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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 내용 추가, 등장인물의 이름 수정 등)
* 이 글에서 언급된 인명, 단체 및 사건 등은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제보자
WRITTEN BY 승짱
# 김두식 의원 출판 기념회
ㅡ W 호텔 3층 다이아몬드 홀
"저에 대한 기사를 준비 중이시라고요."
인기척도 없이 진에게 다가가 대뜸 말을 건네는 김두식 의원.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 정보가 빠르시네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안경을 고쳐올리며 운을 뗀다.
"최 진 기자님을 청와대로 모시자는 얘기가 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어요."
처음 듣는 얘기라 매우 놀랍다는 듯한 뉘앙스를 주기 위해 진은 양 눈썹을 들썩이며 되묻는다.
"그런가요. 청와대 사람을 의회에서 논의하는지는 몰랐네요."
김 의원이 멋쩍어한다. 반짝이는 안경 너머의 두 눈은 본인이 누구보다 진실된 사람임을 연기한다. 김 의원의 겸손 떠는 모습을 본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하염없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기막힌 풍경에 하마터면 욕지거리가 나올 뻔했다. 세상 말세다.
"아하하, 그게... 아무래도 나름 중진이기도 하고 지금의 우리 당이 되기까지 어려웠던 시절 당에 꿋꿋이 남아 노력했더니만. 대통령님도 저에게 가끔 조언을 구하시는 편이지요.
아, 물론 제 자랑은 아닙니다. 부디 오해하지 마셨으면 하네요."
부끄럽다는 듯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며 한 손으로 백발의 머리를 쓸어 넘긴다.
"기자님이야말로, 그동안 굵직굵직한 기사 여러 번 내시고 못된 정치범들 잡아 감옥에 보내셨으니 우리 정치계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하신 분 아닙니까, 하하. 인지도도 높은 편이시니 청와대는 당연한 수순이지요. 들리는 말로는 제1 야당에서도 기자님을 모셔가려고 혈안이랍디다."
김 의원은 연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마치 진이 이룬 그간의 업을 칭찬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토닥인다. 지나가던 웨이터를 멈춰 세우더니 그의 한 쪽 손에 올려져 있는 트레이에 놓인 황금빛깔의 샴페인 두 잔을 덥석 집어 든다. 자연스레 진에게 한 잔을 건넨다.
"음...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다. 이마를 긁적이며 무엇이 그리도 고민스러운 것인지 입가에 깊게 패인 주름은 웃음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다.
"결정적으로 내 싸인 하나만 남은 상황인데,"
"나는 확신이 안 서네요."
샴페인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잔잔했던 샴페인의 표면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기자님이 우리 편인지요."
싱긋 웃는다. 그것은 비릿한 웃음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그 누구보다 또렷한 눈이다. 또렷하게 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형상이 퍽 소름이 끼치는 노릇이다. 칠흑같이 검고 반짝임 하나 없는 그의 영악한 눈동자가 진을 위아래로 순식간에 훑는다. 마치 그 모양새가 먹잇감을 몇 입에 나눠먹을 것인가를 신중히 계산하는 야생동물의 그것이었다.
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단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손에 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켤 뿐이다. 어째서일까. 최고급 샴페인임에도 썩은 내가 진동하는 듯하다.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진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의 키보다 머리 하나 높은 곳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내려온다.
어라.
이 목소리
꽤 익숙하다.
"왔니. 이리 와서 인사 나눠라."
부지 부식 간에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을 한 김 의원은 남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자상한 아버지의 것과 같다 할 수 있겠다. 훤칠한 키의 남자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앞으로 뵐 일 많을 거야. 최 진 기자님이시다.
기자님, 제 조카 녀석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재원입니다."
"의원님의 정무비서입니다."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든다.
바에서 입을 맞췄던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 행세를 한다. 상황이 꽤나 웃기게 돌아간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 진입니다."
# W 호텔 인공정원
"선배!"
진을 발견한 해영의 얼굴에 웃음이 만연하다. 그녀를 향해 팔을 크게 휘적인다.
"뭐 좀 알아냈어요?"
"그런 것 같아. 근데 좀 더 지켜봐야 돼."
해영이 끄덕인다.
"그쪽은 어떻게 됐어?"
해영은 입꼬리를 축 내리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똑같아요. 아무래도 받은 게 있으니 입을 열 질 않아요."
"피해자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가족들이 워낙 완강히 반대해서."
이번엔 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섭기도 하겠지. 입을 열었을 때의 그 후폭풍이."
"아무리 그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가족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려 하지 마. 이해는 우리 몫이 아닐뿐더러 이해하는 순간 객관성은 무너지게 돼 있어."
"...오오. 선배, 좀 멋있는데요."
해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들썩인다. 그리고는 입술을 모아 앞으로 쭉 내민다.
"참나"
익살스러운 그의 모습에 진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 참, 알아봤어? 아까 전화했던 거."
"아."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수첩을 꺼낸다. 수첩 한가운데에 볼펜이 끼워져 있다.
"이름 김재원. 대학교 2학년 때 CPA를 붙은 수재였고요. 졸업 직후 법인에서 일하다 몇 년 전 김두식 보좌하는 일에 전념하려는 건지 퇴사를 했더라고요. 그리고 특이한 점이... 그 둘이 친척 관계가 맞긴 맞는데요..."
"...? 계속해."
해영이 말을 멈추자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진이 재촉한다.
"그게... 김재원 씨가 17살 되던 해에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었더라고요. 당시 뉴스에 나올 만큼 꽤 큰 사고였어요. 혹시 기억나세요? 삼해철강 회장 부부의 교통사고. 삼해철강의 김해식 회장이 김두식의 둘째 형이자 김재원 씨의 아버지였어요. 그 사고가 있은 뒤로 김재원 씨는 김두식이 맡아서 키우게 된 거고요."
수첩 속에 끼워져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내 진에게 건넨다. 스크랩된 신문기사에는 회장 부부의 사진과 사고 현장이 찍힌 사진이 걸려있었다.
《삼해철강 회장 부부, 교통사고로 숨져》
오는 새벽 공항으로 향하던 삼해철강의 김 회장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 /신호를 무시한 채 달리던 덤프트럭에 치여 / 가해자는 덤프트럭을 몰던 이 모 씨(32)로 당시 면허취소 수준인 혈중알코올농도 0.154%인 것으로 밝혀져 / 사고 직후 도주하던 이 씨는 검문 중인 경찰에 붙잡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영 역시 입을 다물었다. 고요한 적막이 계속되던 중 어느새 진의 손에는 담배 한 까치가 들려있다. 파란 민트의 잎사귀가 그려진 담뱃갑을 내보이며 해영에게도 권해보지만 해영은 웃으며 사양한다. 뒤를 돌아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깊게 빨아들이고 긴 숨을 내쉰다. 민트향이 코 안을 맴돈다.
"... 형제는?"
"외동일 거예요. 급하게 조사한 거라. 좀 더 알아볼까요?"
"아냐. 충분해. 수고했어."
기사 조각을 다시 반으로 접어 해영에게 돌려준다.
다시 한 번 뒤를 돌아서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담배 끝에 걸린 재를 톡톡 털고서 말한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왜 온 거야. 곧장 퇴근하지 않고. 내일 사무실에서 보고해도 되는 건데."
"그, 그게... 집에 가는 길이기도 하고..."
초반의 능글맞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해영은 당황하며 말꼬리를 흐린다. 진이 짧지만 경쾌한 코웃음을 치고는 해영을 향해 고개를 까닥인다.
"들어가. 운전 조심하고."
"선배는요?"
"난 좀만 더 있다가."
해영은 금세 시무룩해진다. 기자라는 녀석이 얼굴 표정으로 자신의 기분을 한껏 내비친다. 웃긴 녀석이다.
"표정 좀 숨겨라."
해영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친다. 야외정원 곳곳에 마련되어있는 재떨이 중 한 곳에 담배를 짓이긴다.
"나 간다. 내일 보자."
진이 치고 간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쓰다듬더니 입술을 씰룩인다. 어느새 빨개져버린 양 볼을 손으로 감싸면서 떠나는 진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다 이내 자신의 차로 돌아가는 해영이다.
연회가 열리고 있는 3층 다이아몬드 홀. 창이 열려있던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영문인지 커튼이 펄럭인다.
재원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엔 샴페인을 든 채 창가에 기대어 섰다. 허영과 가식뿐인 연회에 지쳐 잠시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그들을 발견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진 기자의 앞에서 웃고 떠들던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기 시작한다. 그녀의 조사관인가. 심각한 분위기가 이어지더니 어느샌가 최 진 기자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다. 남자에게 연기가 닿지 않도록 그녀가 몇 발자국 물러선 덕에 남자의 얼굴을 나름 관찰할 수 있었는데, 꽤 미소년이었다. 헌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뭐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고루할 것만 같았던 연회장에서 뜻밖의 재미라도 발견한 것인지 재원의 한 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는 들고 있던 샴페인으로 간단히 목을 축이고는 이내 창가에서 멀어져 갔다.
*
김 의원의 주변을 서성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말을 섞으려는 건 아니었다. 아까 전의 대화로 김 의원의 의중은 이미 파악되었으니 말이다. 대신 그의 옆에 묵묵히 서있는 김재원이란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사람들이 김 의원에게 인사를 하러 올 때마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김재원을 소개해주는 모양이었다. 재원이 옅은 웃음을 입가에 걸고서 악수를 해대는 것이 훗날 정치계에 입문하려는 듯한 모양새라고 진은 생각했다.
그 뒤로 별다른 소득이 없자 집에 가기 전 마지막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기 위해 테라스로 향한다. 연회장에서는 여전히 웃고 떠드는 소리가 창밖으로까지 이어진다. 테라스에서는 해영과 만났던 야외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곳곳에 설치된 오색 빛깔의 조명과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분수가 꽤 볼 만 했다.
정원에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무진장 넓은 곳이었구나, 담배를 꺼내 입을 물고 불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그 친구는 그냥 후배인 건가."
뒤를 돌아보자 재원이 뒷짐을 쥔 채 서 있었다. 재원의 뒤로 어느새 커튼이 쳐져 있어 이곳에서의 모습이 연회장 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
소리 없이 웃으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는다.
"저에게 관심이 많으시네요. 의원님이 지켜보라고 시키던가요?"
말을 마치고는 다시 입에 물었다. 진을 나른하게 쳐다보던 재원이 천천히 진에게로 다가가다 그녀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두 팔을 쭉 뻗어 진의 뒤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니 진을 자신의 안에 가둔 모양새가 되었다. 허리를 숙여 진의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춘다. 바에서의 입맞춤이 문득 떠올랐다.
"난 좋았는데. 또 하고 싶게."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재원이 순간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물고 있던 담배에서 미세하게 나오는 민트향이 두 사람의 코를 솔솔 간질였다. 재원의 시선이 진의 입술에 머물렀다. 그가 손을 들더니 진의 입에서 담배를 빼내었다.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으시네."
진의 재원의 팔을 잡고 내려 그가 만들어 놓았던 작은 감옥을 풀었다. 들고 있던 라이터를 가방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벗어나 환한 불빛을 내뿜고 있는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멈칫한다.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어깨너머로 흘리듯 얘기한다.
"그냥 후배는 아니고
... 아끼는 후배라고 해두죠."
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테라스의 문을 열고 자리를 뜬다.
그녀의 말을 곱씹어본다.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 정의내릴 순 없지만 어쨌거나 남녀관계는 아닌 모양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재원은 웃음이 나왔다. 뭐야, 안심이라도 한 건가.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졌다. 몸을 빙글 돌려 진이 바라보던 정원을 감상한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진의 담배를 그녀가 했던 것처럼 물어본다.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들이자 민트향이 그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녀와 매우 잘 어울리는 향이라고 생각한다.
ᅵ 보도 D-2
# 진의 사무실
"저... 부장님,
사장님 호출...입니다."
호기심 어린 직원의 눈빛을 못 본 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 왔다고 진은 생각한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별안간 가방을 뒤적인다. 하얀색 파우치에 담긴 립스틱을 꺼내어 입술에 덧바른다. 섬세하고 깔끔하게 입술선을 따라 그리고 전체를 빈틈없이 매운다. 휴대용 향수의 뚜껑을 열고 은은하게 피어나는 장미와 샌들우드의 관능적인 향으로 온몸을 휘감는다. 그 옛날 무사가 전쟁에 나가기 전 갑옷을 입고 전의를 다지듯 진은 방 안에 남아있는 향을 충분히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불과 몇 분 후 마주하게 될 모든 경우의 수를 헤아려본다. 여기서 잡아먹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장실이 위치한 15층에 도착하기까지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진을 마중 나온 김 의원의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목례를 건넨 뒤 그녀를 사장실로 안내한다. 문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이라는 괴물이 15층 전체를 잡아먹기라도 한 듯 고요할 뿐이다. 비서의 짧고 굵은 세 번의 노크 소리만이 이곳에서 발생한 유일한 소음이었다.
문이 열린다.
문틈 사이로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파란색 넥타이에 검은색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재원의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색 서류 가방이 놓여있었다.
진과 눈이 마주치자 재원이 슬쩍 웃어 보인다. 살얼음판 같은 이곳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풍겨 마치 재원과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장이 앉아있어야 마땅한 중앙에 놓인 1인용 소파에는 김 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본인의 사무실인 양 양 팔을 팔걸이 위에 올려놓고 매우 편안한 자세를 취한 채 진을 맞이하고 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한 그의 표정이며 모습이 진의 머릿속에서 매우 탐욕스럽게 그려졌다. 그의 오른쪽에 위치한 길쭉한 소파에는 사장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떨군 채 앉아있다. 아, 굴욕을 느낀 자의 모습이다. 그의 옆으로 사회부의 이규석 부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우 비이상적인 풍경에 진의 눈썹이 꿈틀댔다. 자신의 자리를 모르는 자에 대한 일말의 분노였을까. 그것을 재원만이 알아차렸다.
"자, 얼른 이리 앉으시고."
김 의원은 재원의 옆자리를 가리켜 진에게 앉기를 권하더니 이내 사장실 한편에 놓인 장식장을 열어 그중 최고급의 양주를 꺼내온다. 굳은 표정의 사장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김 의원의 비서가 얼음이 든 잔을 각자의 앞에 서빙하고 나서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를 열고는 가장 먼저 김 의원의 잔에 들이부었다. 모든 잔이 채워지자 김 의원이 흡족한 미소로 구둣발을 위아래로 까닥까닥 흔들었다.
"최 기자님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언론이란 게 결국 정부의 개 아니겠습니까."
"까라면 까고, 덮으라면 덮고. 이 바닥 생리야 최 기자님이 저보다 빠삭하시지요?"
김두식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에서는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재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낸다. 재원은 발 옆에 놓아뒀던 검은색 서류 가방을 열어 종이 한 장을 진의 앞에 꺼내 보인다.
"... 이게 뭐죠?"
"보다시피 내 사인은 이미 해놨고,
최 기자만 서명하면 최 기자는 이제 청와대 연설비서관이 되는 거지요."
흠칫 놀라 벌떡 일어선 자는 다름 아닌 이 부장이었다. 진은 양 미간을 움찔할 뿐이었지만 이 부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내부정보의 대가로 라이벌인 진의 자리를 신문사에서 치워주겠다던 김 의원의 제안을 이 부장은 아무 의심 없이 덥석 물었던 것이다. 그 뜻이 청와대를 의미하는 것인 줄은 추호도 몰랐다.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식은땀이 옆 이마를 타고 주륵, 내려온다.
지이익- 지이익-
이제는 창백함을 넘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이 부장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진의 행동 하나하나를 좇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청와대로 가는 길이 여러 작은 조각들이 되어 힘없이 팔랑거리며 탁자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이 부장과 예상치 못한 광경에 쉽게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장과는 달리 정작 김 의원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하다. 재원의 것 또한 마찬가지다.
진은 그녀 앞에 놓인 큼직한 큐브 모양의 얼음 몇 조각과 양주가 담겨있는 잔을 가볍게 흔든다. 얼음조각이 유리잔을 차갑게 달군다. 진이 히죽 웃는다.
"목줄 단단히 쥐셔야겠어요.
태생을 사냥개로 태어났는데 잠시 어르고 달랜다고 그 본능 어디 갈까요."
"주인이라 착각하고 방심했다간,"
다시 한 번 흔든다.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이번엔 김 의원과 진, 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더욱 차갑게 만든다.
"물려 죽어요."
단숨에 비운 후 탁- 소리를 내며 잔을 탁자 위에 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불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가령 이 부장에게 눈길은 준다든지 말이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뒤를 돌아 문으로 향한다. 김 의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진을 멈추게 만들었다.
"건축을 설계할 때 말입니다.
다들 지반이 중요하다고만 하지만
사실 그 못지않은 게 기둥이지요."
"그래서 생각해봤어요.
기자님에게도 기둥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어떤 기둥일까."
사색에 잠긴 척 두 눈을 오른쪽 밑으로 내리깔더니 이내 무릎을 탁 치며 말을 잇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알겠더라고."
"유 장완 국장이 최 기자 담당 교수였다지?
기자가 된 것도 유 국장 영향이 꽤 컸던 걸로 알고 있는데."
김 의원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을 다신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특히 그 ... 뭐더라.
한... 해영.. 이었던가."
김 의원이 안경 너머로 재원을 바라보며 동의를 구한다.
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원에게 확인을 시켜준다.
"똘망똘망하게 생긴 그 친구 말입니다.
참 예쁘게 생겼어요. 우리 기자님이 그렇게 안 봤는데 미소년 취향이었구나?"
김 의원이 낄낄 웃는다. 반달처럼 휘어진 김 의원의 두 눈꺼풀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진을 사로잡는다. 오싹하리만치 소름돋는 눈이다.
김 의원의 것과 더불어 대화 내내 의원의 눈치를 살피던 이 부장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자신의 사람이 협박 당하고 있는 이 굴욕적인 현장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꾹 감은 채 굳어있는 사장과 달리 재원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숨을 들이쉬면서 고개를 살짝 들고는 이 부장을 내려다본 게 다였다. 그러자 재원의 경멸이 담긴 눈빛을 본 이 부장은 스리슬쩍 웃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숨 막힐 듯한 적막이 다시 찾아오자 김 의원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일격을 날린다.
"기둥이 사라진 부실공사라.
이를 어쩐다."
후훗,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홀짝인다. 진이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지켜본다.
*
사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켜고 해영에게 전화를 건다.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다가간다. 지하 3층에 멈춰 서있는 엘리베이터를 보자 순식간에 짜증이 밀려오면서 한숨이 나온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다급한 손길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열댓 번 눌러본다. 말로만 지켜준 댔지, 그동안 해영의 안전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일이 바빠 해영은 늘 뒷전이었다. 위험한 취재임을 알면서도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걱정 말라며 마냥 웃기만 하던 해영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걸어본다. 평소 곧잘 받던 녀석이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도통 받질 않는다. 또다시 걸어본다. 여전히 불통이다.
그 사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허겁지겁 탑승한다. 닫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른 뒤 해영이 있는 7층 버튼을 연속으로 누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연결음을 듣고 있자니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다. 7층에 도착하자마자 해영의 자리가 있는 부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진을 발견하고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대충 고갯짓을 한다. 이전에 본 적 없는 한껏 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직원들이 수군거리며 고개를 갸웃한다. 드디어 녀석이 있는 부서에 도착했다. 고개를 힘껏 빼내어 녀석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없다.
녀석이 없다.
진의 핸드폰에는 해영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화면이 덩그러니 떠있었고 여전히 무심한 연결음만 계속해서 울릴 뿐이다. 순간 알 수없는 공포감에 휩싸이고 만다.
*
늦은 저녁이 다 되어서도 해영은 전화를 받질 않는다. 퇴근을 하러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두가 퇴근하고 그녀만이 남은 7층 사무실은 어두컴컴할 뿐이다. 진은 자신의 방에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을 않는다.
하루 종일 해영과의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더니 전화를 걸지 않았을 때에도 통화연결음이 머릿속에 이명처럼 남아있다. 당장에 급한 건은 대충 사인을 해서 보냈다지만 여전히 진의 결재를 기다린 채 쌓여있는 서류가 한 무더기였다. 그러나 그것들을 처리할 계획은 현재 없다. 지금은 해영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손에 들린 볼펜을 휘릭, 돌리며 사색에 빠진다.
섣불리 해치진 못했을 것이다. 증거자료의 원본과 사본 모두 진의 손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찰청장과 김 의원의 친목이 두텁다는 것은 암암리에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손가락으로 돌리던 펜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진다. 그녀는 그것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자 진은 얇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후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소지품을 챙기기 시작한다. 우선 집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녀석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볼 생각이었다.
# 진의 집 근처
4차선의 대로에서 방향등를 켠 후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어찌된 일인지 가로등 하나 켜져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치 어두운 골목을 따라 전조등을 켜자 그녀의 집 앞에서 검은 형체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핸들을 꽉 쥔 손에는 땀이 흥건하였다. 하루동안 긴장의 연속이다. 천천히 주행하면서 두 눈을 찌푸려 집 앞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집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있는 해영을 발견한다.
"선배!"
진의 검은색 SUV가 다가오자 그녀의 집 앞 난간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맞이한다. 진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은 해영을 발견하자 동그란 토끼 눈이 되었다. 재빠르게 주차를 한 후 차에서 내려 넓은 보폭으로 해영을 향해 다가간다.
"취재 중에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방금 전에 어떤 사람이 갖다 준 거 있죠? 다행이다 싶었는데 부재중이 너무 많이 와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나 오늘 하루 종일 취재 나갔는데 몰랐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는 해영을 보자 울컥하는 진. 두 눈에 눈물이 그렁인 채로 해영의 팔이며 등을 매섭게 때린다.
예상치 못한 진의 눈물과 그녀의 행동에 놀란 건 해영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해진 눈빛으로 진을 바라본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익숙한 해영의 냄새를 맡자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몸 안을 가득 메우는 듯하다. 마치 온종일 팽팽해졌던 심장이 혈관을 타고 내려온 진정제를 만나자 순식간에 축 늘어진 느낌이다. 진이 쭉 빠짐과 동시에 눈물이 왈콱 터져버렸다.
"김두식 그 새끼가 다 손 쓴거야, 이 멍청아! 으흑. 핸드폰 훔친 것도, 다시 준 것도! 다 그 새끼 그림이라고. 으흑, 흑."
서럽다. 서러운데 짜증나게 행복하다. 손아귀에 힘이 없자 이번엔 들고 있던 가방으로 해영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너는, 어!!!
그럼 따로 연락을 했어야지!!!
얼마나 걱정했는데!!!!"
상황 파악이 끝난 해영은 힘없이 내리치는 진의 두 팔을 잡고 그녀를 힘껏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가둔다.
"선배, 괜찮아요. 저 여기 있잖아요."
진의 등을 수도없이 토닥인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
축 늘어진 진을 대신해 평소 알고 있던 비밀번호를 누른다. 그녀를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닫히자 들고 있던 진의 가방을 툭, 내려놓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그녀를 다시 힘껏 안는다.
해영의 입술이 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물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이 또렷해진다.
아찔한 꿈을 꿨구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진이 힘없이 말한다.
"나 이제 괜찮아. 그만 가."
진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해영은 현재 그의 앞에 놓인 이 상황에 온전히 집중할 뿐이다.
"그만해. 한해영."
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해영이 입술을 뗀다. 한숨을 내뱉는다.
"선배도 나한테 기대고 좀 그래봐요."
반쯤 감겨진 눈을 한 채 해영은 아쉬운 듯 진의 목덜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진의 어깨에 얼굴을 뭍는다. 해영의 목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수 냄새가 일렁이며 진의 코를 간질인다. 마비시킨다.
아, 몽롱하여라. 눈이 감긴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변명을 해댄다.
"내 기사 속엔 온통 선배 얘기로 가득 차요."
남자의 구애 섞인 말은 여자를 기분 좋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해영이어선 안된다. 그를 이런 식으로 잃을 순 없는 법이다.
그녀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영이 속삭이며 내뱉는 숨은 지독히도 진을 괴롭히고 있다. 천천히 진을 옥죄어 온다.
"선배가 무슨 옷을 입었고, 누구와 밥을 먹었는지. 누구와 미팅이 잡혔는지. 그리고..."
"누구와 밤을 지새우는지."
진의 팔을 부여잡은 해영의 손아귀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진은 그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해영을 달래본다. 푸른색 와이셔츠 밑으로 느껴지는 굴곡진 뼈의 모양이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선배는 나의 우상이고,"
해영이 얼굴을 들어 진의 눈을 바라본다.
진의 한없이 당당했던 눈동자는 해영의 앞에서 길을 잃고 만다. 정처 없이 헤매인다.
"나의 첫사랑이에요."
아,
골치다.
그 밤,
그들은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진의 집에서 새어나와 어두운 새벽을 환하게 밝혀주던 불빛도 결국 꺼지고 말았다.
*
한편, 진의 집 앞에 주차되어있는 검은색 세단 안에서 자그마한 불빛이 번쩍인다. 순간적으로 차 안이 밝아지자 좌석에 기댄 채 하얀 담배를 물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얀색 와이셔츠의 윗단추가 풀어져 있었다. 이내 불빛이 꺼지며 남자의 실루엣은 다시 어둠 속에 잠긴다. 잠시 뒤 창문이 내려가더니 하얀 담배연기가 옅은 바람과 함께 흩날린다.
"아끼는 후배라더니."
"순 뻥쟁이구만."
재원이 힘없이 웃는다.
차 안은 진의 담배 냄새와 같은 민트향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전조등이 순간 번쩍이며 세단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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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아아앙 해영이 잘못된 줄 알고 내가 다 눈물날뻔ㅠㅠㅠ
ㅎㅎㅎ첫댓글♡.♡ 미숙한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우핫 잘보고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ㅎ소듕한 댓글♡
김재욱 화난 모습 보고 싶당ㅇ
뒷부분에서 약간? 화내는 모습을 생각해놓긴 했는데 맘에 드실지 모르겠네용ㅎ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1편 재밌어서 다음편 기다렸었는데 ㅎㅎㅎㅎ 이거이거 해영이 남자구만 재원쓰 넘 섹시!!!! 3편은 언제나오나요!! 두근두근
우왕 달밤에 너무 예쁜 댓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부족한 솜씨지만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용ㅎ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와 재밌게 읽어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ㅎㅎㅎ 진이님의 소중한 칭찬 감사한 마음으로 간직할게요!!! 굿밤되세요😙
이렇게 좋은 걸 왜 이제 봤는지 후회 중...! 최고야 최고 너무 재밌어 ㅜㅜ
와....진짜 너무 빨려들듯이 읽었어요 ㅠㅠ 프롤로그부터 이번 편까지 줄어드는 스크롤이 너무 아까웠어요 ㅠㅠㅠㅠ 해영이 캐릭터성이나 진이의 당당한 태도와 말투까지 너무너무너뮤 좋아요 ㅠㅠㅠㅠ 김재욱은 정말 말할것도 없고.... 재욱과 진이의 관계성이 너무 흥미진진합니다~~~!!! 더더더 읽고 싶어요 ㅠ
우아 진짜 좋아요 ㅠㅠ 밑쪽에 해영이 분위기랑 김재욱 분위기 미쳐
ㅠㅠ다음이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