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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3편의 일화는 정토영험록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부사의한 깊은 뜻과 가피는 세세생생을 두고 이어지며, 중생이 기복에 따라 부처님을 멀리하지 부처님께서는 결코 한시도 중생을 멀리하시지 않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행생활을 하면서도 눈물 흘리는 일이 계속될 때에 큰 힘이 되어주는 글들입니다.
《제 1편 : 부처님의 영험을 입고 태어난 대각국사》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고려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스님은 1055년(문종 9) 9월 28일, 고려 제11대 문종(文宗) 임금과 인예왕후(仁睿王后) 사이에서 넷째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하여 잠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젖을 먹여도 울고 얼러도 울고, 도무지 울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왕자의 탄생을 기뻐하기도 전에 왕실은 근심에 휩싸였고, 마침내 모진 병을 앓는 것이 아닌가 하여 시의(侍醫)에게 진찰토록 하였습니다.
"대왕마마, 아무리 살펴보아도 왕자께서 우는 까닭을 알 길이 없습니다. 하오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왕자님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종과 왕비는 더욱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목어(木魚) 소리를 듣기만 하면 왕자가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저 목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보도록 해라."
이윽고 어명을 받은 두 관리는 목어 소리가 들려오는 서쪽을 향해 길을 떠났고, 서해 바닷가에 이르자 배를 타고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중국 항주(杭州)의 경호(鏡湖)에 이르렀습니다.
그 호숫가에는 절이 있었고, 목어 소리는 법당 안에서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관리는 목어를 치며 염불하는 스님께 찾아온 까닭을 말하고, 고려로 함께 가서 왕자의 병을 고쳐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오. 어디 함께 가서 봅시다."
스님은 흔쾌히 허락을 하고, 고려로 와서 왕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왕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스님이 두 손을 모으고 정중히 절을 하자, 왕자는 울음을 뚝 그치고 방긋방긋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종은 스님에게 치하했습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왕자가 태어난 이후로 아직까지 왼손을 펴지 않고 있습니다. 억지로 펴 보기도 하였으나 도무지 펼 재간이 없습니다."
"소승이 한번 펴 보겠습니다."
천천히 왕자에게 다가간 스님이 살며시 왕자의 왼손을 잡고 몇 번 쓰다듬자 왕자는 손을 활짝 펼쳤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조그마한 손바닥에는 '불무령(佛無靈: 부처님은 신령스럽지 않다)'이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씨를 보자마자 중국에서 온 승려는 왕자 앞에 꿇어앉아 흐느껴 울면서 소리쳤습니다.
"스님, 우리 스님!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문종 임금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입니다. 저의 스승님께서 환생(還生)하시어 왕자님이 되셨으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저에게는 존경하고 따르던 은사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가마를 메고 다니던 가마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검소하여 번 돈의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반드시 우물에 던져 넣어 저축을 했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자 우물은 돈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평소 불교를 숭상하던 그분은 경호 호숫가에 절을 짓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덕이 높고 불심이 아주 깊어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저도 그분을 흠모하여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스님은 절을 짓고 목어를 두드리며 염불정진만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1년이 지나자 앉은뱅이가 되었고, 2년이 지나자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3년이 되던 날, 벼락에 맞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기가 막혔습니다.
'불심이 깊고 염불정진을 열심히 하신 스승님을 이토록 허무하게 돌아가시게 하다니! 부처님의 영험은 없는 것이 아닌가?' 저는 허무한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은사스님의 왼쪽 손바닥에 '불무령(佛無靈)'이라는 글씨를 새긴 다음 장례를 치렀습니다.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이었습니다.
"그후에도 저는 은사스님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길이 없어, 날마다 그분이 생전에 쓰시던 목어를 두드리며 명복을 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사스님이 바다 건너 고려 땅에서 왕자의 몸으로 환생하셨으니.... 이제야 부처님의 참뜻을 알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문종은 몹시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불무령이 아니라 불유령(佛有靈: 부처님은 신령스럽다)이구려. 그 스님이 갖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영험이 아니겠소? 삼생(三生)에 걸쳐 받아야 할 전생의 죄값을 3년 만에 모두 받았으니 말이오. 이제 왕자가 모든 죄를 씻고 새롭게 태어났으니 틀림없이 이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하게 될 것이오."
이 문종의 예언처럼 뒷날 왕자는 출가하여 남달리 불도를 닦았고, 마침내 천태종(天台宗)을 세워 고려에 새로운 불교를 꽃피웠습니다.
《제 2편: 시운선사의 참회》
묘향산 염선봉 절벽 위의 조그마한 암자 상원암(上元庵)에는 시운선사(時雲禪師)와 혜성(慧成)이라는 어린 동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시운선사와 절친한 친구의 아들인 혜성의 본명은 최치록(崔致祿)으로, 갓난 아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스님을 따라와서 이 암자에 살게 된 것입니다.
시운선사는 "내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 달라."는 친구의 유언대로 혜성이에게 정성껏 글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혜성이의 나이 스물에 이르자 혜성이의 장원급제를 위한 천일 기도를 남몰래 시작하였고, 천일 기도가 끝나는 날 혜성이를 불렀습니다.
"혜성아. 이제 속세로 내려가서 과거를 보도록 하여라."
"아니되옵니다. 스님. 저는 아직 공부가 미흡할 뿐 아니라 스님을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스님. 조금만 더 있게 해주십시오."
"장원급제하여 백성들을 잘 보살피는 것도 부처님과 나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 이제 때가 되었느니라. 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내려가도록 하여라."
스님의 단호한 태도에 혜성은 더 이상 보채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스님. 부디 만수무강하옵소서."
큰 절을 올리고 떠나가는 혜성의 뒷모습을 보며 시운스님은 끝없이 축원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부디 혜성이가 입신양명하도록 은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느덧 해가 바뀌어 화창한 봄날이 돌아오자, 시운스님은 묘향산 밑의 안주(安州)로 내려가 탁발을 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돌면서 적지 않은 공양미를 시주받은 스님은 임자를 향해 발길을 돌리다가 몇 가지 물건을 사기 위해 장터로 갔습니다.
스님이 막 장터로 들어섰을 때, 젊은 거지 하나가 장삼자락을 잡고 애처롭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한푼만 보태 주십시오. 며칠을 굶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시운스님은 엽전 몇 닢을 꺼내어 가엾은 거지의 손에 쥐어 주다가, 문득 거지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니, 너는 혜성이 아니냐?"
"앗. 시운스님!"
"그렇게도 오랫동안 부처님께 빌었건만,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거지 신세라 말이냐?"
시운스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습니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기구한 운명과 처참한 현실에 대한 저주와 분노가 부처님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습니다.
스님은 몸을 돌려 상원암으로 향했습니다. 백여 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한달음에 뛰어올라온 스님은 칼을 집어 법당으로 달려들어 갔습니다.
"이 허수아비 부처야! 그렇게도 사람을 속일 수 있단 말이냐? 에잇!"
스님의 손에 들린 칼은 쇠로 만든 부처님의 복부로 향했습니다.
"찡-."
칼은 부처님의 배에 깊이 꽂혔고, 실성한 듯 시운스님은 절을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방방곡곡을 돌면서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저주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언 3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운스님의 발걸음은 묘향산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상원암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아, 부처님의 배에 꽂은 칼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스님의 발길은 저절로 상원암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암자에 도착하여 법당 문을 열자, 배에 칼을 꽂은 부처님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깊이 죄의식을 느낀 시운스님은 먼저 부처님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드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들어 갈 때는 그토록 쉽게 들어갔던 칼이 아무리 힘을 써도 뽑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꽂힌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포기하고 법당 앞뜰에 앉아 옛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산 아래에서 요란한 풍악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귀를 의심하여 아래로 내려다 보았더니, 여러 관속과 하인들을 거느린 행렬이 암자를 향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 마당이 요란해지더니 젊은 관속 하나가 소리쳤습니다.
"안주 목사 행차시오."
할 수 없이 시운스님은 목사의 행차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가마에서 내린 안주 목사가 스님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안주 목사 최치록이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 혜성아! 네가 틀림없는 혜성이렷다?"
스님과 안주 목사가 된 혜성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곧이어 혜성은 그때 암자를 떠난 직후 몹쓸 병에 걸려 고생을 하던 중 시장에서 스님을 만났다는 것과, 그뒤 병이 나아 과거에 급제하고 안주 목사에 제수되어 가장 먼저 스님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잠시 후 혜성은 시운스님을 모시고 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합장 배례한 후, 부처님께로 다가가서 배에 꽂힌 칼을 한 손으로 쉽게 뽑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님, 당돌한 소행을 용서하옵소서. 실은 어젯밤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칼을 빼도록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뽑은 칼을 시운스님께 건네 주는데, 그 칼에는 뚜렷이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시운속죄(時雲續罪)."
시운스님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1백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행하는 참회좌선(懺悔坐禪)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 앞에 청수(淸水) 한 그릇과 부처님을 찔렀던 칼을 놓고 깊이 깊이 참회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21일이 지나자 칼에 새겨졌던 '시운속죄'라는 글씨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시운스님은 참회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죄가 소멸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윽코 단식참회 30일이 되었을 때 탈진한 시운스님은 부처님 앞에 쓰러져 입적하였습니다.
그때가 1459년(세조 5) 8월이었고, 소식을 들은 안주 목사 혜성은 후히 장례를 치르고, 절기에 따라 극진히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가피가 빨리 찾아올 때도 있고 늦게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같은 태양이 천하를 비추지만, 봉우리에는 빛이 먼저 찾아 들고 골짜기에는 빛이 나중에 찾아 드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가피가 조금 늦게 찾아 든다고 하여 조급증을 낼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큰 애착과 큰 기대는 큰 착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치 이 시운스님처럼...
-(1 - 2편 출처 : 효림, 일타스님의 "기도" 중에서)
《제 3편: 조선의 왕자로 다시 태어난 관춘》
절강성 영파부의 관춘 부부는 금릉에 머물면서 짚신을 삼아 팔았다. 이들 부부는 자식이 없었기에 매일 버는 돈에서 필요한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우물 속에 던져두었는데, 달이 가고 해가 지나도 개의치 않았다.
그때 스님 한 분이 찾아와서는 백금을 구걸하였다. 관춘은 말하였다.
“저는 짚신을 삼아 하루하루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어디에 그런 돈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다만 기꺼이 베풀기만 한다면 곧 그 돈은 있을 것이오.”
관춘은 말하였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님은 사람을 사서 우물을 퍼낸 다음 백금을 얻어 길을 떠났다.
그러나 훗날 관춘은 벼락을 맞아 죽었다. 그때 금릉에 주원개라는 이름의 서생이 있었는데, 붉은 먹으로 관춘의 등에다가 ‘불불인佛不仁’(부처님은 인자하지 못하다)이라는 석 자를 썼다.
주원개는 그 뒤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이 예부상서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칙명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가 조선왕을 책봉하게 되었는데, 왕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종(倧: 조선의 제16대왕 인조의 이름)이었다.
조선의 왕이 주원개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지금 여러 해가 지났지만 말하거나 웃지 않습니다. 그리고 등에 붉은 글씨가 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주원개는 왕자를 안고 나오게 하였다. 왕자의 등에는 금릉에서 벼락을 맞아 죽은 관춘의 등에 쓴 “佛不仁” 석 자가 쓰여 있었다. 주원개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너를 억울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왕자는 홀연히 말하고 웃었다. 이에 주원개는 왕에게 지난날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운주사/ 석운광 지음/ 윤회와 인과의 실제 이야기) 중에서
사리불이여! 어떤 중생이 아미타불의 불가사의한 공덕에 대해 듣고서 뛸 듯이 기뻐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칭념하고 깊이 믿어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몸으로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을 누리거나, 비천함을 바꾸어 부귀함을 얻게 되거나, 과보를 얻어 숙세의 업에 따른 병환의 고통을 면하거나, 단명함을 바꾸어 수명이 연장됨을 얻거나, 원수가 원한을 내려놓아 자손이 번영하고 심신이 안락하며 뜻대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느니라. 이와 같은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불설아미타불근본비밀신주경』 중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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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은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