 뒷산입니다.
저멀리 성채처럼 둘러 쌓은 건 문수봉과 보현봉을 중심으로 한 북한산 남쪽 줄기일텐데요..'
일제 때 한국인을 찾은 외국인은 북한산을 검은색 바위로 둘러쳐진 위압적인 공간이라고도...
그런 느낌입니다.
첫댓글 제가 아는 파비아노 님 소개를 보니 반갑네요. 진주성 앞 상가단지 재개발로 철거된 소식 아시나요? 유정장어집도 이사갔답니다.
파비아노님은 뭐랄까..과거를 검색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 지나가야할 관문이잖아요...
저는 중앙일보의 파비아노님 블로그에서 나마스테님 글을 읽고 반가웠습니다...
진주성 앞 소식은 전혀 모릅니다.
유정장어집도 이름만 기억하고 있고요. 고등학교때라서 먹어보지 못해서.....
지금도 어르신들은 진주에 사시는지요?
저희 친척들이 계세요. 진주 남강에 오리배가 없어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리산 천왕봉 등정후 유정장어에 가서 장어 먹고 오리배 타고 진주행 뱅기타고 서울로 돌아오곤 했거든요.
꽤 괜찬은 지리산 등산 코스^^이네요.
진주성과 촉석루 말고는 점점...어디나 별다를 게 없는 풍경의 지방 소도시가 되어 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