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릿 말
남이장군은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 평정과 북방 여진족 정벌 시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워,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26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까지 올랐다가,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훈구세력(勳舊勢力)들이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서 몰아내고, 이어서 유자광을 앞세워 역모로 몰아 무고(誣告)하므로서, 불세출(不世出)의 명장 남이장군은 아깝게도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나 <民心은 天心>이라 하였던가?
장군이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자, 世人들은 얼마나 장군을 흠모(欽慕)하고 애석(哀惜)해 하였든지, 장군의 행적과 이와 관련한 수많은 일화(逸話)들이 전승되어,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수월찮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1964년도에 영화까지도 나왔고, 장군이 돌아가신 서울 용산 지역 일대에서는 매년 10월 초 남이장군 제(祭)를 지내오다가, 이제는 서울시 대표 민속 축제로 큰 행사를 치르고 있다.
실로 장군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오늘날까지도 “슈퍼맨”이 되어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정조대에 예문관제학을 지낸 정범조의 ‘南怡將軍傳’등의 전기들이 단편적으로 나오게 되면서, 조정은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광범위한 복관작(復官爵)여론을 형성하기에 이르자, 드디어 1818년(순조18) 모든 관작이 복원되었고, 조선왕조 말기에는 무인(武人)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충무공(忠武公)” 시호까지 받게 되었다.
실로 35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 끝에 역사 속에 재등장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진정한 역사의 복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전기(傳記)들이 야사(野史)들을 바탕으로 극히 짧은 분량이어서, 이시애의 난 평정과 여진족 정벌 등에서의 행적을 다 밝혀주지 못했고, 장군의 생년과 계보 등 잘못 전해지는 부분들이 많아, 때로는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실록, 야사, 족보 간 서로 혼돈을 가져오는 부분들도 많다.
본서를 펴내게 된 주요한 동기(動機)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는데, 1995년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해역 한 CD-ROM이 나오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 들을 발견하고는, 야사(野史)와 족보(族譜) 등에서 전해지는 얘기들을 총 종합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하면서도, 그동안 출간을 망설이면서 밀쳐 놓았던 2003년도 원고를 다시 손질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한글세대로 한문에 박식하지도 못할뿐더러, 남이 다 우러러보는 장군의 발자취를 밝혀나가는데,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을 이해 해 주시길 바라며, 이를 계기로 앞으로 더 좋은 책의 출간과 나아가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기여되었으면 한다. (2020.4.15. 편저자 남인우,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