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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하는일은 따르는 것이 인지상정 이라
안개비 자욱한 안동 천지갑산 가는 능선을
오래전에 간길을 찻아 찻아 다니다 왔다.
순리란 順理 무리가 없는 이치나 도리라는 것이다. 무리가 없는 이치나 도리를 먼저 알아야한다. 순리대로 살려면 먼저 이치나 도리를 알지 못하고는 알수없다. 배우고 알아야 지식을 버리든지 지혜로 가든지 해야
한디. 그러나, 인간은 득 得하고 실失하면 가진것을 잃은 것은 마치 당연히 자신의 것을 잃은 아쉬움 이나 욕심을 버리는 것을 하기 어렵다. 어려움을 먼저 겪어면서 얻어지는 것은 쉽사리 잃기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을 어찌 함부로 할수 있지 못한다. 세상일이란 앞뒤가 바뀌면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 지는 것이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시작점과 끝나는 순서를 아는 것이라 알기가 무척 어렵다. 지나고 나면 마치 강물이 흐르는 것은 작은 시냇물들이 모여서 그런 것이고 모두 바다로 향하는 순리를 당연한 듯이 알듯 지나고 나서는 알아지는 것이다. 배우고 얻어지면 경험이나 간접으로 보고 들어면 당연히 순리대로 사는 것이 삶에 지혜를 얻어지는 것이다. 공지님이나 도인들의 생각 이나 행동도 순리대로 사는 것이 기본이다.
앞뒤가 바뀌고 그때그때 마다 다르다는 것은 임시방편이지만 순리에 어긋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도道가되는 것이다.
철학이고 지식이고 지혜이고 지나온 시절에는 그때그때마다 생기는 사상이나 법칙이 우리를 가두어두는 진리 행서를 한다.
마치 혁명을 이룬 자들이 독재자 마냥 내세우는 구호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도구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론이나 법칙이나 실험이나 인간을 이용하는 것은 각자의 철학이나 생각의 일부분일 뿐이다. 인간들은 각자의 개성이 있고 독자적인 존재로 모두가 상대성이라는 것이다. 마치 병원에 가면 나이따라 조제해 주는 약은 똑같이 처방하는 것처럼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한다는 것이다. 어느 도로 모퉁이 에서 하는 교통순경의 단속용지는 똑같은 범칙금이나 위반 사항은 다같은 것이다. 개인의 상대성이나 독자성은 필요가 없다. 인간은 지금 AI시대이니 미디어 시대이니 하지만 모두는 벌써 기계의 하수인이고 기계의 일부분이 된지 오래다. 태어나지 말자 핸드폰을 들고 지내고, 어디를 갈려면 어디로 가야하는 네비게이션 의 지시대로 가고, 음식하나를 먹을려고 하여도 인터넷 이나 기계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어면 먹기조차 힘드는 세상이다. 지금은 생각도 미디어 따라하고 행동도 인터넷따라 하고 다시 미디어에 보고한다. 우린벌써 기계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기계인간이 되어있다.
조상의 경험이나 지혜를 배우고 얻어면서 각자의 사고로 얻어지는 상대성이나 독자성은 지금의 삶에서는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순리대로 사는 것이 정해진 사회의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하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세대가 아나로그를 처음 접할때 우리의 앞선세대인
부모님들은 칼라텔레비젼을 처음접하고
색깔의 시대를 보기전에 돌아가셨다. 그땐 식민지 잔제로 질문은 반항으로 치부되는 무서운 시대였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 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 사실이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변화의 물결은 분,초를 다툰다.
세상은 어떤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라가기도 힘들다. 이시대에 선지자나 경영자들은 변화의 시대를 읽고싶다면 사람들의 '질문' 을 주목하라고 한다. 경영석학 할 그레그슨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이해하는 창이다. " 라고 말했다.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이자 그 방향을 결정짓는 이정표 이고 통찰이라는 것이다.
질문이 바뀌는 순간, 시대의 기류도 바뀐다.
우리의 삶의 여정마다 질문이 바뀌는 것처럼, 훨씬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마주 할때도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처음 그땐 제사장이 지시하지만 지금은 미디어나 경험이 주는 빠른 콘텐츠 가 대세이다. 핸드폰이 ' 제삼의 감정' 이라는 것을 따르지 못하는 지식은 소멸돠고 도퇴되는 것이다. 순리란 따르는 것을 빠르게 알아가는 지혜가 우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옛날보다 자유롭다고 한다. 오래전에는 각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봉건사회 에 살기에 왕, 양반, 중인, 평민, 상놈, 노비등으로 정해진 삶을 살아야 했다고 한다. 사회제도가 봉건사회가 만들어 낸 사회질서의 한부분으로 자신을 인식했으며,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삶의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확신 속에서 공동체적 유대를 형성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런 삶은 개인을 구속하고 억압한다고 한다. 어떤 구원도 없고 오로지 피지배층을 향한 충성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삶을 영위했다고 한다. 현대인은 어떠한가는 스스로 느껴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현대인은 거대한 사회질서나 신분으로 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이며, 독립된 개인이라 자부한다. 현대인은 누구의 강요나 삶의 의미나 목적이나 직업이나 사회적 역량을 정해놓은 것이 없다고 한다. 현대인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어디에 사느냐 하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정해야한다.
그러나, 여기서 현대인을 자신이 내리는 결정이나 삶의 확신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인은 심리적 불안이나 자유를 잃고 무언가 절대적 권위를 갈망하고 이에 복종하고 사는 현대판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현대는 신에 버금가는 것들을 갈구하고 맹신아닌 맹신을 한다. 자유경제라는 허울에 갇혀 명품이나 독점기업의 거대자본에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어간다. 양극화에 갇혀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면서 신세한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을 저당잡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유를 포기하고 절대 권력자를 만들고 한쪽으로 향하고 진정한 삶을 만들고 진정으로 심리적 안정을 원한다고 하는 허울에 갇혀산다. 더 강력한 권력자를 원하고, 누군가를 확대하고 더 나은쪽으로 무조건 가기를 갈망하는 이상한 세상을 만들고 살아갈려고 하는 맹목적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세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허덕거리는지 모른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라 한다. 의식을 통해서 자기 주변의 사물들과 주체ㅡ객체 관계를 형성하고, 이 사물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어떤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분명히 이사람도 인간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의식 하는 주체이다. 그러면 이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사실 이사람 역시 의식의 주체 이지만 나와 이사람과의 관계는 나와 사물들의 관계처럼 주체ㅡ객체 관계라는 것이다. 서로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히는 순간 나의 모든 것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을수 없으며, 타인에게 인정받을려고 사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희곡 '닫힌방 '에서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라고 말했다. 현대는 타인의 시선속으로 들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홀로 살아가는 요즈음 세대는 누군가에게 인정 받기를 갈망한다. 이런 사회는 보편적 공감 가능성에 기준을 형성하고, 이런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면 낙오자라는 각자의 시선에 사는 것이다. 누군가 보기를 바라는 세속적 시선을 만드는 참으로 황당한 자신이 되어간다. 의식어 주체ㅡ객체가 스스로 되는 것이다. 벗어나기가 힘드는 순리가 되어있다. 누가 나를 보는 것도 아닌데 나를 보기를 갈망하고 스스로 도취에 사는 허수아비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보다 나은 쪽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태어나서 동물들은 생존본능으로
보호를 받아야한다. 어미가 없어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 이 위치는 태고적 부터 약한 존재인 인간들이 모여사는 것을 택한 것인지 모른다. 어디나 모이면 상하가 생기고 지도자나 우두머리가 생기는 것이다. 집단이 커질수록 다스리는 것도 힘들다. 좋은 방법은 두려움이나 믿음을 주는 것이 하늘을 이용하고 자연의 신비를 이용하는 것외에는 큰 방법이 없는 원시시대부터 신화를 만들고 신을 만드는 주술사의 위치는 지도자급이다. 인간이 그래서 신을 만들고 신화를 만든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드는 것이다. 어느 종교의 본질은 다 비슷하다. 하느님의 이름만 차이가 나지만 똑같은 것이다. 종교는 일종의 진리라는 허울을 쓰고 독재자 처럼 행세한다. 종교의 지도층은 말그대로 지도층의 지위에서 누릴수 있는 것을 다한다. 어느 사회이고 혁명이나 다른 지도체제를 전복시켜도 똑같은 지도층이 나타난다. 단지 대중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빨리 지도층으로 가는 길은 혁명이고 종교의 탈을 쓰는 것 뿐이다. 신을 믿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불안한 현실을 신에게 의지하는 본능이되어 버린 종교의 선택을 넘은 종교인의 진리라는 허울이다. 기도는 개인이 하지만 신은 인간의 개인사에 영향을 졸수없다. 수많은 신자의 기도를 다 들어줄수 있는 사심私心은 신이 가지는 마음이 아니다. 일부에 기적이니 성은이니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일종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믿음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신의 은총을 받고 안받고는 개인의 일탈이고, 기도자에게 느끼는 정신적 결과는 신비롭든지 마음수양으로 얻은 정신적 승리의 소원성취로 가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한점의 빅뱅으로 우주가 태어나고 수백억년전 우주의 일원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이론일 뿐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는 사고 思考로 수많은 이론이나 학설이 있지만 그것이 맞고 안맞고는 살아가는 존재일뿐 무엇을 택하고 경험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이다. 종교를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일이지만 종교의 나라에 태어나면 문제는 다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을 상상도 안하고 살아가는 환경에 따르는 것이 진리이니까? 신을 만든 존재는 누가 만들었을까?
실존주의란 참으로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는 철학이다. 철학과 심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나는 성찰이다. 한계상황이란 인간이 죽음, 전쟁, 질병 같은 극한의 고통을 마주할때, 비료소 자기실존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초월' 이라 프랭클의 이론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타인이 대신 찻아 줄수 없다는 것이다. 산을 다니는 산꾼들인 우리 자신은 모든 산에서 누가 대신 산을 오르지 않는 것과 같다. 의미는 개인 고유의 내면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오직 내 안에서 발견 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바같에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나 사회의 기준에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 타인의 세계를 세운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상품의 포장지 역활을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이 있어야하고 살아 나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는 의지가 오는 것이다. 고통이란 삶의 의지는 자기의 배를 타고 파도를 넘는자 만이 가지는 순리이다. 존재란 고통을 가진자의 본질이다. "존재란 생각이고, 생각은 의미이고 표헌하는 자신이다." 그것이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 은 인간의 주체는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어며 , 의미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는 그로벌 히트작인 " 나는 뇌가 아니다. " 라는 인간의 정신은 생물학적 기계주의, 물질 정신론 으로 해명할수 없는 의미 파생이 발생하고, 이를 설명하는 과학 논리는 잘못되었다 고한다. 우리는 뇌가 명령하는 일을 무의식으로 하고, 동시에 이를 의식하는 다중성, 다원주의라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은 유기체이고, 명령을 하는 것은 뇌라 한다. 그러면 의식은 무엇인가? 나는 뇌가 되는 것인가?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감각 기능이 무의식으로 느끼며 하는 일들은 뇌가 시키는 나 자신이 하는 일인가? 나는 어느 것이 하나의 나인가? 뇌라는 조직은 여러생각의 연합체로 각각의 부위가 자기의 주장을 펼치는 거대한 토론장, 즉 마음이라 한다. 나라는 것은 여러 생각이라는' 관념의 집합체' 이다. 나라는 것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이다. 어느 것이 나인것 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육체는 까뮈의 이론대로 이방인 이다. 뇌는 하나의 결정체도 아니고 집합물인 것이다. 하나의 행동이 다른 생각의 후회나 결정을 방해 하기도 하는 다중의 나인 것이다. 10대의 나는 어디가고 70대의 나는 오늘도 어제의 나를 찻고, 가지도 않는 내일의 나를 걱정하는 나는 무엇인가? 전부 교체된 뇌세포나 몸이나 어디있는 지도 모르는 생각이 기억을 찻고, 또 다른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고 나라는 것은 물질도 맞고 아니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본래 여행자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상상계(이미지) 안에서 존재할뿐, 현실계 (준재의 본질)가 아니다. 자꾸만 불교의 교리로 가는 것 같은데 삶이란 하나의 나를 찻고 나를 만드는 여행자이다. 여러개의 나를 하나로 만들기가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또 다른 나는 또 다른 나와 날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ᆢᆢ짧게 말해 나는 이런집에 사는 목사는 되지 못하고, 지금처럼 변덕스럽고, 남에게 아무런 페를 끼치지 않는 방랑자가 되고, 결코 목사는 되지 못한 괴팍한 신학자, 악취를 풍기고, 술병뒤에 숨어 사는 미식가, 젊은 사람들에게 집착하거나, 시인에 몰두하거나, 무언극 마임에 골몰하거나 , 향수에 시달려 불안과 슬픔에 시달리는 병약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녹색 대문과 담쟁이덩굴, 예쁜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사택을 밖에서 쳐다보거나,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 혹은 조용하고 영혼이 평안한 집주인을 보고 싶은 갈망에 길에서 창문을 통해 집 안을 들여다보거나, 창문 밖으로 방랑자들을 내다보며 질투와 동경을 느끼는 것이 결국은 마찬가지다. 내가 이 집에 사는 목사가 되거나, 길거리를 떠도는 방랑자가 되든 둘 다 똑같다. 내게 매우 중요한 몇가지를 제외하면 다 마찬가지다. 내가 완전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혀 혹은 발바닥을 통해 깨닫거나, 쾌락 혹은 고통속에 느끼거나, 영혼이 깨어있고, 수백가지의 형태로 수많은 환상 놀이를 그 안에 담을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목사나 방랑자, 요리사나 살인자, 아이나 동물, 심지어 새나 나무,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하고, 원하는 본질적인 모든 것이 언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내가 삶을 '현실' 에 의존한 채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다. ᆢᆢ" 방랑자 시절의 헤세는 목사의 사택 앞에서 지난 어린시절의 신앙과 목사집안의 꿈을 바라보는 사유하는 방랑자의
마음을 그려보는 것은 마치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린 철부지 같은 모습을 그려본다. 모든 순리란 누구나 비슷한 삶을 느끼고 방랑하는 자들이다.
붓다의 마음글중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 해와 달은 네가지 인연을 만날때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구름이 끼거나 , 먼지가 짙거나, 연기가 자욱하거나. 아수라가 삼켜버렸을 때다. 수행자들아, 사람에게도 네가지 번뇌가 마음을 덥으면 깨닫지 못하게 된다. 탐욕이 강할때, 분노하는 마음으로 가득 할때, 사견을 쫏는 어리석음을 가질때, 그리고 자기의 이익에만 매달릴 때이다." 마음을 가다듬기가 참으로 힘든다. 세계는 바다이고 마음은 항상 바닷가에 있는 파도와 같다. 그러나 삶이란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살아가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노자는 " 조용한 것은 조용하게 놓아듈수 있다. 아직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억제하기 쉽다. 약한 것은 부수어 버리기가 쉽다. 사물은 그것이 존재되기 전에 조심하라. 무질서가 되기 전에 질서를 잡아라. 큰 나무도 가늘고 작은 가지가 자란 것이다. 10층 탑도 작은 벽돌들이 쌓인 것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최후까지 최초와 같이 주의깊게 하라. 그 때 비로소 어떠한 일이라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의 구멍을 뚫고 들어올 것들은 항상 기다린다. 온갖 욕심, 온갖 미련, 온갖 음심, 온갖 질투, 그런 것들이 항상 비새는 지붕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늘 순리대로 사는 인간의 틈새를 스며드는 것들을 가릴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비트게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에서 "철학의 올바른 방법이란 본래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말할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 따리서 자연과학의 명제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철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먄 말하는 것,ㅡ그리고 다른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의 명제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어떤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라고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엄밀히 학문이라는 것은 칭해진 현상학 조차도 날카로운 지성으로 언어의 한계로 보아야 한다 는 것이다. 과거의 철학에서도 모두 언어 게임에 불과하다 는 이론이다.
" 나의 이해하는 독자는 나의 책을 빠져나가 그 위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그 무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방법을 통해 나의 책은 해명을 시도합니다. 독자는 이 책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때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라는 비트게슈타인의 "말하자면 독자는 사다리를 다 올라간 후에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합니다 " 라고 말할수 있다. 세상은 언어의 한계일 뿐이다.
' 致虛極 守靜篤 치하극 수정독 ' 은 "비어있음이 극치에 이르니, 고요함을 진실하게 지킨다" .는 노자의 도덕경의 16장의 첫소절이다. '知常日明 지상왈명' 이란 " 평상심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는 것은 모든 것은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만고의진리이다. 빈마음으로 돌아가는 평상심이 밝은 마음이라 한다. 자신의 탐진치 삼독 三毒을 낱낱이 살펴보는 것이 비어있음의 밝음이다. 자기 스스로 만물의 비어있음을 비추어 볼수있다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된다. 자신의 허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타고난 심성을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한다. 육근이 일으키는 작용으로 만물은 변화무쌍하여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 그것으로 우리 자신의 타고난 천성을 잃어버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이 극에 이른다. 그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고,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도리어 고통과 괴로움이다. 미혹한 마음이 움직여 결국은 재난을 피하기가 어렵다. 현대는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우선이다. 순간의 쾌락을 즐기는 것이 미혹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므로, 오히려 뒤에 오는 고통을 감수하는 악순환이다. 이런 것들을 비우는 평상심이 만물이 공평하고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걸림이 없으면,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이다. 무위자연은 하늘과 같다. 하늘의 도는 영원불멸이다. 영원하는 것은 빈 마음이 평상심이 되어야 한다. 하늘은 늘 텅 비어있다.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의 과실을 아는데 충분할 뿐이고, 자신의 과실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허물을 모르고 타인의 허물을 탓한다면 이보다 더한 위태로움은 없을 것이다. 하늘이 무어라 하는가? 땅이 하늘에 무어라 하는가? 늘 평상심은 무위자연 뿐이다.
이 좋은 계절의 여왕의 날에 만물이 화창한데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순리인가?
인생은 고통만 있을 뿐이고, 행복은 늘 바라는 허울 뿐이다. 행복을 가진다면 그날은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릴 뿐이다.
알고도 행동할수 없다면 모르는 것이 나을수 있다. 그것은 어른이 되는 바보니까.
첫댓글 큰행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