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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
1. 기도의 이유(1-4)
본문은 기도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단순히 기도라고 말하지 않고 간구, 기도, 도고, 감사로 언급하는 것은, 기도의 종류, 곧 성도가 해야 할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는 모든 기도를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기준으로 해서, 성도의 기도를 ‘이것은 간구, 이것은 기도, 이것은 도고, 이것은 감사’라는 식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에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의 내용과 본문이 계속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왜 갑자기 기도에 대해 얘기하는지, 그리고 1절 이후의 내용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앞에서 바울이 언급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진리에 굳게 세우기 위해 디모데를 남겨 놓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 자들로 인해, 교회가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변론만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의 믿음을 내어 놓으면서,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기 믿음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되려고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베소교회가 다른 교훈에 미혹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진리에서는 사랑이 맺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아닌 변론과 다툼이 맺어졌다면, 그것은 진리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훈으로부터 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말하고 진리를 말하나, 그것이 교회를 분쟁과 변론으로,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게 하는 것으로 끌어가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와 다른 교훈은 맺어지는 것이 극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가령 교회가 ‘믿음은 교회의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이 듣는 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언급하긴 하나, 바라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기에, 진리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은 오히려 교회 일에 봉사하는 자와 봉사하지 않는 자의, 차별과 구별만 있게 할 것이고, 결국 분쟁과 변론을 맺을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친다면, 이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기도와 경쟁하고 다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른 교훈의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다른 교훈으로 인해 에베소교회가 분쟁과 변론을 일삼는 헛된 말에 빠져, 서로가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만 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예전에 예수님에 대해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언급하며, 오래 참으신 긍휼 때문에 복음을 알게 되었음을 말함으로써, 성도의 관계에서 선생이란 있을 수 없음을 당부합니다.
곧 선생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전혀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 대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의 긍휼을 알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희도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변론이나 다툼이나 분쟁을 만들어 내는 기도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기도 역시 믿음에서 나옴으로써, 사랑이 맺어지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헛된 말에 빠진 기도는, 변론과 다툼 밖에 맺어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진리에 머물지 아니하면, 믿음의 모습으로 여기는 기도도, 변론과 다툼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예배시간에 대표로 기도하면서, 나를 욕하고 비판한 사람을 마음에 두고, ‘성도가 서로 욕하고 비판한 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를 욕한 사람에게, ‘너 죄지었다’고 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됨을 비방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2절의 말씀도 이런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 내용을 보면 마치 신앙생활의 평안과 좋은 환경을 위해서,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당시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도를 박해했던 권력자들입니다.
만약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기독교를 박해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독교를 박해하는 대통령을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대통령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나님을 믿게 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대통령을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그 이유는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나를 박해하는 자조차도, 원망과 미움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원망과 판단과 미움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 성도로서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박해자에 대해서 ‘하나님, 저 못된 임금을 빨리 심판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마음에 원망과 미움을 담고 있는 것이고, 기도라는 신앙행위를 이용하여, 내 속의 미움과 원망을 담아내는, 곧 화풀이 하는 것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움과 원망을 담고 있는 성도가, 고요와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삼가야 할 기도가 뭔가 하면, 소위 ‘국가와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대통령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은 대통령이 성도 되었다는 것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대통령이 성도가 되면, 마치 기독교가 국가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헛된 말에 빠져 변론만 만들어 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온 세상을 복음화 시키라는 사명을 맡기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온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많은 교회가 ‘하나님, 우리 교회가 세상에서 구제에 제일가는 교회, 선교에 제일가는 교회가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은 철저히 외면한 채, 인간의 욕망만 한껏 담아내는 기도 아닌 기도일 뿐입니다.
3-4절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의미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이 말하는 임금과 높은 사람은 당시 성도들에게는 박해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은 성도를 박해하는 사람이든 누구든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구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자든 누구든,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성도가 기도할 때 나를 박해한 사람, 나를 욕한 사람, 나를 비판한 사람, 이런 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고 담아내는 기도만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진리에 굳게 서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과는 상관없는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성도가 신앙의 행위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고 분별하고 싸우는 도구로 이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으로 싸우고, 성경 읽는 것으로 다투고, 헌금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경쟁하고, 복음의 지식으로 변론하고 판단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기도든, 설교든, 봉사든, 헌금이든 모든 것들은, 서로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이 되는 것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곧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으로 맺어져야 할 신앙의 행위들이, 다툼과 경쟁과 변론만 만들어 내기에, 바울이 이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의 이유는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기도에 담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이지, 결코 내 것을 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잊게 되면 결국 여러분의 기도는 사랑이 아니라, 욕망과 다툼과 변론이 맺게 될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 욕하는 자, 비판하는 자,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의 영혼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여러분에게 고요하고 평안한 삶이 있게 할 것입니다.
2.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5-7)
교회는 여러 사람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이기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같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고, 잘 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부끄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라는 것은 인간적 관계에서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본질을 가진 존재로서, 같은 관계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몸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부터 같은 은혜, 같은 생명을 받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를 차별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가 네가 받은 것보다 더 크다’는 싸움을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는 다툼이며 경쟁이고 자랑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는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아야 할 만큼,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할 만큼, 나라는 존재가 더 낫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지난 시간에 여기서 말씀한 ‘모든 사람’이란, 세상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든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하나님이 부르시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십니다. 곧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같은 은혜와 같은 사랑 아래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와 사랑이, 오늘 여러분이 받은 은혜와 사랑보다, 더 나은 것도 더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똑같은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교회라는 관계에서는 어떤 차별도, 구별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차별되고 구별되어야 할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사망에 처한 처지이고, 똑같은 은혜와 사랑으로 사망에서 건짐 받았고, 똑같은 생명에 거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된 관계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서로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마치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에, 결국 서로 각자가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어 놓음으로서, 다툼과 변론, 그리고 경쟁과 자랑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을 한분이 아닌, 여럿으로 잘못알고 있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아닌, 다른 중보자도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고,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 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한분이시고, 중보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합니다. 곧 귀신조차도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 중보도 한분이시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에베소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다른 교훈과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 것으로 인한 변론과 다툼이며, 서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같은 진리를 믿는 성도의 관계가 증거 되지 못했으며, 교회의 교회됨 역시 훼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에베소교회의 문제로 인해,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을 한다면, 이는 에베소교회에 있었던 문제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말을 하는 것은, 교회란 한 분 하나님 아래 모이는 관계임을 당부하기 위함입니다. 한 분 하나님 아래 있는 관계이기에, 분쟁과 다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럿인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다른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사랑과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교회이기에, 서로를 차별하고 구별하면서, 다투고 분쟁하고, 서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4절에서처럼 6절에서도 ‘모든 사람’을 언급합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것은,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죄의 값인 사망에서 구출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 값으로, 곧 대속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으로 인해서, 사망에서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함께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한 분 중보자의 은혜 아래 모인다면,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관계에서 모이는 것이고, 모두가 같은 은혜로 생명을 받은 자들이기에, 자랑하고 내어 놓을만한 가치 있는 자신의 것이 별개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가치 있는 것을 내어 놓는다면, 그것은 죄인인 자신을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으로 옮긴 예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내어 놓는 것이 동일하기에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두고 형제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다툼과 변론과 경쟁과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오셔야 하며, 중보자 역시 한분이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죄로서 이미 단절된 관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끊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사람’은 세상 전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사람은 동일한 본질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재주가 있고 힘이 있고, 남보다 뛰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사망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자리에서 본다면, 잘났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죄 값으로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단절된 관계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앞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차별할 수도 구별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누군가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본다면, 그것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도는 다른 신앙을 보며 한심하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내가 곧 한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구든 내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도대체 내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일이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발생하는 다툼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에 상대방의 일을 트집 잡게 되고, 상대방은 또한 자신을 양보하지 않기에 다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하고, 나 또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로 살아가야 함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항상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아야 할 형편없는 존재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는 고질적인 악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으면 되는데, 우린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 앞에 서 있어야 할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항상 눈에 보이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교회됨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과 진리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진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차별이 있다는 것은 믿음과 진리 안에서 모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과 진리 안에 삽니까? 한분 하나님, 한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것이 교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은혜는 모두에게 동일함을 잊지 마십시오.
3. 분노와 다툼이 없이(8-15)
6절에서 말씀한 대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사람은 세상사람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분과 형편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입니다. 곧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진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진리 안에 있는 성도라면, 사람을 차별하거나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믿음과 진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진리에 대해 모든 인간은 폭행자요 박해자요 비방자일 뿐인데,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옳은 자의 자리에 세워둘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불의함과 못남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진리를 알게 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과 진리의 내용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로 인해서, 하늘의 복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깊이 감사한다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서든, 곧 나를 박해하고 힘들게 하고, 원수 된 자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믿음과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저 사람이 어떻다’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 갈 사람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가 지옥 간다는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 대해 ‘너 같은 자가 구원 받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으로 대한다면, 결국 ‘모든 사람’이라는 범위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성도에게서, 타인에 대해 이와 같은 자신의 분노와 다툼으로 인해, 그의 구원에 대한 것까지, 나 스스로 판단해 버리는 실수가 종종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8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김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를 증거 하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성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어떠함을 나타낼 뿐이지, 자신의 이름이 증거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할 사람이 성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까지 입니다. 그 이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의 역할을 뛰어 넘게 될 때,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분노하게 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분명 옳다고 여기는 결과를 위해 힘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과 진리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지, 복음을 아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소위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실수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는,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자기의 기준과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교회를 기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무너질 때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기도는 인간의 모든 노력과 행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성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역할에만, 충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앞서 말한 대로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자일 뿐,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다면, 분노와 다툼은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뜻은 9절 이후의 내용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바울은 단순히 사치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분노와 다툼이 무엇으로 일어나는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옷과 장식품들이 자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경쟁도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옷과 장식품들이 타인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기고 싶어 하는 인간 습성에 의해, 분노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옷과 장식품 등으로 경쟁하는 것이 곧 다툼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정하게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값진 옷과 장식품으로 자신을 보이려고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만 하라고 말합니다. 선행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보이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부름 받은 것은, 남자든 여자든 이 역할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남자는 남자의 자리에서, 여자는 여자의 자리에서 이 역할에 충실 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11-14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이 내용들은 여자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여자보다 남자를 더 높이시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나은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역할입니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자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자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럼 바울은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여자가 조용히 배워야 하고, 남자를 주관할 수 없는 이유로, 아담이 먼저 지음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고, 죄도 먼저 지었으니까 꼼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자에게 자신의 본질을 잊지 말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곧 남자에게 순종하라, 가르치지 말라는 차원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 자신의 본질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자가, 곧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연약한 자신이 남을 가르치고, 주관할 힘도 자격도 없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역할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불려 나온 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분노와 다툼이 없이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성도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고 살아간다면, 곧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의 역할과 본분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해산을 통하여서도 자신의 죄인 됨을 생각하게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다툼과 경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믿음의 장래를 염려하면서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를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이 되기에,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로서,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족하며, 죄인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영생을 누리게 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나로 인해 증거되기를 소원하며 살아간다면, 분노와 다툼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결국 분노와 다툼, 또한 경쟁과 분쟁, 이러한 모든 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성도 된 자가 성도로서의 본분과 역할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성도로서의 위치와 역할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같은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로 살아가게 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성도의 자리에서 성도로서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