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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오는가?
(참고본문 합 3:2-19, 마 6:9-10, 요 16:7-11)
첫째, 부흥이란 무엇인가?
1. 부흥이란 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결코 부흥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영으로 더욱 강력하게, 특별히 강력하게 찾아오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하박국 3: 2-3
1절에서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원문, ‘연세의 중앙에’] 부흥케 하옵소서"(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소생시켜달라)라고 기도한 후 2절에서 하박국은 마치 그 부흥을 눈으로 보는 듯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바로 이것이 부흥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특별히 강력하게 오셔서 그의 영광이 온 하늘에 가득하고 찬양이 세계에 충만한 것.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나라, 즉 천국이 각 심령에 임하는 것,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이 임하는 것, 그 엄청난 영광의 세계가 심령에 임해, 그것이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깨닫는 것, 쉽게 말하면, 사람이 예수의 아름다우신 영광에 완전히 압도당해, 예수에 반하고 미치고 환장하게 되는 것,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영광의 세계를 맛보고 알고 경험하고 그 세계 속에서 살게 되는 것, 자기 목숨을 다 바쳐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주께 아주 돌아버리는 것, 이것이 부흥입니다.
2. 그러므로 부흥을 원한다면, 우리 교회에 사람이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주님이 오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일에 사람이 오는 것보다, 천만배 이상으로 주님이 오시기를 기대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둘째, 참된 부흥이 오면, 즉 주님이 특별히 강력하게 오시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I. 죄의 자각과 회개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2:1-4에 묘사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초대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부흥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 16장 7-11절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 구절은 부흥이 임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 부흥의 임함과 관련해, 이 요한복음 16장 7-11절과 아우를 수 있는 말씀이 마태복음 6: 9-10 즉 주기도문의 전반부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죄에 대해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이 무슨 뜻? 죄를 자각시키고 책망함으로써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죄로 알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죄였는가를 알게 됩니다.
1. 자기 내면과 외면의 죄악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성령을 통해 오실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빛으로 오십니다. 그 영적인 빛은 우리 내면을 구석구석 비춰줍니다. 그러므로 마치 뜨거운 햇볕에 나온 지렁이처럼, 뜨겁게 달구어진 후라이팬 위의 콩처럼, 내면의 죄를 보고 사람은 꿈뜰거리다가 튀고 뒹굴며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에 절망합니다. 자기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고 울부짖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느냐고?
전에는 그 죄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어가 그런 심각한 애통을 유발했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비추어주신 그 빛이.
전에는 더러운 것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영안이 감겨 있어서. 그런데 심령에 빛이 들어오니까, 얼굴에, 심령에 칠해진 시커먼 숯검정이 눈에 띈 것입니다. 더러움을 자각한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부흥이 오면, 바로 이 현상이 나타납니다. 심각한 죄의 자각과 오열,애통, 회개, 뒹굴음, 절망적 부르짖음과 절규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없으면,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2. 그리하여, 기도의 제목이 바뀝니다.
자기 가정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 경제문제, 자식문제, 직장문제 해결해 달라는 기도는 사라지고 자기 영혼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절규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관심이 외적인 환경, 숫자, 물질, 외적 형통, 성공이었다면, 부흥이 올 때의 관심은 오직 영혼, 영혼, 죄 문제에 쏠리게 됩니다.
3. 주님이 빛으로 오시면, 자기 영혼의 추악함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새삼 인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임하실 때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임하시면, 그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답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 거룩하신 주님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추악한가. 그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추악함에 비추어 보면, 주님은 얼마나 거룩하고 존귀하고 거룩하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은 아버지의 이름,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됩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은, 주님의 거룩하심을 깊이 자각하고 아버지가 얼마나 거룩하고 존귀하고 놀라우신 분인가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부흥이 올 때, 주님이 빛으로 오실 때, 이 계시의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임하고 이 깨달음이 깊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죄에 대한 자각과,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깨달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서 동시에 자신의 추악함을 보게 되죠.
이것이 와야, 그것을 부흥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자신의 추악함을 보고 애통하면서 (마 5:4), 동시에 주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놀라운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거룩함"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럽고,얼마나 엄청난 우주적 비밀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아름답고 우리 존재 전체를 다 바쳐 추구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자신도 하나님처럼, 의롭고 거룩하게 되기를 사무치게 열망합니다.
II. 따라서 주님이 오시면, 부흥이 오면, 사람들이 의와 거룩함, 예수님을 사무치게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오실 때 "의에 대해 세상을 책망한다"는 구절에 담긴 한 가지 의미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 우리의 죄를 속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2) 의가 무엇인가를 삶과 죽음으로 보여주셨으며
(3) 또한 의의 화신, 의로움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지상에서 보았던 그 놀라운 의의 춤, 의의 장관, 현란한 의의 축제가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예수님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 때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아하, 예수님은 십자가의 속죄로 하나님의 의로움과 선하심을 보여주셨구나.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값없이 의로워지는구나!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지극히 의로운 것이었구나! 예수님 자신이 바로,하나님의 의 그 자체였구나.' 성령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의가 없는 세상에서, 깨달음과 책망과 자각을 통해, 의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 의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향한 사무치는 사모함을 성령님이 주십니다.
1. 부흥이 오면, 성령이 오시면, 자신이 추악한 죄인임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를 믿을 때 주님이 거저 주시는 의에 감격합니다.
로마서 3:21-28이 죄인에게 거저 주시는 그 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21-24절 읽기.
2. 행함에 있어서도 의로워지기를 사무치게 추구합니다. 롬 6:15-19 읽기.
의의 표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3. 따라서 우리의 의이신 예수님을 사무치게 추구합니다. 예수님 닮기를 사무치게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추구합니다. 수단이 아닌 목적.
4. 예수님을 사무치게 추구하고 사모하면서 그 예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모십니다. 자아를 버립니다.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었던 자리에서 내려앉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십니다. 자기 왕국이 아닌,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잠깐 방문했다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손님으로, 구경꾼으로, 우리의 종으로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으로, 임금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그래서 내 뜻, 내 왕국, 내 자아, 내 욕망, 내 성공, 내 비전, 내 꿈, 내 삶은 다 사라지고 주님이 왕으로 내 안에서 내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가 바로 그 뜻입니다. 주님의 나라, 즉 주님의 통치가 내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나를 온전히 다스릴 때 나의 삶은 온전히 의로워집니다.
성령님이 "의에 대해 나를 자각시키실 때, 그 결과 하나님의 통치가 내 심령에 임합니다."
III. 내 욕망이 사라지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면, 즉 부흥이 오면,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내게서도, 나를 통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1. 내 가치관이 주님의 그것으로 바뀝니다.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은, 심판을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탄의 통치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고방식, 가치관, 이 세상의 모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세상 자체가 사탄과 함께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디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길어지므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이자, 죄를 없애버린 사건이었고, 또한 십자가 사건은 죄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던 사탄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장망성, 장차 망할 성입니다. 영원한 것은 천국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부흥이 오면, 사람은 이 진리를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특별하게 오시면, 장차 올 심판, 천국, 내세를 강렬히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관이 바뀝니다. 세상을 좋아하다가 천국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무엇이 가장 귀중한가를 알게 됩니다.
2. 주님의 소원이 내 소원이 됩니다.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나도 행하기 원하게 됩니다.
오로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내 삶의 욕망이 됩니다.
3. 주님의 심정이 내 심정이 됩니다. 주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주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됩니다.
주님의 기쁨과 행복도 내 것이 됩니다.
IV. 따라서 부흥이 오면, 주님이 임하시면, 심령에 천국의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환경이 극복됩니다. 주님만으로 기뻐합니다. 부흥이 오면, 심령천국, 가정천국,교회천국이 이루어집니다.
하박국 3:17-18 읽기.
V. 부흥이 오면, 전도운동이 일어납니다.
1. 이 기쁨과 행복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됩니다.
2. 이 전도를 성령님이, 주님이 너무나도 기뻐하십니다. 주님은, 단지 나 혼자만, 우리만 천국을 누리라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천국을 남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특정 교회, 특정 지역, 특정 국가에 강력히 오시는 것은, 즉 부흥이 특정 교회에 강력히 임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남들을 영적으로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부흥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회심하고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납니다.
일례로, 1965년 인도네시아 티모르 섬에서 일어난 부흥 (멜 태리,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1권 참조)
초대교회 오순절의 부흥
기타 다양한 부흥들.
VI. 부흥이 오면 각종 은사가 강력히 나타납니다.
부흥의 최종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보세요. 교회, 성전을 세우는데 각종 은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면, 참된 부흥이 오면, 각양 은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신유, 방언, 예언, 기적, 말씀의 은사, 긍휼 구제 섬김의 은사, 말씀 가르침의 은사, 셋째 하늘에 올라가는 은혜 등등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은혜와 은사가 나타납니다.
셋째, 부흥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부흥을 갈망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부흥이 오기 전에는 거의 언제나 부흥을 위한 기도가 있었습니다다. 한국교회 평양대부흥 운동, 오순절 성령강림 시에도.
2. 죄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의 기도를 통해 부흥이 임합니다.
이사야 57:15,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앞서 말했듯이, 부흥이 오면 회개가 임하는 것도 맞지만, 철저한 회개가 있을 때 또한 부흥이 임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3. 오직 주님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님 그 자체만을 갈망하고, 갈망하고 또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갈망하는 곳에 임하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어찌할 줄 모르며 헐떡거리고 물을 찾아 미친 듯이 이곳저곳으로 달려 다니듯이, 그렇게 주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을 미치도록 죽도록 갈망해야 합니다. 아주 사무치게, 필사적으로 찾아야 합니다.주님 아니면 난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주님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고,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며 가장 가련하고 가장 불쌍한 존재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만을 갈망하고 갈망하며 내게 임해달라고, 나를 채워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밤낮으로, 주야장창, 허구한 날, 일 년 내내, 수년, 수십 년까지라도, 그렇게 사모하고 갈망하고 애타게 찾을 때, 마침내, 주님이 임하시고 오십니다!
4. 주님은 멀리서 오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가까이, 아주 가까이, 너무나도 가까이, 손닿는 곳에, 만질 수 있는 곳에 계십니다.
너무나도 가까이 계셔서 내게 임하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나의 갈망이 없으므로 주님이 내 심령에 실제적으로 강력히 임하시지 못합니다. 즉 내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거리는, 마음의 거리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면, 주님은 내게 아주 가까이 계시지만, 내가 영적으로 주님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내게 임하시기 위해 내게 극도로 가까이 계셔도 내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나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흥 즉 주님의 오심은, 육체의 오심이 아니라, 영적인 오심이요, 내 마음,내 심령에 오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합치되는 것이요 일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아멘.
5. 주님의 임하심은 가랑비에 옷 젖듯, 부지불식간에 천천히 이루지기도 하고, 소낙비처럼 갑자기 강력히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주님이 임하시든, 우리가 주님을 갈망하면, 주님은 반드시 임하십니다. 할렐루야!
6. 부흥은 한 번 오면, 영구히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오심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입니다. 부흥을 한두 번 경험했어도, 거기에서 안주하고 주님을 향한 갈망이 식어버리면, 심령은 메말라집니다.
이는 마치 한 번의 장대같은 비로 농사가 끝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비는 때를 맞춰 계속 내려야 합니다. 햇볕도 계속 내리 쬐어야 합니다.
주님은 계속 임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평생토록 부흥을 경험해야 합니다.늘 부흥한 심령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희미해지면, 부흥도 사라집니다. 심령 천국도 흐릿해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자매여,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평생토록 주님을 갈망합시다. 우리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을 사무치게 갈망하며 그리워하며, 그 영광의 아름다우심에 취해 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부흥입니다.
앞에서, 부흥이 오면 주님을 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부흥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계속 부흥이 오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아멘! = 아믄(암은)! 그렇고말고요!
♬♪♩
오직 주의 사랑에 취해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오직 주의 임재에 갇혀 내 영 기뻐 춤을 춥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 거룩한 땅에서 주께 찬양, 경배 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사랑,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평생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고형욱 님의 가사를 약간 개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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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흥 갈망의 맥락에서 3년 전에 쓴 글 하나를 아래에 덧붙입니다.)
특별히 이 글을,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목회자들의 가장 큰 희망 가운데 하나는, 예배시간에 사람들이(본교회 교인이든 아니든) 많이 찾아와 빈 자리가 없이
예배실 안이 성도들로 차고 넘치는 것이겠죠.
그래서 목회자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예배시간에 성도들이 많이 오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이런 열망은, 큰교회 목회자든 작은교회 목회자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찾아오기보다, 주님이 방문하시기를, 주님이 그 예배에 임하시기를, 주님이 오시기를 더욱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이 오기를 바라는 만큼만, 주님이 오시기를 갈망한다 해도, 주님은 놀랍게 그 예배에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것이 만족이고 기쁨이고 행복이고 천국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물론, 사람이 오는 게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이 예배에 찾아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이지만,
그것보다 천만배 더, 주님이 오시길 갈망해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오늘은 주님이 어떻게 임하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 기대하며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무개가 나올까, 몇 사람이 모일까 염려하기보다,
오늘 예배에는 주님이 강력히 찾아오실까, 우리에게 어떻게 임재하셔서 자신을 주실까 기대하며
순결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이 오시기만을 사모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 경배하고 주님을 닮으며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을 경험하는데 주일예배와 다른 모든 예배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가장 존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존귀하지만, 주님만큼 존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가장 존귀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가장 존귀하게 여겨 향유 옥합을 깨뜨렸지만,
가룟 유다는 돈을 훨씬 귀하게 여겨 이를 나무랐습니다.
만에 하나, 성도가 많이 모여 헌금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기를 기다리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런 분은 거의 없겠지만)
그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교회에서, 목회자에 의해 하찮게 취급당하실 때 목놓아 우십니다.
사람들의 머릿수보다, 돈보다 주님 자신이 가볍게 여겨질 때, 아니 주님 자신이 그것들을 채워주는 종으로 부림받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방성대곡하십니다.
주님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가 아니라, 그 목회자가 가련하고 불쌍해서 주님은 통곡하십니다.
그토록 존귀하고 고귀하고 아름답고 너무나도 놀라우신 주님, 한량없는 사랑의 주님을, 존중하기는 커녕 가볍게 대한다면,
그게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주일이 오기 전, 토요일에 주님이 내일 예배에 오시기를 갈망합시다.
사람이 얼마나 올 것인가에 신경쓰기보다, 과연 나의 이런 마음 상태에 주님이 임하실 것인가,
우리교회의 예배에 주님이 오실 것인가,
우리교회의 예배, 예배시의 마음가짐이 주님께서 오실 만한 그런 예배인가,
주님이 과연 오셔서 경배를 받으시고 은혜를 주실 것인가,
거기에 신경을 씁시다.
매 주일마다 주님이 예배에 찾아오시기를 사모하고 갈망하며 간구합시다.
할렐루야!
주님, 어서 오소서!
첫댓글 아멘. 제일먼저 주인되신 주님 그분을 인정하고 철저히 주님앞에 회개하며 사모해야 하는데ㅠㅠ제발 숫자가 아닌 영이 채워지기를...
할렐루야! 이세상 어떤 나라 어떤 성 보다 어떤 위대한 민족 보다 하나님 나라의 천성을 바라보며 달려가고 우리들의 주인이신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