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실업, 그 탈출구는 경주(慶州)에 있다
실업이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최근의 대규모 청년실업은
단순한 경제적 불황 때문만이 아닌 듯하다.
농업과 공업이 고도로 기계화되며서 더욱더 일자리가 사라진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의 황폐화를 문제시하며 귀농자금까지 지원하던
정부가 이제는 이농(離農)을 방관하고 소수에 의한 대규모 영농을 권장한다.
공장의 경우 컨베어벨트와 로봇만 분주하게 움직일뿐 사람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이렇게 의식주를 생산하는 농공업 분야, 즉 1차 산업과 2차 산업에 종사하는 노
동인구의 수가 감소하는 것은 그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으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인 3차
산업에서 요구하는 인력 역시 점차 감소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몇 년 전부터 급속도로 개발, 보급된 정보통신기술에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휴대폰이라는 정보통신기술이 온 나라를 그물 망처럼 덮어감
과 함게 생산물을 관리하고 유통시키며 판매하는 서비스 산업의 많은 일자리들이
소리없이 증발해버렸다. 경제활동을 통해 과거 이상의 부가 산출되지만, 과거보
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 부의 창출에 참여할 수 있기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다.
빈부의 차가 어느 한계를 넘을 경우 사회 전체가 불안해지며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일자리를 개발함으로써 부가 고르게
분배되도록 만드는 일은 각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이룩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막막하다.
농업분야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과거의 집약농(集約農)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공업분야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과거의 수공업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3차 산업 분야의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정보통신기술의 보급을 중단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문화창출'에 있다. 농공업의 기계화와 정보통신기술의 보급으로 인해,
소수의 인력만으로도 우리 국민 전체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뒷받침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실업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서는 의식주와 무관한 문화적 직업들을 수없이 창출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이버 공간 속의 아마타 산업, 이벤트 산업, 발 마사지 등
과거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업종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머리염색, 다도, 영화 산업, 공연예술, 아로마 산업, 캐릭터와 액세서리 디자인
등과 같은 이런 것들은 우리의 생존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유명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다고 해서 발에 흙이 덜 묻는 것도 아니고, 시원하기
위해서 청바지를 찢어 입는 것도 아니며, 비산 값의 헤이즐넷 커피를 마셨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는 우리의 동물적 생존과 무관한 가상(暇想)
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취향에 대해
'사치'와 '허영'이라는 낙인을 찍은 후 비판하고 훈계하며 거부해 왔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한 대량실업과 그로 인해 야기될
사회적 혼란이 눈으로 불 보듯 뻔한 지금 과거의 가치관만 고수할 수는 없다.
정보통신혁명과 보조를 맞추어, 우리의 인생관과 가치관에도 혁명적 변화가
와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창출될 다종다양한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수용하고 즐기는 자세를 우리 모두가 갖추게 될 때, 실업의 문제 역시 서서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남는다.
도대체 어떤 문화를 창출하면 좋을 것인가? 어떤 문화적 직업을 개발하면
좋을가? 그 해답은 바로 이곳 경주에 있다. 새롭게 창출될 문화산업의 무궁무진
한 토대가 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도시가
바로 이곳 경주이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문화산업만으로 살림을 꾸려 왔던
도시가 이곳 경주이기 때문이며, 새로운 문화산업의 창출을 위해 항상 고민해
왔던 사람들이 바로 이곳 경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경주가 문화산업, 가상산업의 창출을 위한 시범도시로 되어 성공적으로
운영될 때, 우리의 미래에 대한 모법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 도시 경주에 청년실업의 탈출구가 있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