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司馬遷(사마천)의 史記 世家篇(사기 세가편) 30 家門 가운데 第一 가문으로 吳氏에 대한 기록이다. BㆍC 1211년부터 BㆍC 473년까지 25세 738년 동안의 양자강 남쪽 현재 상해ㆍ소주ㆍ항주 등지에 걸쳐 있었던 吳나라 王國에 대하여 기록한 원문이다. 우리 吳氏는 東洋의 大姓으로 태어난 긍지를 가지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번역이 완벽하지 못할 것이니, 원문을 참조하여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譯者: 吳秦均 오진균(우리집안 始祖(瞻 첨) 50世. 同福派 27世孫ㆍ禁衛將公后 全北 益山)
司馬遷 著 世家
史記券三十一
世家第一 吳泰伯
吳泰伯, 泰伯弟仲雍, 皆周太王之子, 而王季歷之兄也. 季歷賢, 而有聖子昌, 太王欲立季歷以及昌, 於是泰伯ㆍ仲雍二人乃奔荊蠻, 文身斷髮, 示不可用, 以避季歷. 季歷果立, 是爲王季, 而昌爲文王. 泰伯之奔荊蠻, 自號句吳. 荊蠻義之, 從而歸之千餘家, 立爲吳泰伯.
泰伯卒, 無子, 弟仲雍立, 是爲吳仲雍. 仲雍卒, 子季簡立. 季簡卒, 子叔達立. 叔達卒, 子周章立. 是時周武王克殷, 求泰伯ㆍ仲雍之後, 得周章. 周章已君吳, 因而封之. 乃封周章弟虞仲於周之北故夏 사마천 지음 집안 내력
사기 권 31
세가 제1 오태백
오태백과 태백의 아우인 중옹은 모두 주나라 태왕의 아들이고, 계력왕의 형님들이다.
계력은 어진 사람으로 왕위에 오를 昌(창)이 있었는데 주태왕이 계력으로부터 昌을 세우려고 하자, 그로 인하여 태백과 중옹 2 사람은 이윽고 형만으로 달아나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잘라 쓸모없게 보임으로써 계력을 피하였다. 계력이 결국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계왕이고 창은 문왕이 되었다. 태백이 형만으로 달아나 스스로 구오(句吳)라 부르게 하니, 형만에서는 옳게 여겨 1,000여 집을 다스리게 하고 옹립하여 오태백(吳泰伯)으로 불렀다.
태백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아우 중옹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오중옹이다. 중옹이 죽자 아들 계간이 왕위에 올랐고, 계간이 죽으니 아들 숙달이 왕위에 올랐으며, 숙달이 죽자 아들 주장이 올랐다. 그때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태백ㆍ중옹의 후예를 구하다가 주장을 만났는데, 주장이 이미 오나라의 임금이 되어 있어 그대로 봉했다. 마침내 주장의 아우인 우중을 주나라의 북쪽 옛날 하허의 왕虛, 是爲虞仲, 列爲諸侯.
周章卒, 子熊遂立. 熊遂卒, 子柯相立. 柯相卒, 子彊鳩夷立. 彊鳩夷卒, 子餘橋疑吾立. 餘橋疑吾卒, 子柯盧立. 柯盧卒, 子周繇立. 周繇卒, 子屈羽立. 屈羽卒, 子夷吾立. 夷吾卒, 子禽處立. 禽處卒, 子轉立. 轉卒, 子頗高立. 頗高卒, 子句卑立. 是時晉獻公滅周北虞公, 以開晉伐虢也. 句卑卒, 子去齊立. 去齊卒, 子壽夢立. 壽夢立而吳始益大, 稱王.
自泰伯作吳, 五世而武王克殷, 封其後爲二: 其一虞, 在中國; 其一吳, 在夷蠻. 十二世而晉滅中國之虞. 中國之虞滅二世, 而夷蠻之吳興. 大凡從泰伯至壽夢十九世.
王壽夢二年, 楚之亡大夫申公巫臣怨楚將子反而奔晉, 自晉使吳, 敎吳用兵乘車, 令其子爲吳行人, 吳於是始通於中國. 吳伐楚. 十六年, 楚共王伐吳, 으로 봉하니, 바로 우중이고 제후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주장이 죽자 아들 웅수가 왕위에 오르고, 웅수가 죽으니 아들 가상이 왕위에 올랐으며 가상이 죽고 아들 강구이가 올랐다. 강구이가 죽으니 아들 여교의오가 왕위에 올랐고, 여교의오가 죽자 아들 가로가 올랐으며, 가로가 죽으니 아들 주요가 올랐다. 주요가 죽자 아들 굴우가 올랐고, 굴우가 죽자 아들 이오가 올랐으며, 이오가 죽으니 아들 금처가 왕위에 올랐다. 금처가 죽자 아들 전이 올랐고 전이 죽으니 아들 파고가 올랐으며, 파고가 죽자 아들 구비가 올랐다. 그때 진나라 헌공이 주나라 북쪽 우공을 멸망시키고 진나라를 열어 괵을 치게 했다. 구비가 죽자 아들 거제가 올랐고 거제가 죽으니 아들 수몽이 올랐는데, 수몽이 왕위에 오르자 오나라는 더욱 커지기 시작하여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태백이 吳(오)를 연 지 5세 후에 무왕이 은나라를 이겼는데 그 후손을 둘로 봉했으니, 그 하나는 虞(우)로 중국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吳(오)인데 이만에 있었다. 12세 후에 晉(진)나라가 중국의 虞(우)를 멸했고, 중국의 우가 멸한 지 2세에 夷蠻(이만)의 吳(오)는 흥성해졌으니, 대체로 태백에서 수몽에 이르기까지 19세대였다.
수몽왕 2년 초에서 망명한 대부 신공무신이 초나라 장수 자반을 원망하여 진나라로 달려가자, 진나라가 오나라를 시켜 오나라가 병력을 사용하고 수레에 올라 그 아들을 오나라의 사신으로 삼으니, 오나라는 이때부터 중국과 교통하기 시작했다. 오나라가 초나라를 치고 16년에 초나라 공왕이 오나라를 치려고 형산至衡山.
二十五年, 王壽夢卒. 壽夢有子四人, 長曰諸樊, 次曰餘祭, 次曰餘眛, 次曰季札. 季札賢, 而壽夢欲立之, 季札讓不可, 於是乃立長子諸樊, 攝行事當國.
王諸樊元年, 諸樊已除喪, 讓位季札. 季札謝曰:
曹宣公之卒也, 諸侯與曹人不義曹君, 將立子臧, 子臧去之, 以成曹君, 君子曰:能守節矣. 君義嗣, 誰敢於君! 有國, 非吾節也. 札誰不材, 願附於子臧之義.
吳人固立季札. 季札棄其室而耕, 乃捨之. 秋, 吳伐楚, 楚敗我師. 四年, 晉平公初立.
十三年, 王諸樊卒, 有命授弟餘祭, 欲傳以次, 必致國於季札而止, 以稱先王壽夢之意, 且嘉季札之義, 兄弟皆欲致國, 令以漸至焉. 季札封於延陵, 故號曰延陵季子.
王餘祭三年, 齊相慶封有罪, 自齊來奔吳. 에 이르렀다.
25년에 왕 수몽이 죽었는데 수몽에게는 아들 4 사람이 있었으니, 장자는 제번이었고 둘째는 여제였으며, 셋째는 여매였고 넷째는 계찰이었다. 계찰이 현명하여 수몽이 왕위에 세우려 했으나 계찰이 불가하다고 사양했다. 그리하여 이윽고 장자 제번을 세워 나라를 담당하여 일을 돕게 했다.
제번왕 원년에 제번이 이미 상복을 벗고 계찰에게 왕위를 양위하자, 季札(계찰)이 사양하며 말했다.
조의 선공이 죽자 제후와 조나라 사람이 조군을 의롭지 않게 여겨 子臧(자장)을 세우려 하자, 자장이 물리치고 曹君(조군)을 세우니 군자가 말하기를능히 절개를 지켰소.했다. 조군이 의롭게 이어받았으니 누가 감히 조군과 같겠소! 나라를 차지한다면 나의 절개가 아니오. 계찰은 재목이 못 되니 자장의 의리에 따르기를 원합니다.
오 사람이 굳게 계찰을 세우려 하자 계찰이 집을 버리고 농사지으며 마침내 버렸다. 가을에 吳가 楚를 정벌했으나 초가 우리 군사를 패퇴시키고 4년에 진 평공이 처음 올랐다.
13년에 제번왕이 죽으면서 아우 여제한테 주라고 명하자 아우에게 전하려고 하니, 반드시 나라를 계찰에게 넘겨주려다가 그만두면서 돌아가신 수몽왕의 뜻이라 칭하면서 더욱이 계찰을 의롭다고 아름답게 여겨 형제가 다 나라를 넘겨주려고 하니 명령이 점점 지극해졌고, 계찰을 연릉에 봉하게 되었기에 이름을 연릉 계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제왕 3년에 제나라 승상 경봉이 죄가 있어 제나라로부터 오나라로 달아나자, 오나라吳予慶封朱方之縣, 以爲奉邑, 以女妻之, 富於在齊.
四年, 吳使季札聘於魯, 請觀周樂. 爲歌《周南》ㆍ《召南》. 曰:
美哉, 始基之矣, 猶未也. 然勸而不怨.
歌《鄁》ㆍ《鄘》ㆍ《衛》. 曰:
美哉, 淵乎, 憂而不困者也. 吾聞衛康叔ㆍ武公之德如是, 是其《衛風》乎?
歌《王》. 曰:
美哉, 思而不懼, 其周之東乎?
歌《鄭》. 曰:
其細已甚, 民不堪也, 是其先亡乎?
歌《齊》. 曰:
美哉, 泱泱乎大風也哉. 表東海者, 其太公乎? 國未可量也.
歌《豳》. 曰:
美哉, 蕩蕩乎, 樂而不淫, 其周公之東乎?
歌《秦》. 曰:
此之謂夏聲. 未能夏則大, 大之至也, 其周之舊乎?
歌《魏》. 曰:
는 경봉에게 주방의 현을 주고 읍을 봉했으며, 딸을 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니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부유하게 되었다.
4년에 오나라가 계찰을 노나라에 초빙해 주악 연주를 보라고 청했다.
《주남》ㆍ《소남》의 노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다. 기본은 시작했으나 아직 다하지 못했군. 그러나 권장하고 원망은 말아야지.《패》ㆍ《용》ㆍ《위》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고 깊지 아니한가. 근심해도 괴롭지는 않구나. 내가 듣기에 위나라 강숙ㆍ무공의 덕망이 이와 같다고 들었는데 바로《위풍》이 아닌가?
《왕》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생각해도 두렵지 않으니 주나라의 동쪽이 아닌가?
《정》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매우 세밀하여 백성이 감당할 수 없겠으니 바로 먼저 망하지 않겠는가?
《제》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왕성하여 큰바람 같지 않은가. 동해를 나타내니 강태공이 아닌가? 나라를 헤아릴 수가 없구나.
《빈》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넓고도 넓지 아니한가. 즐기되 방탕하지 않으니 주공의 동쪽이 아닌가?
《진》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것을 일러 하나라 소리라 하는구나. 하나라만큼 크지 않으나 크기가 지극하니 주나라의 옛 것이 아닌가?
《위》나라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美哉, 渢渢乎, 大而寬, 儉而易, 行以德輔, 此則盟主也.
歌《唐》. 曰:
思深哉, 其有陶唐氏之遺風乎? 不然, 何憂之遠也? 非令德之後, 誰能若是!
歌《陳》. 曰:
國無主, 其能久乎?
自《鄶》以下, 無譏焉. 歌《小雅》. 曰:
美哉, 思而不貳, 怨而不言, 其周德之衰乎? 猶有先王之遺民也.
歌《大雅》. 曰:
廣哉, 熙熙乎, 曲而有直體, 其文王之德乎?
歌《頌》. 曰:
至矣哉, 直而不倨, 曲而不詘, 近而不逼, 遠而不携, 遷而不淫, 復而不慶, 哀而不愁, 樂而不荒, 用而不匱, 廣而不宣, 施而不費, 取而不貪, 處而不底, 行而不流. 五聲和, 八風平, 節有度, 守有序, 盛德之所同也.
見舞《象箾》ㆍ《南籥》者, 曰:
美哉, 猶有感.
아름답구나. 노랫소리가 구성지지 않은가. 크고도 넓으며 검박하고도 쉬우니 행하여 덕망으로 도와야 바로 곧 맹주가 되지.
《당》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생각이 깊지 않은가. 요임금 아들 도당이 남긴 풍류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근심을 멀리 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덕행의 후예로 누가 이와 같을까!
《진》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나라에 임금이 없으면 오래 갈까?
《회》의 노래로부터 그 이하는 나무람이 없었다. 《소아》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름답다. 생각해도 두 마음이 없고 원망해도 말이 없으니 주나라의 덕망이 쇠퇴할 것인가? 오직 돌아가신 왕이 남긴 백성이구나.
《대아》노래를 듣고 말했다.
넓고도 빛나지 않는가. 굽었으나 곧은 형체가 있으니 문왕께서 남기신 덕망이 아니겠는가?
《송》의 노래를 듣고 말했다.
지극하도다. 곧아도 거만하지 않고 굽어도 비굴하지 않으며, 가까워도 옥죄지 않고 멀어도 잡아끌지 않으며, 달라져도 방탕하지 않고 돌아와도 경사스러워하지 않으며, 슬퍼도 근심하지 않고 즐겨도 거칠지 않으며, 써도 담아두지 않고 많아도 베풀지 않으며, 베풀어도 소비하지 않고 취해도 탐하지 않으며, 처신하여 낮아지지 않고 행하여도 흐르지 않는다. 오성이 화하고 팔풍이 고르며, 절도가 있고 질서를 지키니 성덕이 하나로 되도다.
《상소》ㆍ《남약》의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여전히 감흥이 있구나.
見舞《大武》, 曰:
美哉, 周之盛也其若此乎?
見舞《韶護》者, 曰:
聖人之弘也, 猶有慚德, 聖人之難也!
見舞《大夏》, 曰:
美哉, 勸而不德! 非禹其誰能及之?
見舞《招箾》, 曰:
德至矣哉, 大矣, 如天之無不燾也, 如地之無不載也, 雖甚盛德, 無以加矣. 觀止矣, 若有他樂, 吾不敢觀.
去魯, 遂使齊. 說晏平仲曰:
子速納邑與政. 無邑無政, 乃免於難. 齊國之政將有所歸; 未得所歸, 能未息也.
故晏子因陳桓子以納政與邑, 是以免於欒高之難.
去齊, 使於鄭. 見子産, 如舊交. 謂子産曰:
鄭之執政侈, 難將至矣, 政必及子. 子爲政, 愼以札. 不然, 鄭國將敗.
去鄭, 適衛. 說蘧瑗ㆍ史狗ㆍ史鰍ㆍ公子荊ㆍ公叔發ㆍ公子朝曰:
《대무》춤을 보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주나라가 왕성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게 아닌가?
《소호》의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말했다.
성인의 너그러움이여! 여전히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니 성인의 어려움이로구나!
《대하》의 춤을 보고 말했다.
아름답구나! 힘써도 덕이 없구나! 우임금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에 미치겠는가?
《초소》의 춤을 보고 말했다.
덕망이 지극하고 커서 하늘도 비추지 못할 것 같고 땅도 실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누가 훌륭한 성덕에 더할 수 있을 것인가. 보기를 마치니 다른 음악이 있다고 해도 나는 보지 않겠다.
노나라에 가서 이윽고 제나라 사신이 되어, 안평중에게 말했다.
그대가 속히 읍을 받아들여 다스리세요. 읍이 없고 정치가 없으면 곧 어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제나라의 정치는 돌아갈 만한 곳인데, 돌아가지 못하면 쉴 수가 없지요.
옛날에 안자는 진나라 환자가 주는 다스릴 읍을 받아들여 바로 난고의 어려움을 면하게 되었다.
제로 가서 정의 사신이 되어 자산을 만나 예와 같은 교분을 맺으며 자산에게 말했다.
정나라의 집정이 사치하여 어려움이 닥칠 것이니 정치는 반드시 그대에게 미칠 것이요. 그대가 다스리되 신중하게 새기세요.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는 패망해요.
정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갔다. 거원ㆍ사구ㆍ사추ㆍ공자형ㆍ공숙발ㆍ공자조에게 설득하며 말했다.
衛多君子, 未有患也.
自衛如晉, 將舍於宿, 聞鐘聲, 曰:
異哉! 吾聞之, 辯而不德, 必如於戮. 夫子獲罪於君以在此, 愼猶不足, 而又可以畔乎? 夫子之在此, 猶燕之巢於幕也. 君在殯而可以樂乎?
遂去之. 文子聞之, 終身不聽琴瑟.
適晉, 說趙文子ㆍ韓宣子ㆍ魏獻子曰:
晉國其萃於三家乎!
將去, 謂叔向曰:
吾子勉之! 君侈而多良, 大夫皆富, 政將在三家. 吾子直, 必思自免於難.
季札之初使, 北過徐君. 徐君好季札劍, 口弗敢言. 季札心知之, 爲使上國, 未獻. 還至徐, 徐君已死, 於是乃解其寶劍, 繫之徐君冢樹而去. 從者曰:
徐君已死, 尙誰予乎?
季子曰:
不然. 始吾心已許之, 豈以死倍吾心哉!
위나라는 군자가 많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위나라에서처럼 진나라의 숙소에서 잠을 자려다가 종소리를 듣고 말했다.
이상하구나! 내가 듣기에 말을 해도 덕이 없으니 반드시 죽임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그대가 임금에게 죄를 지으면 신중해도 부족할 텐데, 또 반역하는 것이 가하겠소? 그대가 이곳에 있으면서 오히려 군막을 제비의 보금자리로 아는군요. 임금이 버리면 가히 즐거울 수 있겠소?
이윽고 떠나갔다. 문자가 듣더니 죽을 때까지 거문고와 비파 소리를 듣지 않았다.
진나라에 가서 조나라의 문자ㆍ한나라의 선자ㆍ위나라의 헌자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3 나라를 모았군요!
장차 떠나면서 숙향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힘쓰세요! 임금이 너그럽고 매우 어질며 대부가 모두 부유하니 정치는 3 나라에 달렸소. 그대들은 곧게 하여 반드시 어려움을 면할 생각을 하세요.
계찰이 처음 사신이 되어 북쪽의 서군을 지나자, 서군이 계찰의 검을 좋아했으나 입으로는 감히 말하지 않았다. 계찰이 마음속으로 알았으나 상국의 사신이 되었기에 주지 않았다. 서군에 돌아오니 서군이 이미 죽었기에 이윽고 그 보검을 풀어 서군의 무덤가 나무에 걸어놓고 갔다. 시종이 물었다.
서군이 이미 죽었는데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계자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내가 마음속으로 이미 허락했는데 어찌 죽었다고 내 마음속에 배반할까!
七年, 楚公子圍弑其王夾傲而代立, 是爲靈王. 十年, 楚靈王會諸侯而以伐吳之朱方, 以誅齊慶封. 吳亦攻楚, 取三邑而去. 十一年, 楚伐吳, 至雩婁, 十二年, 楚復來伐, 次於乾溪, 楚師敗走.
十七年, 王餘祭卒, 弟餘眛立. 王餘眛二年, 楚公子棄疾弑其君靈王代立焉.
四年, 王餘眛卒, 欲授弟季札. 季札讓, 逃去. 於是吳人曰:
先王有命, 兄卒弟代立, 必致季子, 季子今逃位, 則王餘眛後立. 今卒, 其子當代.
乃立王餘眛之子僚爲王.
王僚二年, 公子光伐楚, 敗而亡王舟. 光懼, 襲楚, 復得王舟而還.
五年, 楚之亡臣伍子胥來奔, 公子光客之. 公子光者, 王諸樊之子也. 常以謂
吾父兄弟四人, 當傳至季子. 季子卽不受國, 光父先立. 卽不傳季子, 光當立.
7년에 초나라 공자 위가 그의 왕 협오를 시해하고 대신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왕이다. 10년에 초나라 영왕이 제후를 모아 오나라의 주방을 치려고 제나라의 경봉을 죽였다. 오나라 역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3 곳 읍을 취하고 떠나갔다. 11년에 초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하여 우루에 이르렀고, 12년에는 초나라가 다시 치러 와서 다음에 건계에서 초나라 군사가 패해 달아났다.
17년에 여제왕이 죽자 아우 여매가 왕위에 올랐다. 여매왕 2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이 그의 임금 영왕을 시해하고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4년에 여매왕이 죽으면서 아우 계찰한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계찰이 사양하고 도망쳤다. 그리하여 오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선왕의 명이 있어 형님이 죽으면 아우를 대신 옹립하라 했으니, 반드시 계자(계찰)에게 넘겨야 하는데 계자가 지금 도망쳤으니 바로 여매왕의 후손을 옹립해야 한다. 지금 죽었으니 그 아들로 마땅히 대신해야 한다.
이윽고 여매왕의 아들 요를 왕으로 옹립했다.
요왕 2년에 공자 광이 초를 정벌했는데, 패퇴시켜 왕주가 도망치자 광이 걱정되어 초나라를 기습해 다시 왕주를 붙잡아 돌아왔다.
5년에 초나라의 멸망한 신하 오자서가 도망쳐오자 공자 광이 손님으로 대접했다. 공자 광이라는 사람은 제번왕의 아들이었는데 항상 말했었다.
내 부친과 형제 4 명은 마땅히 계자(계찰)에게 전한다. 계자가 나라를 받지 않으면 광의 부친을 먼저 옹립해야 한다. 계자에게 전하지 않으면 광을 마땅히 세워야 한다.
陰納賢士, 欲以襲王僚.
八年, 吳使公子光伐楚, 敗楚師, 迎楚故太子建母於居巢以歸. 因北伐, 敗陳ㆍ蔡之師. 九年, 公子光伐楚, 拔居巢ㆍ鍾離. 初, 楚邊邑卑梁氏之處女與吳邊邑之女爭桑, 二女家怒相滅, 兩國邊邑長聞之, 怒而相攻, 滅吳之邊邑. 吳王怒, 故遂伐楚, 取兩都而去.
伍子胥之初奔吳, 說吳王僚以伐楚之利. 公子光曰:
胥之父兄爲僇於楚, 欲自報其仇耳. 未見其利.
於是伍員知光有他志, 乃求勇士專諸, 見之光. 光喜, 乃客伍子胥. 子胥退而耕於野, 以待專諸之事.
十二冬, 楚平王卒. 十三年春, 吳欲因楚喪而伐之, 使公子盖餘ㆍ燭庸以兵圍楚之六ㆍ浩灊. 使季札於晉, 以觀諸侯之變. 楚發兵絶吳兵後, 吳兵不得還. 於是吳公子光曰:
此時不可失也.
몰래 현사를 받아들여 요왕을 기습하려 했다.
8년에 오나라가 공자 광을 시켜 초나라를 정벌해 초나라 군사를 패퇴시켜 초나라의 옛 태자 건의 어머니를 거소에서 돌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북쪽을 정벌해 진ㆍ채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 9년에 공자 광이 초나라를 쳐 거소ㆍ종리를 빼앗았다. 처음에 초나라 변방 읍의 비량씨의 처녀와 오나라 변방 읍의 여자에게 누에치기를 겨루게 했는데, 두 집안 여자들이 화가 나서 서로 죽이자 2 나라 변방 읍장이 듣고 성을 내며 서로 공격하여 오나라 변방 읍을 멸망시켰다. 오나라 왕이 노하여 드디어 초나라를 쳐 2 읍을 취하고 떠났다.
오자서가 처음 오나라로 도망쳤을 때 오나라 요왕에게 초나라를 치는 이로움을 말하자 공자 광이 말했다.
자서의 부형이 초나라한테 죽어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지 이로움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리하여 오운(오자서)은 광이 다른 뜻을 품은 걸 알고 마침내 용사 전제를 구하여 광을 만나게 하자, 광이 기뻐 바로 오자서를 손님으로 대접하니, 자서가 물러나 들에서 농사지으며 전제가 일 처리하기를 기다렸다.
12년 겨울에 초나라 평왕이 죽었다. 13년 봄에 오나라가 초나라의 초상을 당해 정벌하려고 공자 개여ㆍ촉용을 시켜 병력으로 초나라의 육ㆍ호첨을 포위하게 했고, 계찰을 시켜 진나라에서 제후들의 변란을 살피게 했다. 초나라가 병력을 일으켜 오나라 병력의 뒤를 끊자 오나라 병력은 동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오나라 공자 광이 말했다.
이때를 놓칠 수는 없지.
告專諸曰:
不索何獲! 我眞王嗣, 當立, 吾欲求之. 季子雖至, 不吾廢也.
專諸曰:
王僚可殺也. 母老子弱, 而兩公子將兵攻楚, 楚絶其路. 方今吳外困於楚, 而內空無骨鯁之臣, 是無奈我何.
光曰:
我身, 子之身也.
四月丙子, 光伏甲士於窟室, 而謁王僚飮. 王僚使兵陳於道, 自王宮至光之家, 門階戶席, 皆王僚之親也, 人夾持鈹. 公子光佯爲足疾, 入於窟室, 使專諸置匕首於炙魚之中以進食. 手匕首刺王僚, 鈹交於匈, 遂弑王僚. 公子光竟代立爲王, 是爲吳王闔閭. 闔閭乃以專諸子爲卿.
季子至, 曰:
苟先君無廢祀, 民人無廢主, 社稷有奉, 乃吾君也. 吾敢誰怨乎? 哀死事生, 以待天命. 非我生亂, 立者從之, 先人之道也.
復命, 哭僚墓, 復位以전제한테 알렸다.
어떻게 붙잡을지 못 찾겠소! 나는 참으로 왕위를 이어받아 당장 오르려고 내가 해보려오. 계자가 비록 와도 나를 폐하지 못해요.
전제가 말했다.
요왕은 죽일 수 있소. 어머니는 늙고 아들이 허약한데 2 공자가 병력으로 초를 공격하면 초가 길을 끊어요. 방금 吳(오)는 밖으로 楚(초)한테 괴로움을 당하고 안은 텅 비고 직간하는 신하가 없으니 곧 어찌 할 수 없소.
광이 말했다.
내 몸은 그대의 몸이요.
4월 병자일에 광은 갑옷 입은 군사를 지하실에 매복시켜 놓고 요왕을 만나 술을 마셨다. 요왕이 병사를 길에 늘어세웠는데 왕궁에서 광의 집에 이르기까지 대문과 계단 및 문호와 좌석이 모두 요왕의 친척이고 사람들은 칼을 들고 창을 잡고 있었다. 공자 광은 거짓으로 발병이 났다고 지하실로 들어가 전제를 시켜 비수를 구운 생선에 넣어 음식을 올리게 했다. 비수를 손에 들고 요왕을 찌르고 창으로 가슴을 후벼 마침내 요왕을 시해했다. 공자 광은 결국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오나라 왕 합려였고, 합려는 이윽고 전제를 경대부로 삼았다.
계자(계찰)가 오더니 말했다.
진실로 선왕의 제사를 폐할 수 없고 백성은 임금을 폐할 수 없으며, 사직을 받들어야 하니 바로 우리 임금인데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소? 죽은 이를 슬퍼하고 산 사람을 섬기며 천명을 기다려야지요. 나는 어지럽히지 않고 옹립한 분을 따르겠는데 선인의 도입니다.
명을 받고 요왕의 묘에 곡을 하고 제자리에待. 吳公子燭庸ㆍ盖餘二人將兵遇圍於楚者, 聞公子光弑王僚自立, 乃以其兵降楚, 楚封之於舒.
王闔閭元年, 擧伍子胥爲行人而與謀國事. 楚誅伯州犁, 其孫伯嚭亡奔吳, 吳以爲大夫.
三年, 吳王闔閭與子胥ㆍ伯嚭將兵伐楚, 拔舒, 殺吳亡將二公子. 光謀欲入郢, 將軍孫武曰:
民勞, 未可, 待之.
四年, 伐楚, 取六與灊. 五年, 伐越, 敗之. 六年, 楚使子常囊瓦伐吳. 迎而擊之, 大敗楚軍於豫章, 取楚之居巢而還.
九年, 吳王闔閭請伍子胥ㆍ孫武曰:
始子之言郢未可入, 今果如何?
二子對曰:
楚將子常貪, 而唐ㆍ蔡皆怨之. 王必欲大伐, 必得唐ㆍ蔡乃可.
闔閭從之, 悉興師, 與唐ㆍ蔡西伐楚, 至於漢水. 楚亦發兵拒吳, 夾水陳. 吳王闔閭弟夫槪欲戰, 闔閭弗許. 돌아가 기다렸다. 오나라 공자 촉용ㆍ개여 2 사람의 장수와 병사가 초나라에게 에워싸였는데, 공자 광이 요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듣자, 이윽고 병력이 초나라에 항복하자 초나라는 서(舒)에 봉했다.
합려왕 원년에 오자서에게 조근과 빙문을 맡기고 나랏일을 모의했다. 초나라에서 백주리를 죽이자 그의 손자 백비가 오나라로 망망해 도망쳐오니 오나라에서는 대부로 삼았다.
3년에 오나라 왕 합려와 오자서ㆍ백비가 병력을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여 舒(서)를 들이치고 오나라에서 망명한 2 공자를 죽여 버렸다. 광(합려)이 영(郢)에 들어가려고 하자 장군 孫武(손무)가 말했다.
백성이 지쳤으니 안 돼요. 기다리십시오.
4년에 초를 쳐서 육(六)과 첨(灊)을 취하고, 5년에 월을 쳐서 패망시켰다. 6년에 초가 자상ㆍ낭와를 시켜 오나라를 치게 했는데 맞이하여 공격해 초나라 군사를 예장에서 무참하게 무찌르고 초나라의 거소를 취하고 돌아왔다.
9년에 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ㆍ손무를 초청한 자리에서 물었다.
그대들의 말을 듣고 영(郢)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과연 어떻겠소?
2 사람이 대답했다.
초 장수 자상은 욕심이 많아 당(唐)ㆍ채(蔡)가 다 원망합니다. 왕께서 꼭 대규모로 정벌하시면 반드시 당ㆍ채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합려가 따르며 모든 군사를 일으켜 당ㆍ채 및 서쪽의 초나라를 치려고 한수에 이르렀다. 초나라 역시 병력을 일으켜 오나라에 맞서 물 가까이에 진을 쳤다. 오나라 왕 합려의 아우 부개가 싸우려고 하자, 합려가 허락하지 않으夫槪曰:
王已屬臣兵,
兵以利爲上, 尙何待焉?
遂以其部五千人襲冒楚, 楚兵大敗, 走. 於是吳王遂縱兵追之. 比至郢, 五戰, 楚五敗. 楚昭王亡出郢, 奔鄖. 鄖公弟欲弑昭王, 昭王與鄖公奔隨. 而吳兵遂入郢. 子胥ㆍ伯嚭鞭平王之屍以報父仇.
十年春, 越聞吳王之在郢, 國空, 乃伐吳. 吳使別兵擊越. 楚告急秦, 秦遣兵救楚擊吳, 吳師敗. 闔閭弟夫槪見秦越交敗吳, 吳王留楚不去, 夫槪亡歸吳而自立爲吳王. 闔閭聞之, 乃引兵歸, 攻夫槪. 夫槪敗奔楚. 楚昭王乃得以九月復入郢, 而封夫槪於堂溪, 爲堂溪氏. 十一年, 吳王使太子夫差伐楚, 取番. 楚恐而去郢徙鄀.
十五年, 孔子相魯.
十九年夏, 吳伐越, 越王勾踐迎擊之携李. 越使死士挑戰, 三行造吳師, 呼, 自剄. 吳師觀之, 越因伐吳, 敗之니 부개가 투덜거렸다.
왕께서 이미 신에게 병력을 부탁하셔, 병법에서는 이로움을 최상으로 치는데 아직 무얼 기다립니까?
드디어 부하 5천으로 초를 습격하자 초 병력이 무참히 패해 달아났다. 그리하여 오 왕이 마침내 병력을 데리고 추격해 영(郢)에 가까이 이르러 다섯 번 싸워 초나라를 패퇴시키자, 초 昭王(소왕)이 영에서 도망쳐 운(鄖)으로 달아나니 鄖公(운공)의 아우가 소왕을 죽이려 하자 소왕과 운공이 수(隨)로 달아났다. 오 병력이 마침내 영에 들어가 오자서ㆍ백비가 평왕의 시신에 채찍질해 원수를 갚았다.
10년 봄, 월은 오 왕이 영에 있어 나라가 비었다고 듣자 마침내 오를 정벌했다. 오는 병도의 병력으로 월을 치자 초가 급보를 진(秦)에 알리니, 진이 병력을 파견해 오를 치고 초를 구하자 오 군사가 패했다. 합려의 아우 부개가 진과 월이 섞여 오를 패퇴시켜 오 왕이 초에 묶여 돌아올 수 없는 걸 보고, 부개가 도망쳐 오에 돌아와 스스로 오 왕위에 올랐다. 합려가 듣고 마침내 병력을 끌고 돌아와 부개를 치자, 부개는 초로 도망쳤다. 초 소왕이 드디어 9월에 다시 영을 수복하고 부개를 당계에 봉해 당계씨로 했다. 11년에 오 왕이 태자 부차를 시켜 초를 치게 하여 번을 취하니, 초는 두려워 영에서 약으로 옮겨갔다.
15년에 공자는 노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19년 여름에 오나라가 월나라를 치자 월나라 왕 구천이 맞아 휴이를 공격했다.
월나라는 죽음을 무릅쓴 병사를 시켜 싸움을 돋우고 세 번 오사를 울게 만드니 스스로 목을 찔렀다. 오사가 보니 월나라가 오나라를 姑蘇, 傷吳王闔閭指, 軍却七里. 吳王病傷而死. 闔閭使立太子夫差, 謂曰:
爾而忘勾踐殺汝父乎?
對曰:
不敢!
三年, 乃報越.
王夫差元年, 以大夫伯嚭爲太宰. 習戰射, 常以報越爲志. 二年, 吳王悉精兵以伐越, 敗之夫椒, 報姑蘇也. 越王勾踐乃以甲兵五千人棲於會稽, 使大夫種因吳太宰嚭而行成, 請委國爲臣妾. 吳王將許之, 伍子胥諫曰:
昔有過氏殺斟灌以伐斟尋, 滅夏后宰相. 宰相之妃后緡方娠, 逃於有仍而生少康. 少康爲有仍牧正. 有過又欲殺少康, 少康奔有虞. 有虞思夏德, 於是妻之以二女而邑之于綸, 有田一成, 有衆一旅. 後遂收夏衆, 撫其官職. 使人誘之, 遂滅有過氏, 復禹之績, 祀夏配天, 不失舊物. 今吳不如有過之强, 而勾踐大於少康. 今不因此而滅之, 쳐서 고소가 패 하자 오나라 왕 闔閭(합려)는 손가락을 자르고 7리를 퇴각했다. 오나라 왕이 질병과 상처로 죽었다. 합려는 夫差(부차)를 태자로 세우면서 물었다.
너는 구천이 애비 죽게 한 걸 잊겠느냐?
부차가 대답했다.
감히 잊을 수 없지요!
3년에 이윽고 월나라에 보복했다.
부차왕 원년에 대부 백비를 태재로 삼고 활쏘기 연습을 하면서 항상 월에 보복할 뜻을 가졌다. 부차왕 2년에 오 왕이 모든 정예한 병력으로 월을 정벌하여 부초를 패퇴시킴으로써 고소에서 당한 패배를 보복했다. 월나라 왕 구천이 마침내 중무장한 병력 5천 명을 회계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대부 종인을 시켜 태재 백비와 화친을 성사시키면서 나라를 맡기고 종으로 부리라고 하자, 오나라 왕이 장차 허락하려고 하니 오자서가 간하며 말했다.
옛날 유과씨가 짐관을 죽이고 짐심을 정벌하여 하후 재상을 멸망시켰는데, 재상의 비후 민(緡)이 마침 임신 중이어서 유잉으로 달아나 소강을 낳았지요. 소강이 유잉의 목정이 되자 유과씨가 또 소강을 죽이려 하니 소강이 유우로 달아났지요. 유우는 하나라의 덕망이 생각나 마침내 부인으로 삼고 2 딸을 읍의 우륜으로 삼았는데, 전답 사방 10 리와 사방 10 리의 백성을 주었지요. 뒤에 바로 하중을 수복하고 그의 관직을 손에 쥐자, 사람을 시켜 꾀어내 마침내 유과씨를 멸망시키고, 우(禹)의 업적을 복권시켜 하(夏)나라의 조상에 제사하니 옛 풍습을 잃지 않았지요. 지금 오나라는 유과씨보다 강하지 않고 구천은 소강보다 힘이 셉니다. 지금 이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또 又將寬之, 不亦難乎! 且勾踐爲人能辛苦, 今不滅, 後必悔之.
吳王不聽, 聽太宰嚭. 卒許越平, 與盟而罷兵去.
七年, 吳王夫差聞齊景公死而大臣爭寵, 新君弱, 乃興師北伐齊. 子胥諫曰:
越王勾踐食不重味, 衣不重彩, 弔死問疾, 且欲有所用其衆. 此人不死, 必爲吳患. 今越在腹心疾而王不先, 而務齊, 不亦謬乎!
吳王不聽, 遂北伐齊, 敗齊師於艾陵. 至繒, 召魯哀公而徵百牢. 季康子使子貢以周禮說太宰嚭, 乃得止. 因留略地於齊魯之南. 九年, 爲騶伐魯, 至, 與魯盟乃去. 十年, 因伐齊而歸. 十一年, 復北伐齊.
越王勾踐率其衆以朝吳, 厚獻遺之, 吳王喜. 唯子胥懼, 曰:
是棄吳也.
諫曰:
越在腹心, 今得志於齊, 猶石田, 無所用. 且《盤庚之誥》有顚越너그럽게 대하면 어려움이 없지 않습니다! 게다가 구천은 사람됨이 고생을 잘 견디니 지금 멸하지 않으면 뒤에 꼭 후회하게 됩니다.
오나라 왕이 듣지 않고 태재 白嚭(백비)의 말을 들어, 졸지에 월과 화평을 허락하여 동맹을 맺고 병력을 물렸다.
7년에 오나라 부차는 齊(제) 경공이 죽자 대신들이 고이기를 시샘하고 새 임금이 약하다고 듣자, 이윽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 제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오자서가 간했다.
월 왕 구천은 맛있는 걸 안 먹고 좋은 옷도 안 입으며 죽은 사람을 조문하고 아픈 사람을 문병하며 또 쓸 무리를 모읍니다. 이 사람을 안 죽이면 반드시 오에 근심이 됩니다. 지금 월은 뱃속의 병인데 왕께서 먼저 없애지 않고 제(齊)에 힘쓰니 어찌 잘못이 아닙니까!
오 왕이 듣지 않고 드디어 북쪽 제를 정벌하여 제 군사를 애릉에서 패망시키고, 회(繪)에 이르러 노 애공을 불러 백뢰를 구해 주었다. 계강자가 자공을 시켜 주례를 들어 태재 백비를 설득하자 이윽고 멈추었다. 그리하여 제ㆍ노의 남쪽의 빼앗은 땅을 그대로 두었다. 9년에 노를 기마병으로 정벌하여 이르러 노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10년에 제를 정벌하고 돌아갔고, 11년에 다시 북쪽 제를 정벌했다.
월 왕 구천이 무리를 이끌고 오나라에 조하하면서 후한 공물을 바치자 오나라 왕이 기뻐하는데, 오직 오자서가 걱정하면서 뇌었다.
바로 오나라를 버리게 되는군.
오자서가 간하며 말했다.
월은 뱃속의 근심인데 지금 제에만 뜻을 두니 돌밭 같아서 쓸모가 없습니다. 또《은을 중흥시킨 반경의 가르침》대로 월을 무너뜨리勿遺, 商之以興.
吳王不聽, 使子胥於齊, 子胥屬其子於齊鮑氏, 還報吳王. 吳王聞之, 大怒, 賜子胥屬鏤之劍以死. 將死, 曰:
樹吳墓上以梓, 令可爲器. 抉吾眼置之吳東門, 以觀越之滅吳也.
齊鮑氏弑齊悼公. 吳王聞之, 哭於軍門外三日, 乃從海上攻齊. 齊人敗吳, 吳王乃引兵歸.
十三年, 吳召魯ㆍ衛之君會於橐皐.
十四年春, 吳王北會諸侯於潢池, 欲覇中國以全周室. 六月丙子, 越王勾踐伐吳. 乙酉, 越五千人與吳戰. 丙戌, 虜吳太子友. 丁亥, 入吳. 吳人告敗於王夫差, 夫差惡其聞也. 或泄其語, 吳王怒, 斬七人於幕下. 七月辛丑, 吳王與晉定公爭長. 吳王曰:
於周室我爲長.
晉定公曰:
於姬姓我爲伯.
趙鞅怒, 將伐吳, 乃長晉定公. 吳王已盟, 與晉別, 欲伐宋. 太宰嚭曰:
고 남기지 않아야 商(상)의 흥성이 됩니다.
오나라 왕이 듣지 않고 오자서를 시켜 제나라에서 자서의 아들에게 부탁해 제나라 포씨가 오나라 왕에게 보고했다. 오나라 왕이 듣더니 매우 화를 내며 오자서에게 맡겨 검을 내려주어 죽게 했다. 포씨가 죽으면서 말했다.
오왕의 묘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본보기로 하고, 내 눈을 도려내어 오나라 동쪽 문에 두어 월이 오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제(齊)의 포씨가 제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오왕이 듣고 군문 밖에서 3일간 울더니 마침내 바다 위로 제를 공격했으나, 제가 오를 패퇴하니 오왕은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13년에 오나라가 노나라ㆍ위나라의 임금을 불러 탁고(橐皐)에서 모임을 가졌다.
14년 봄에 오 왕이 북쪽 황지에서 제후를 모아 중국의 패자가 되어 주 황실을 온전히 하려 했다. 6월 병자에 월왕 구천이 오를 정벌했다. 을유에 월나라 5,000명과 오가 싸웠고, 병술에 오 태자 우(友)를 붙잡았으며, 정해에는 오에 들어갔다. 오나라 사람이 패한 것을 오왕 부차에게 알리자, 부차가 그 풍문을 싫어하고 혹시 그 말이 새날까 하여 오왕이 노하여 사령부 아래에서 7명의 목을 쳐 버렸다. 7월 신축일에 오 왕과 진(晉)나라 정공이 우두머리 자리를 다투다가 오왕이 말했다.
주 황실에서 내가 우두머리가 돼야 한다.
진나라 정공이 주장했다.
희(姬)씨 성에서는 내가 맏형이다.
조앙이 화를 내고 오를 정벌하니 이윽고 진의 정공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오 왕은 이미 동맹을 맺고 진나라와 헤어져 송나라를 치려고 하자 태재 백비가 말했다.
可勝而不能居也.
乃引兵歸國. 國亡太子, 內空, 王居外久, 士皆疲敝, 於是乃使厚幣以與越平.
十五年, 齊田常殺簡公.
十八年, 趙益强, 越王勾踐率兵復伐敗吳師於笠澤. 楚滅陳.
二十年, 越王勾踐復伐吳. 二十一年, 遂圍吳. 二十三年十一月丁卯, 越敗吳. 越王勾踐欲遷吳王夫差於甬東, 予百家居之. 吳王曰:
孤老矣, 不能事君王也. 吾悔不用子胥之言, 自令陷此.
遂自剄死. 越王滅吳, 誅太宰嚭, 以爲不忠, 而歸.
太史公曰:
孔子言:泰伯可謂至德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余讀《春秋》古文, 乃知中國之虞與荊蠻句吳兄弟也. 延陵季子之仁心, 慕義無窮, 見微而知淸濁. 嗚呼! 又何其閎覽博物君子也! -尾-
이길 수는 있으나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귀국했다. 태자가 나라를 망하게 하니 안이 텅 비고 왕은 밖에 오래 머물자, 군사가 모두 피폐하여 마침내 폐백을 후히 주고 월과 화평을 맺었다.
15년에 제나라 전상이 간공을 죽여 버렸다. 18년에 조나라가 더욱 강성해지자 월 왕 구천이 병력을 인솔하고 다시 오 군사를 입택에서 패망시켰고, 초(楚)는 진(陳)을 멸망시켰다.
20년에 월나라 왕 구천이 다시 오나라를 정벌했고, 21년에는 드디어 오나라를 포위했다. 부차왕 23년 11월 정묘일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망시켰다.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를 용동으로 옮겨가게 하여 100 집을 주면서 머물게 하자, 오나라 왕이 한탄했다.
과인이 늙어서 군왕을 섬길 수가 없게 되었구나. 내가 오자서의 말을 용납하지 않아 내 스스로 이렇게 무너진 것을 후회한다.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어 버렸다. 월나라 왕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태재 백비를 불충하게 여겨 죽여 버리고 돌아갔다.
태사공이 말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오태백은 지극한 덕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하를 세 번이나 사양하여 백성들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내가《춘추》옛 글을 읽고 드디어 중국의 虞(우)와 형만의 句吳(구오)가 형제임을 알았다. 연릉 계자(계찰)의 어진 마음을 내가 끝없이 의롭게 생각하여 세밀하게 바라보고 맑고 탁함을 알게 되었다. 오호라! 또 어찌 그렇게 견문이 넓고 넓은 군자가 있을 것인가! -끝-
司馬遷 史記
世家 第一 吳泰伯
對譯 : 吳秦均
(韓國吳氏 同福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