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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순종과 축복의 상관관계. 従順と祝福の相関関係。
본문 히브리서 3:15~19
히 3:15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16 듣고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17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짓고, 시체가 되어서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18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19 결국, 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15. それについては、次のように言われています。「今日、あなたたちが神の声を聞くなら、/神に反抗したときのように、/心をかたくなにしてはならない。」 16. いったいだれが、神の声を聞いたのに、反抗したのか。モーセを指導者としてエジプトを出たすべての者ではなかったか。17. いったいだれに対して、神は四十年間憤られたのか。罪を犯して、死骸を荒れ野にさらした者に対してではなかったか。18. いったいだれに対して、御自分の安息にあずからせはしないと、誓われたのか。従わなかった者に対してではなかったか。19. このようにして、彼らが安息にあずか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は、不信仰のせいであったことがわたしたちに分かるのです。
지난 주일에는 하루에 하루만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성도가 서로 격려하고 독려함으로 서로의 믿음을 지키는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시고 맡겨 주신 복음의 공동체는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지체들이 참된 평강과 축복을 누일 수 있게 하는 영적이고 안전한 처소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각자에게 맺어 주신 영적인 인연을 통해 참된 평강과 능력을 체험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에서는 다시 시편 95편의 8절에 기록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때때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마음이 완고함, 혹은 완악함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한 사람들, 그리고 결국 안식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묻고 대답합니다.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곧 이스라엘의 조상들이며, 주님께서 노예의 삶에서 구원하신 자들, 곧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 불순종하는 이들이 있다는 뜻이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 조상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실족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든든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데요.
든든한 신앙생활의 토대가 놓인 이들에게 튼튼한 축복과 풍성한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믿음과 내면의 상태가 연약하고, 그 그릇의 용량이 충분하지 않으면 주님이 아무리 많이 부어 주시고, 내려 주시더라도 다 채우지 못하고, 또한 감당할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100가지의 축복을 주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시려고 하는데, 내가 준비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30개만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우리가 누리는 것은 100이 아닌, 30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런 내용의 경험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경험담인데요. 그의 제자 중에 젊어서 아내와 자식을 두고 죽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와 그 가난한 것에 대해 하소연을 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 (왕하 4:2a)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지요.
...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왕하 4:2b)
엘리사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왕하 4:3-4)
그들이 그렇게 모든 빌린 그릇에 여인이 기름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그릇에 기름을 다 채우자 기름이 멈추었습니다.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왕하 4:6)
그들의 준비하고 마련해 놓은 그릇에 채울 만큼의 기름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실제로 있었던 기적이지만, 이 기적을 통해 성경은 우리에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준비한 순종의 그릇만큼 기름은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리 많은 축복을 내리시기로 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순종의 빈 그릇을 마련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다는 역사의 증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나를 괴롭히려고 하거나, 혹은 나의 행동을 억압하거나 제어하려고, 혹은 자유를 빼앗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기독교라는 종교에 묶어 두고 다른 어떤 생활도 못하도록 규제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요. 오히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함으로 진리를 믿고 영생하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진리로 인해 자유할 뿐만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은 튼튼하고도 안정감이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마 7:24-25)
그렇습니다. 순종은 우리에게 절대 아무도 흔들거나, 망가뜨리지 못하는 튼튼한 영생의 집을 짓는 토대를 놓는 것입니다. 반석을 놓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놓인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데요. 비록 음부의 권세가 위협할 지라도 교회가 튼튼한 이유는 반석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물론 마 7장의 반석과 16장의 반석은 다른 문맥 안에서 쓰여진 표현이기는 한데요. 말씀을 순종함으로 놓이는 반석이나, 베드로의 고백으로 놓여진 반석이나… 모두 무너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의미에서는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믿는 믿음의 고백으로 놓이는 반석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놓이는 반석이 결국 모든 축복과 풍성함을 받고 누리는 거대한 그릇이 된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 6:16)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은 주님이 채우실 축복과 풍성함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서 애 쓰고 수고하기에 마지막까지 몸부림을 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종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순종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이 곧 예수님이신 복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가르침이신 것이지요.
그리고 앞서 인용하였던 마태복음 7장 24절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하셨듯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또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쳐 주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능력이 있는 순종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실천하기를 소망합니다.
매일 하루의 첫 시간을 경건한 행실로 일상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서 주시는 감동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에 순종하며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지요.
하루의 첫 시간에 읽거나, 선포하여 고백하거나, 묵상한 말씀에 순종하려면 주님께서 모든 순간에 임재하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시선이 늘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곧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 일상의 많은 곳에 감시카메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여길만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요. 어떤 이들은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찾아서 자신의 못된 행실을 기어코 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요. 이런 감시의 눈초리는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거나, 또는 불안하게 해서 행동을 제어하게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어린아이의 행동과 움직임을 주목하는 것은 어떤가요? 어떤 위험한 것이나, 혹은 좋지 않는 상황을 예방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존재를 의식하며 그 시선 안에서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뜻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행실은 주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동행하신다는 전제에서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고, 함께 동행하시니 나에게 시선을 두시고 주목하실 수 있는 것이지요.
앞서 말한 감시카메라는 동행하지 않고도 행동을 감시할 수 있는 장치라고 한다면,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시선은 그와 동행할 때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시선을 체감하며 그 분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곧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지켜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실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교리의 억압이나, 강요, 혹은 율법 조문의 준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엘리트가 되기 위해 실력을 쌓는 과정도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교리와 규정이라는 틀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순종케 하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풍성하여 차고 넘치는 축복과 은혜를 감당할 그릇을 채우시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하신 것도, 그 복음을 믿게 하시는 것도, 또한 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시선의 의식하며 체감하게 하시는 것도… 모두 나를 나답게, 사람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사랑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놀라운 사랑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고 믿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사로운 불편함의 순종을 축복의 통로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누리는 축복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으면 순종도 요청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을 통해서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채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순종,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은 세속적인 입장에서 보면 다소 불편해 보입니다. 때로는 타인과의 이해관계에서 손해를 입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이생에서 복을 받고, 영생에서도 끝없이 채우시는 풍성함으로 살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순종은 곧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생활의 삶입니다. 오직 주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로 맺어진 주님의 자녀들만이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동행하며 순종함으로 차고 넘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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