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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을 준비하면서(5)>
성령충만한 사도 바울을 보면서
2024년 5월 19일 / 사도행전 16:6-40
신앙생활 / 예수님 은혜로 믿는 이가 구원받아 천국 영생을 누림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천국 백성답게 변화하고 자라가는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극적으로 잘 보여준 분이 바울 사도이다. 만일 그냥 사울로 살았다면,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요 엄격한 바리새인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 세상 복은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영접함으로, 믿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음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 가장 귀중함을 알았기에, 스스로 온갖 세상 영예를 배설물같이 여긴 것이다.
카톡에 이런 좋은 글들이 있어 적어본다.
【믿음이란? / 우리는 어떤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믿음이란 자신이 어디로 이끌리는지 알지 못하지만, 인도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오스왈드 챔버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당신의 신실함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심을 알고 확신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조급하지 않고 느긋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사실을 믿고 기다립니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지금까지 축복해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므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 순종에 대해 크고 강렬한 열정, 이것이 참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입니다. - 존 맥아더 -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불순종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힘으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지만 순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시며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순종의 절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렇게 순종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므로 경건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뜻을 따른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다. 성령의 사람을 어떤 은사 체험을 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란 자기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시작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사도 바울을 소개하였다. 사도 바울의 삶을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삶,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을 빼고는 사도 바울의 삶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성령의 사람인 사도 바울의 삶을 네 가지로 나누어 본다.
1. 하나님께 압도당한 사람
성령의 사람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압도당한 사람’이다. ‘압도당하다’라는 말이 성령의 사람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일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삶에 찾아오셔서 그를 압도하셨다. 바울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장악하셨다.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그의 모든 것을 바꾸셨다.
바울은 명문 가문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하고, 젊은 시절 산헤드린 공회원이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바울은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울의 과거인 사울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울을 찾아가셔서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압도하셨다. 그가 추구하던 모든 것을 뒤엎으셨다. 자기중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래서 사울이 소중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셨다.
■ ♬ ➊ 깨지지 못한 나의 심령 당신 말씀 앞에선 무릎을 꿇었어요 무릎을 꿇었어요 허물과 죄악으로 얼룩진 지난날 주님의 보혈로써 옛사람을 벗었네
➋ 변하지 못한 나의 마음 당신 사랑 앞에선 두 손을 들었어요 두 손을 들었어요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 찬 지난날 주님의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었네
➌ 교만 가득 찬 나의 마음 당신 은혜받고선 성령으로 충만하니 겸손으로 변했네
오 할렐루야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오 할렐루야 아멘 주님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자기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셨다. 그래서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압도하시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본문이 바로 그런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선교 계획을 세운다.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그리고 다시 비두니아로 가는 계획이다. 지금의 터키 지역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가로막는 일이 일어났다(행 16:7), 그들이 무시아 지경 가까이 이르러 북쪽 비두니아 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또다시 예수의 영이 허락하시지 않았다. 바울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았다(행 16:9). 사람 하나가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았다.
이에 바울과 그의 일행은 곧 마게도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행 16:10). 하나님께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자기네들을 보내시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환상과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시아 선교가 아니라 마케도냐 즉 그리스 선교, 유럽선교를 시작하라는 음성이다.
이것이 무엇에 대한 말씀들인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요청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요청하셨다.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이 있다. 맥스 루카도는 ‘하나님이 정말 당신의 하나님이시냐?’는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삶에 중심에 그분이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살아온 자기중심의 삶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 목표, 내 자랑, 자기 보호로 살아간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살아간다. 자기 중심의 삶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하셨는데 … . 요즘에도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다. 아직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어제와는 다른 성장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맥스 루카도는 ‘자기중심의 삶 대신에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시작하라’ 즉 삶의 중심에서 내려와서 그 대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삶을 시작해 보라고 하였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있다.
1) 그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2) 그때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시작하신다.
3) 그때부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돕기를 시작하신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
바울을 성령의 사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계획을 막아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한다.
10절 / 우리는 곧 마게도냐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우리를 보내시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자기중심, 자기 계획, 자기 목표를 내려놓았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계획 앞에 순종하였다. 그래서 마케도냐로 떠났다. 마케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른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 바울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는 방면으로 쓰시기 시작하셨다. 바울이 마케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자 두 가지 일이 바울에게 일어났다.
➊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인 루디아라는 여자가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사건이다
15절 / 루디아가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침례를 받고나서 말하였다. `만일 저를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그 여자가 무척 간곡하게 청하였으므로 우리는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한 사람이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만약 바울의 계획대로 했다면 이런 일이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자기중심과 계획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이런 일이라고 알려주신 것이다. 내 힘과 노력으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일어나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 계획대로 따라갔더니 그 어려운 일이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이 이렇다는 것이다.
➋ 그런데 다른 쓰임 아니 뜻밖에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 16:16-18 /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가에 있는 기도처로 가다가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힌 나이 어린 여종 하나를 만났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다. 17) 그런데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하나님의 종이신 이분들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길을 알려 주러 오셨다!’ 하고 큰소리로 외쳐 댔다. 18) 그 여자가 매일같이 이렇게 따라다니며 소리 지르자 바울은 더 참지 못하고 그 여자에게 붙어 있는 악령에게 호통을 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령한다. 이 여자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그 순간에 악령이 나가 버렸다.
사도 바울은 악령으로부터 어린 여종을 자유롭게 하여 하나님을 믿게끔 연결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소원하는 놀라운 일이었다.
▶ 그러나 여종의 점치는 것으로 이익을 얻었던 주인들이 바울을 송사하여 감옥에 가두는 일이 일어났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을 당하게 되었다(행 16:19-24).
여기에서 신앙이 있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매도 맞아 고통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자신에게 무슨 문제점이 있는가를 찾았을 것이다. 추측하기 어려운 문제점이지만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찾기를 시작했다. 문제점을 찾지는 못했을지라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앞으로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갇힌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하며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 이럴 때 우리가 부를 찬송 중 하나이다. 549장
➊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➋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 1704년 슈몰크 목사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의 고통으로 실의에 빠져있는 신자들을 열심히 심방하면서 돌보았다. 전쟁의 여파로 36개 마을의 교회들을 돌보아야 했으므로, 한 번 심방을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 일쑤였고, 집에는 어린아이들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심방을 마치고 며칠 만에 돌아와 보니, 화재로 집이 완전히 불에 타 없어지고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슈몰크 목사는 열심히 두 아들을 찾았다. 열심히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잿더미를 헤치니 거기에 두 형제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불에 타 죽어있었다. 한동안 정신을 잃고 망연자실하였으나, 곧 새까맣게 탄 두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슈몰크 목사는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참을 눈물로 울부짖다가,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기도를 시로 옮겨 놓은 것이 바로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이다. 슈몰크 목사는 두 아들의 죽음 후에도 변함없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흩어져 있는 교구들을 목회하다가, 1730년 어느 주일 과로로 쓰러졌고, 곧 이어 뇌졸중으로 한 동안 자리에 누워있어야 했다. 회복된 후에도 오른손과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뇌졸중이 재발했다. 또한 백내장으로 실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중에도 몸을 지팡이에 의지해서 먼 길을 심방하러 다녔다. 그런 그의 심방에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해서 오히려 교회가 부흥했다고 한다.
25절 /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고 있을 때였다.
만약 자기 계획대로 하던 일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어떠했을까? 좌절하지 않았을까? 후회하지 않았을까? 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른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하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쓰시기를 시작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서시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환경과 사람에게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더욱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히려 고난 때문에 써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려 죄수들이 도망치는 일이 일어나자 감옥 간수가 자다가 놀라 자결을 하려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 유명한 고백이 나오게 되었다.
행 16:30-32 / 그리고 두 사람을 밖으로 인도해 나와서 ‘두 분 선생님, 어떻게 하면 저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두 사람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온 가족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2)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간수와 그 온 집안 식구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고난처럼 보이는 일, 아니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신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역경이 변하여 오히려 기적이 되는 시간을 만난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고 있는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4. 겸손+온유한 사람=성령충만한 사람
♬ 김석균의 겸손(장윤영) / 1. 슬픔속에서도 울지 않는 것 억울해서 울지 않는 것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도 걱정하지 않는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도 사랑하며 품어주는 것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용서하여 주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2. 참을 수 없어도 화내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 감사할 수 없는 그런 조건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것 칭찬이나 비난 가운데서도 침묵하며 사랑하는 것 말씀 순종하기 어려울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어떠한 자기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겸손은 겉사람이 드러나지 않고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 어떠한 자기 주장도 버리고 오직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며 내가 강한 것이 아니라 주가 강함을 보여줌이 진정한 겸손.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성령충만한 사도 바울로 변해 있었다. 평상시 예수님을 뵈온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사실은 성령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 바울의 행 16장에서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생전에 하셨던 말씀을 가지고 ‘성령충만한 사람은 겸손+온유한 사람’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즉 성령충만한 사람은 고난과 무서운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아멘’했고, 불평불만과 더불어 의심조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분주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어떻게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듣고 있는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릴 수가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큰 지진이 일어나듯 감옥이 밑바닥부터 흔들리더니 문들이 모두 열렸으며, 죄수들을 묶어 두었던 쇠사슬도 다 풀릴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심한 매를 맞고, 발이 착고에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르심을 받았고, 부르신 목적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자주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평상시 묵상하였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고(사 43:7),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기 위함이다(사 43:21)’라고 말씀하셨음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생활을 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가 서로 남을 도우면서 살도록 새로운 일을 계획하신 것입니다.’(엡 2:10)라고 선한 일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신앙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이 은혜를 경험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면 이 목적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는 줄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피조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운행하심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분명한 창조 목적에 대한 설정이 중요하다.
바울과 같이 마음에 담아야 할 구절이 있다. 유난히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귀한 충고로 오늘날에도 귀에 담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고전 10:31-33 / …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또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32) 여러분은 상대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또는 그리스도인이든 간에 아무에게도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3)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속도보다 먼저 택해야 할 중요한 것이 방향이다. / 전도를 강조하면서 교회에 참여하는 숫자에 연연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면 아니 그렇게 살기를 위해서 힘쓴다면 멀지 않은 날에 예수님 시대처럼 스불론 지역과 납달리 지역 곧 지중해 연안의 도로 지역과 요단강 동부의 지역과 이방인들이 사는 갈릴리 지역이 영광에 가득 찰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다. 그 생명의 빛이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서 캄캄한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것이다(마 4:15-16).
작은 겨자씨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자라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것과 같이 미력한 우리를 통해서도 많은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한국교인들은 비교적 주일 성수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중 성수일 것이다. 이는 주일에 받은 은혜로 주중에 그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두운 세상이 교회를 향해 비난이 많아진 것은 기독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일에는 게으르기 때문이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같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들이 된다면 이 세상도 환해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래 목적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와 찬송을 한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참으로 많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아니 이 말씀을 작성하는 나에게 하나님께 겸손+온유=성령충만이라는 공식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평범하게 알고 있었던 마태복음 11:25-30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쉼’보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안식이 ‘빌립보 감옥에 매를 맞고 갇혀 있는 바울에게 주어졌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3년을 배운 제자들과 어깨를 같이 할 수 있다(마 11:25-30).
4. 하나님의 결론을 만나는 사람
성령의 사람은 자기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만나고, 고난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이 쓰시는 일을 경험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결론을 만나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시작하고 만들어 가시고 결론을 내시는 일이 있다. 성령의 사람은 바로 그런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이라고 하신다. 대표적으로 예를 든다면 노아, 아브라함, 다윗 … 을 들 수 있다. 매우 아름다운 하나님의 결론에 대한 말씀이 있다.
창 50:20 / 당신들은 나를 해아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결론이 있다는 요셉의 고백이다. 요셉은 이 고백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한다. 고난만이 가득한 것 같은 인생이었지만 하나님의 결론은 달랐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을 바꾸셔서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 고백으로 형제들을 용서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선교를 초월하여 유럽 선교를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하나님의 결론을 만났다. 루디아를 통해, 감옥 간수를 통해 빌립보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게 하셨다. 또한 그 빌립보 교회를 통해 앞으로 일어날 유럽 선교를 지원하는 교회가 되게 하셨다.
■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당할 시련을 허락하신다. 신앙생활을 처음하는 분에게는 시련이 거의 없다. 기도하면 응답도 바로 되고,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해 갈수록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된다. 신앙이 어릴 때는 작은 일만 생겨도 시험에 들고 넘어진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통을 겪고 나면 그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인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잠적(潛水)한다. 이때 우리는 시험에 빠진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며 대신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에는 항상 회개와 순종의 모습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내 기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test)했지만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리아 산을 올라가면서 아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제사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요?’ 이때 아브라함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단다!’ 하나님을 신뢰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히 11:19 / 만일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이삭이 살아 있는 그대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은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처럼 내면에 숨겨진 ‘쓴 뿌리 기대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창조적 기대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여 기도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믿음이 성숙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나의 계획으로 시작했더라면 아니 나의 생각대로 결론을 맺으려 한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인간의 방식으로 했더라면 이런 결론에 이를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오늘도 필요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결론으로 부르고 계신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축복된 삶이 열려지기를 …. 늘 해야 할 기도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힘써 믿음의 경주를 하시기를 ….
마 6:9-10, 13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