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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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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갈라3,1-5)
1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2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4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5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복음<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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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073 2026.10.07 21:01 2026년 10월 8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5-13
어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청할지(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어떻게 청할지’를 가르치십니다. 한밤중에 벗을 찾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손님에게 내놓을 빵이 없어, 문을 두드립니다. 안에서는 “나를 괴롭히지 말게” 하며 거절합니다. 문은 닫혔고, 아이들은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물러서지 않고 ‘줄곧 졸라 댑니다.’ 결국 벗은 일어나 ‘필요한 만큼 다’ 내어 줍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조른 것이 ‘자기를 위한 빵’이 아니라 ‘찾아온 벗을 위한 빵’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는 저 유명한 세 마디가 이어집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모두 ‘한 번’이 아니라 ‘계속’을 뜻하는 말입니다. 기도는 한 번 외치고 마는 주문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이어 가는 ‘성실한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색하시어 조르면 마지못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도 제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실 리 없습니다. 끈질긴 기도는 하느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꿉니다.’ 두드리는 동안 우리 마음이 넓어져, 마침내 받을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결말이 옵니다. “아버지께서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빵을 청하는데,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즐겨 말했듯,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때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듯 보여도, 그분은 더 깊은 선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이 성월의 심장입니다. 우리가 성실·온유·절제의 열매를 애써 ‘쥐어짜려’ 하지만, 열매는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갈라 5,22). 그러니 열매를 얻는 길은 단 하나 ― 끈질기게 ‘성령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끈질김 자체가 이미 ‘성실’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선행을 하는 데에 지치지 마십시오”(2테살 3장).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한 번 청하고 응답이 없다고 쉬 포기하지 않는가? 나는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벗을 위해’ 문을 두드리는가? 나는 하느님을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로 믿는가? 나는 무엇보다 ‘성령’을 청하고 있는가?
주님, 포기하지 않고 날마다 다시 두드리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좋은 뜻을 믿게 하시고, 무엇보다 성령을 청하여 그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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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menus/0?t=1791371058986 하느님의 숨 2026.10.07. 15:51
창조, 우리의 형제자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모든 피조물은 장엄한 교향곡을 이루며, 하느님께서는 그 지휘자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창조, 우리의 형제자매! 2026년 10월 7일 수요일 브라질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레오나르 보프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창조 세계의 모든 요소를 형제자매로 인식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프란치스코]는 '바위'라 불리신 주님을 기억하며 바위 위를 경외심으로 걸었고,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도록 길 위의 달팽이를 옮겨 주었으며, 겨울에는 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지 않도록 꿀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 친교는 인간을 넘어 우주적 차원에까지 미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이는 우리가 비판해 온 근대적 태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근대적 태도는 만물을 지배하고 소유하기 위해 그 위에 군림하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길은 피조물과 함께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로서 한 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근심과 고통조차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자매'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마저도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매로 맞이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칸적 우주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며, 사물들은 단순히 인간의 소유욕에 내맡겨져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연결 안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장엄한 교향곡을 이루며, 하느님께서 그 지휘자이십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고 인격적이며, 프란치스코는 직관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게 된 진리를 이미 신비적으로 체험했습니다. 곧 모든 생명은 거의 같은 '생명의 코드'를 지니기에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혈연적 친교를 신비적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부모의 지붕 아래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인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며, 가족 안에서의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1] 엘리자베스 존슨 수녀는 우리가 모든 창조와의 친교를 자각할 때, 그것이 '깊은 육화(Deep Incarnation)'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한 인간으로 육화하신 그 육신은, 지상에서 진화하는 생명의 나무의 일부이며, 동시에 광대한 우주의 몸의 일부입니다…. 이 넓은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덴마크의 신학자 닐스 그레거슨은 "깊은 육화(Deep Incarnation)"라는 특별한 용어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급진적인 도달을, 곧 인간의 육신을 통해 생명의 성장과 소멸이 얽혀 있는 유기적 생명의 그물망 깊숙이, 그리고 생명을 낳고 지탱하는 진화하는 자연의 더 넓은 과정 속으로까지 스며드는 신비를 가리키는 신학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더 넓은 인간 공동체의 일부이셨고, 다른 피조물과 함께 생명의 막을 공유하며, 모두가 우주의 물질로 빚어졌고 죽음과 해체(disintegration)에 취약한 존재였습니다…. 깊은 육화는 요한 복음이 말하는 바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이 되신 육신[sarx, 곧 물질]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종 안의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을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진화하는 생물학적 세계와 그들이 이루어진 우주의 먼지와도 연결시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우리가 땅과 동물의 지혜를 자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결코 덜 소중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함께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리가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자연 세계와 영원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동물과 나무, 그리고 모든 자연 안에서 발견하는 지혜는 언제나 제 집이 되어 줍니다. —Nancy B. Reference [1] Leonardo Boff, Cry of the Earth, Cry of the Poor, Phillip Berryman, trans. (Orbis Books, 2002), 210–211. [2] Elizabeth Johnson, Creation and the Cross: The Mercy of God for a Planet in Peril (Orbis Books, 2018), 184–18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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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8 03:33
-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엇갈림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가지고 보면 누구에게 무엇을 청하라는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제 하신 말씀과 뒤에 나온 말씀을 놓고 볼 때 아버지께 다시 말해 하늘의 아버지께 청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청하라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고, 필요한 것이 좋은 것이라면 주실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나쁜 것이면 아버지는 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이런 의문을 가져 봄도 좋을 것입니다. 청하면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하시는데 청하지 않으면 안 주실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것은 괜히 주님 말씀에 시비 걸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왜 청하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왜 청해야 하는지 그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입니다.
청하지 않으면 뭘 원하는지 아버지가 모르기 때문에, 또는 청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을 아버지이기 때문에 청하라시는 것입니까?
복음의 다른 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선 이미 다 아신다고 하셨고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 인간 아버지도 좋은 것을 줄 줄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아버지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으시겠느냐? 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우리 아비보다도 그리고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시고 청하지 않아도 주실 참으로 좋으신 분이신데 왜?
왜 청해야 합니까?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청하지 않으면 안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청하지 않아도 주시지만 우리는 청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기와 엄마의 경우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가 청하지 않아도 엄마는 밥을 주지요. 그러나 아기는 안 먹겠다고 하곤 하잖아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은총으로 곧 거저 주고자 하십니까?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자라고 하는 우리 가운데서도 그런 은총은 필요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기 보다 내 힘으로 소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끝에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고 주님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최고선이신 당신 성령을 주시고자 하지만 우린 그것 말고 다른 걸 달라고 하거나 아예 아무것도 청하지 않곤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종종 엇갈림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시겠다는 하느님과 아무 필요 없다는 우리, 최고선을 주시겠다는 하느님과 다른 것을 달라는 우리, 더 좋은 때 주시겠다는 하느님과 지금 당장 달라는 우리 사이의 엇갈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엇갈림이 없지 않은지, 어떤 엇갈림이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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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1?boardtype=L&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8. 04:56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맺음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는 기도의 따뜻한 이미지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주는 친구를 하느님처럼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마지못해 응답하는 친구에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대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긍정적인 요점은 우리가 담대하고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머리를 숙이고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없는 감정을 흉내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진실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면 됩니다. 마치 창문을 때때로 닦아내야 하듯, 기도 생활에서도 위선과 허식을 치워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교 전통은 기도가 언제나 응답된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나 기대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375–444)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분별 없이, 참으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기도합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그대로 허락하신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분별한 욕망은 영혼을 죽음과 지옥의 올가미로 몰아넣습니다. 이런 것을 청할 때 우리는 결코 그것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뒤돌아보면 우리는 종종 그 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병든 가족이나 친구의 회복을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더욱 깊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시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는가?" 그때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확신뿐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 생명과 죽음을 초월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저도 오래 전에 제 조카 하나가 어린 나이에 혈액암으로 투병하고 있을 때 제가 가족들과 함께 9일 기도를 바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 아이를 데려가시고자 마음먹으셨다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헛일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는 얼마 후에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언가를 미리 정해 놓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강조하여 말씀하시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즉 성령을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우리의 관계성은 물론 우리 서로의 관계성에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하느님은 친교와 통교, 일치, 관계성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핵심은 단순히 무언가를 청해서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맺음에 그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만나 우리의 존재 자체를 나누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사람이 '나'와의 진정한 관계 안에서 머물며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기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그 상대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지요?! 하느님께서 우리 관계성의 원천이라면 분명히 하느님 역시 우리처럼 당신이 정말로 사랑하시는 우리와의 진정한 만남과 사귐을 원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의 뜻 안에서 위로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위로'는 단순한 안락이나 기분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영어에서 "위로"(compfort)라는 단어는 라틴어 confortare(함께 강하게 하다, 힘을 북돋우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전에 알지 못했던 힘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까지는 없었던 힘을 바로 그때 주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내 존재를 나누고 사랑하며 용서하고 치유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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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8.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정무 바올로 수사님.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0?referrerAllArticles=true 2026.10.07. 21:45
사진묵상(291) 성덕聖德,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덕聖德,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덕은타인을 배려하는 작은 마음,내 행동이 아무리 정당할지라도멈추어 돌아설 줄 아는 여유다. 수도원의 행사를 앞둔 어느 늦은 밤,신부님의 김치 담그는 일을 도운 뒤 야외 수도가에서 호스로 대야를 씻으려 했다. “안쪽 싱크대에서 씻으면 좋겠어요.” 낮고 정결한 수사 신부님의 한마디. 시계를 보니 밤 10시. 이미 침묵과 기도로 들어간 분들,새벽을 위해 잠자리에 든 이들의 고요가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 그렇구나. 내게는 그저 청소였지만 누군가에게는소중한 평화를 깨뜨리는 소음이었겠구나. 성덕이 어찌 거창한 데에만 있으랴. 나의 맞음보다 타인의 평화를 먼저 떠올리는 것. 내가 옳다는 고집 하나를 벗을 위해, 그리스도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는 것. 그날 밤,나는 대야보다 먼저 내 슬픈 고집 하나를 씻어내고 있었다. 성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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