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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 삼일절
信天함석헌
삼일절이 죽었다!
삼일절이 죽었다!
삼일절이 죽었단 말이야!!!
이 강산에 사는 사내들아 계집들아, 삼일절은 이제 죽었다.
삼월 초하루가 돼도 만세 소리 하나 나지 않으니 죽은 것 아니냐? 어느 입 하나고 기념이건 축하고 말 한마디도 없으니 죽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느냐?
파고다야, 씨알의 밀물에 대해 문을 닫고 쇠를 잠그고, 네가 뭐 하자고 서울 복판에 무덤처럼 누웠느냐? 거기 두더지를 기르잔 말이냐, 박쥐를 붙여두잔 말이냐?
북악산아, 네가 뭐 하자고 육백만 심장 위에 망부석처럼 우두컨 섰느냐? 그래 옛 귀신의 울음을 듣고 있느냐? 햇귀신의 울음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냐?
어찌 이럴 법이 있느냐?
그때에 그 휘날리는 깃발에,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도 빛을 잃었고, 그 외치는 만세소리에 삼천리강산이 들석들석 했다.
아니다 삼천리만이냐? 곤륜산발에 죽었다던 멧돼지도 귀를 숭깃 일으켜 세웠고, 캔지스 강가에 잠이 들었던 부처도 고개를 돌이켜 눈을 떠 보았다.
그런데 그 삼월 초하루가 어찌 이렇게 적막하냐?
천지가 변했느냐?
역사가 끊어졌느냐?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 썩었느냐?
혹 네가 변명하려느냐? 정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지 않았느냐고?
모르는 말이다.
기념의 염(念)은 금심(今心), 곧 이젯 마음이다. 정신을 현재에 살리는 것이 기념이다. 그런데 정부란 하나의 기관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이 살아 있는 때까지는 기관이 기관 노릇을 할 수 있으나 그 기관이 너무 크고 굳어져 심장을 누를 때 그 생명은 죽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기념은 씨알만이 할 수 있다. 씨알이 직접 하여야 기념이 될 수 있다. 정신이 자란단 말이다. 국민이 각각 제 분에 따라 세 심정대로 스스로 정성껏 기념할 때 정부가 의례적으로 하는 기념은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 국민은 벙어리, 전신마비로 누워 있고 정부만이 한다면 그것은 마치 골통이나 심장에 타격을 받아 거꾸러진 신체가 몸부림을 하는 것 같아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의 기계적인 운동일 뿐이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돌려라!” 정치는 카이사의 것이지만 자유와 정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씨알만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하늘 법을 따라 겸손할 때 씨알을 보호하는 선한 정치를 할 수 있으나, 독단적으로 모든 것을 하려 할 때 나라를 그르치게 한다.
나라를 살리는 것은 제도나 기관만이 아니라 산 씨알이요, 씨알을 살리는 것은 그 먹는 밥이나 입는 옷이 아니라 물질이 변해 생명이 되게 하는 그 혼에 있다.
기념을 하는 것은 혼을 불러일으키잔 것이요, 혼을 부르는 것은 혼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맨 씨알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또 그러면 너는 스스로 위로하기를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마음으로 하면 그만 아니냐 하느냐?
그것도 모르는 말이다. 씨 속에는 하나의 숲이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뿐이지 실지 나무가 아니다. 제 껍질을 터치지 못하는 씨알은 죽은 씨알이다.
정신은 물질 이상이지만 물질의 구속을 터쳐서만 정신이다. 정신이 정말 살아 작용하는 정신이면 반드시 그 구속을 터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감옥 안에서 그것을 깨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 자는 결국 비겁한 자다. 비겁은 결국 정신의 자살이다. 아니다. 자살보다 더 심한 죄악인 타락이다. 짐승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자기를 나타내지 못하는 씨알은 죽은 씨알이다.
자기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부름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요, 하늘의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것은 카이사의 것을 카이사게로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카이사의 것을 카이사게 돌리는 것이냐? 제도를 제도로 알고 내 혼을 거기 의탁하지 않는 일이다. 혼은 하나님, 곧 전체의 것이다. 돈을 돈으로 아는 사람은 그것을 필요하게 쓰지만 절은 하지 않는다. 돈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은 돈을 우상으로 섬김이요, 우상 섬김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나를 위해 도둑질함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르치지 않은 민족 없다. 우상을 숭배하고, 즉 돈과 권력을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고 잘못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던가? 있거든 말해보아라.
맘으로만 기념하는 것은 이불 안에서 활개 치는 일이다. 햇빛과 바람 받지 못한 씨가 어찌 싹이 틀 수 있겠나? 싹이 못트고 어찌 나무가 될 수 있겠나? 나무가 못되고 어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속에 무한의 가능성을 품은 씨를 맺는 나무만이 산 나무요, 자유 하는 개인을 낳는 정치만이 참 정치다.
그러므로 맘으로만 기념한다는 국민은 거짓하는 국민이요 죽은 국민이다.
기쁘거든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슬프거든 통곡하고 발을 굴러라, 그것 못하는 것은 씨알 아니다.
말하는 것이 영이다.
살은 땅속에 들어가 썩어도 피는 부르짖고 땅 위로 피어 올라온다. 피어나기 때문에 피라고 한다.
아, 일찍이 너를 짐승 자리에서 불러내어 사람이 되게 했던 그 정신을 한층 더 키워낼 날이 왔는데 그 거룩한 특권을 뺏기고 스스로 내 혼을 보호하기 위한 네 몸을 감옥으로 삼고 스스로 거짓 위로를 하려는 너를 어찌 씨알이라 할 수 있느냐?
삼일절은 죽었다!
이 나라의 사내들아 계집들아, 죽은 삼일절을 놓고 너희는 어찌려느냐, 여전히 먹고 마시려느냐? 정신은 속에 갇혀 쪽쪽 울게 두고 “복지 국가”만을 부르는 것이 초상집에 가 떡과 술에 배를 불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아무리 배가 고프단들 사람들이 그를 더럽게 보지 않겠느냐?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유럽 천지에서 새 삶의 운동에 앞장을 섰던 마르틴 루터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가장 큰 순교자”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 식으로 말한다면 삼일절은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가장 비참한 순교자라 해야 할 것이다.
주기도문을 왜 순교자라고 했나? 뜻을 살리지 않고 입으로만 형식적으로 외우기 때문 아니냐? 왜 가장 큰 순교자라고 했겠냐? 그것이 가장 귀한 진리면서 가장 업신여김을 받았기 때문 아니겠나?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 나라 있은 이래 삼일운동에서 더 큰,더 거룩한 일이 무엇이 있겠나? 그러기 때문에 역사가 한번 새로워지려 할 때, 온 겨레의 뜻이 자연히 나타나 그 날을 가장 큰 국경일로 제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람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것을 말하고 드러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렇게 고맙게 자랑으로 알고 기쁘고 엄숙한 마음으로 부르던 노래, 흔들던 깃발이 모든 학교들 뜰과 모든 교회와 모든 강당과 모든 공장과 모든 사회단체에서 싹 끊어지고 다만 있는 것은 정부에서 의례적으로 지낸 기념식 하나뿐이었다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슬프고 가장 분한 죽음이 아닌가?
순교가 죽는 그 자신에게는 영광이요 하늘의 은혜요 상급이겠지만, 그 죽음을 내는 그 나라에는 부끄럼이요 죄요 슬픔이요 벌 아니겠는가? 루터가 교회가 잘했다 해서 그 말을 한 것 아니라 분해서 책망하는 말로 한 것이었듯이 우리게도 이것은 확실히 변명할 수없는 잘못이요, 도망할 수 없는 벌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내 눈이 어찌 천이요 만이어서, 모든 곳 모든 사람을 만나보고 하는 말이냐? 신문이 내 눈이요 라디오가 내 귀다. 신문 라디오에 감격하여 터져 올라간 만세 소리와 깃발 날림이 하나도 있었단 말이 없지 않으냐?
만일 있었는데 그 기쁜 소식을 보도해 주지 않았다면 그 매스컴들은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정신을 찬양하지 않는 놈은 정신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놈이요, 정신을 업신여기고 미워하는 놈은 정신의 대적이다. 나라란 뭐냐? 정신의 표현이요 정신을 기르잔 것이다. 정신에 방해되는 것을 어찌 그냥 하는 대로 둘 수 있느냐?
아, 나는 이 위대한 순교자를 따라 죽으련다.
나는 밝히 말한다. 3·1절은 순교했다!
삼일정신이 이 강산에서 사라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 부끄럽고 분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청천백일하에서,
씨알들아, 너와 나는 다 죄인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대답은 2천 년 전에 역사 있은 이래의 가장 큰 순교자를 내고 두려워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무리를 보고 베드로가 대답했던 것같이 간단하고 분명하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어떻게 회개하느냐?
삼일정신을 죽인 것은 ‘나’ 자신이다 하고 그 죽음을 내 등에 지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니 그 복음이란 무엇이냐?
죽은 것은 살 수 있다. 살아나기 위해 죽었다 하고 믿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는 세계를 살리려고 죽었지만 그 예수를 살린 것은 믿는 자의 믿음이었다.
십자가와 부활에는 증인이 필요했다.
씨알은 생명의 증인이다.
삼일운동은 우리를 살렸지만 우리는 삼일운동을 살려야 한다.
살아나기 위해 죽었다고 믿음이 정신 살려냄이요, 정신 살려냄으로 내가 산다.
없는 가운데서 창조해 내는 것이 생명이요, 죽은 것을 살려내는 것이 정신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전적으로 믿었고,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를 이미 속에 산 채로 모셨고, 속에 모셨기 때문에 그의 다시 살아난 것을 가장 먼저 증거할 수 있었다.
삼일정신을 진리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우리 속에 모실 수 있고 삼일정신을 우리 속에 믿는다면 그것이 보다 높은 새 정신, 새 운동으로 우리 몸을 터치고 나올 것이다.
육신의 예수가 세상 권력에 잡혀 죽은 것이 보다 높은 생명으로 살아나기 바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었듯이, 삼일절이 죽은 것도 그것을 죽이는 자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낡은 제도로 하여금 스스로 심판을 받게 하고 그 속에서 보다 순수하고 강한 정신이 자라 나오도록 하려는 역사의 뜻이 있어 된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되풀이 마라!
믿음이 창조한다!
그럼 총을 들고 생긴 믿음으로도 그만하거든 총 듦이 없이 믿는 믿음으로는 얼마나 더 잘 더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까?
마리아처럼 시체를 버리지 말고 울어라! 내 주를 돌려달라고 통곡을 해라. 그러면 눈물 속에 서서 네 이름을 불러 네 혼을 깨워주는 산 정신을 볼 것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 믿는 것은 옅은 믿음이다. 깊은 믿음은 이미 부활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고 믿는다.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뵈는 것만을 보고 뵈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눈이다.
그러나 정말 눈 곧 영원을 보는 눈은 뵈지 않는 것을 본다.
삼일절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조그만 사실이다. 그보다 더 큰 사실 곧 진실은 죽으면서도 죽지 않는 삼일정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래 죽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그것을 믿는 것이 생명이다.
믿음은 하늘 곧 영원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종자의 알갱이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었지만 햇빛과 바람을 받지 못하면 싹이 틀 수 없듯이 씨도 하늘에서 오는 영을 받지 않고는 새 생명의 싹을 티우지 못한다.
그러나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있다. 물질적 생명의 씨알에게는 하늘이 밖에 있지만 정신의 씨에게는 하늘이 밖에 있지 않고 제 속에 있다. 그것은 안밖이 없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을 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식물의 종자는 반드시 밖에서 빛이 들어오고 공기가 들어와야 아구를 틀 수 있지만 사람의 혼은 스스로 믿음으로 깰 수가 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체를 위해 울었을 때 그 눈에 어리는 눈물은 제 속에 꼈던 때를 씻고 속에 빛으로 하여금 육신을 꿰뚫고 제 속에 영원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새 차원의 세계가 열렸다.
우리가 삼일절의 죽음을 통곡하잔 것은 이 때문이다.
통곡은 나에 대해 절망함이요 동시에 내 속에 무한을 믿음이다.
정치는 눈물이 없다. 그들에게는 영원이 없고 무한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잠깐 있다가 변하는 나만이 있다. 그것은 차디찬 잔혹한 철칙이다. 그러므로 슬픔도 없고 동정도 없고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씨알에게는 눈물이 있다. 제 눈물로 제 혼의 싹을 틔운다.
생명은 사랑이다. 저만 살 뿐 아니라 남을 살린다. 물질적인 저만 살 생명 없는 무기체를 변해 유기체가 되게 한다. 정신적 생명은 더욱 그렇다. 나 자신이 정신일 뿐 아니라 물질계를 변해 정신계가 되게 한다. 창조 이래 만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 뜻이다.
그 말부터가 벌써 얼마나 장엄하고 영광 적인가?
그것은 정치에서는 모르는 차원의 세계다.
씨알은 그것을 안다. 씨알만이, 즉 제도의 종이 되지 않은 인간만이 그것을 안다.
그러나 씨알은 하늘 곧 전체의 씨알이기 때문에 독점, 독재하지 않는다.
예수의 말에 주의할 것은 자기를 진리의 임금이라 하면서도 “너희가 나와 한 가지 임금 노릇 하리라” 한 말이다.
이 세상나라는 독점, 독재가 그 극치지만 정신의 나라는 영원, 무한의 나라기 때문에 모두가 같이하는 나라지 누구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속에 알갱이로 품고 사는 씨알은 세포가 바위를 녹여 푸르고 향기 나는 생명으로 만들듯이 자기를 구속하고 압박하던 정치까지를 그 속에 흡수하여 정신으로 승화 시켜버린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무생물을 섭취함이 없이는 제가 생물이 될 수 없고, 압박자를 사랑함이 아니고는 제가 선한 영이 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네 원수를 사랑해라 하는 것이다. 원수가 아니고는 나를 사랑하는 영으로 만들 자가 없다.
아마 이래서 가라지를 당장에 뽑겠다는 제자들을 예수가 말려서 못하게 한 것이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해하고 만다.
정치는 나를 괴롭히지만 미워할 것이 아니고 사랑함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3·1정신은 우주 생명의 한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정치로 죽이지 못한다.
그것은 정치보다는 높은 차원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힘으로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정치보다는 깊고 넓다.
깊기 때문에 운다.
넓기 때문에 용서한다.
삼일절을 통곡해라!
울어 울어 네 목이 잠기게 될 때 네 가슴에서는 무한의 물결이 늠살 거릴 것이다.
씨알의소리 1973년 3월 20호
저작집30; 5-37
전집20; 1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