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정한 사람을 격리하라
민 5:1-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4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으니 곧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행하였더라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8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9 이스라엘 자손이 거제로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모든 성물은 그의 것이 될 것이라
10 각 사람이 구별한 물건은 그의 것이 되나니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느니라
민 5:1-10 / [부정한 사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문둥병 환자와 몸에서 고름이나 피가 흘러 나오는 사람과 시체에 몸이 닿아 부정 탄 사람을 진영에서 쫓아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여라. 3)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말고 진영 밖으로 쫓아내 진영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이 진영에서 너희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 부정한 사람들을 진영에서 모두 몰아내었다. 5) [잘못에 대한 배상]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셨다. 6)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두어라. 남자든 여자든 여호와의 뜻을 거슬러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자는 7) 반드시 잘못을 자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손해를 입힌 일에 대하여 충분히 배상을 해야 한다. 그 손해액에 5분의 1을 더 얹어 본주인에게 돌려주어라. 8) 그런데 그 주인이 죽었거나 배상을 대신 받을 가까운 친척이 없거든 그 배상물을 여호와께 바쳐야 한다. 이것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 이 경우에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죄를 깨끗게 하기 위한 숫양 한 마리를 함께 가져가야 한다. 9)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드리는 특별 봉헌물은 모두 그것을 받는 제사장의 차지가 된다. 10) 이렇게 각 사람이 특별히 구별하여 바치는 제물은 무엇이든지 제사장의 몫이 된다.'
5장은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법을 다룹니다.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1-4) 이스라엘의 전열을 편성하고, 회막의 운반 임무 분담까지 끝난 시점에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언급된 율법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본격적인 가나안 행군을 앞두고 전열의 편성이 끝난 신앙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일에 필요한 핵심 율법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머무시는 진영의 성결을 유지하라”는 명령인데, 군사력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에서 만들어지는 공동체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계시입니다. 본 단락에서는 부정한 사람을 격리해 신앙 공동체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문둥병자와 유출병자,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은 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 규례는 집단생활의 안전과 위생을 확보하려는 실제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규례의 제정 목적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인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진영의 성결 유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혹해 보일 수도 있는 이 조치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입니다.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5-10) 본 단락은 사회적 삶에 관한 규례로서, 다른 사람에게 재산의 손해를 끼쳤을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규례가 경제범죄를 정의하고 해석하여 처리하는 관점입니다. 이기적인 탐심 추구에서 비롯되어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행해진 재산권과 인권 침해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 범죄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생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지해야 하는 성결과 거룩함의 범위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경제적 손해를 끼친 사람은 자기가 해를 입힌 사람에게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피해까지 보상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속죄제까지 드려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경제생활은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삶 속에서 이기적인 탐심 추구의 멈춤과 공정하고 책임 있는 처리가 들어간 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적용: 당신의 거룩함과 신앙생활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당신의 믿음은 교회 밖을 넘어 당신의 사회생활에도 적용되고 있습니까?
요엘 2장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 돌아올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혹 육신의 문제와 물질의 문제로 인해 신앙에 게을러 질 수 있습니다. 온갖 고생과 노력으로 이룬 자신의 것들이 영육에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얻은 행복은 한 순간의 만족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행복이 영원한 행복이며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은 행복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라
민수기 5장 5-7 / 이한규 목사
본문 6절에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란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힌 죄’를 뜻한다. 사람에게 해를 입힌 죄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로 여겼다. 즉 사람에게 범한 죄는 하나님께 범한 죄이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하나님께 해를 끼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는 것과 같다고 여기고 사람을 존중하라.
어떤 사람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못된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인간성 전체를 못됐다고 하지 말라. 남에 대한 비판을 쉽게 하지 말라. 남에게 어떻게 되라고 요구할 때는 항상 신중하게 말하거나 비판하라. 무엇보다도 남에게 요구하는 인간상을 먼저 갖춘 후에 조심스럽게 요구하라. 복된 리더가 되려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마음의 용량을 키우라. 항구가 크면 많은 배가 정박하듯이 마음이 큰 사람에게 많은 영혼이 쉼터를 찾듯이 찾아온다.
또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칭찬을 아끼지 말라. 불평보다 칭찬이 입에 배이게 하라. 진실한 칭찬은 힘든 사람을 힘든 줄 모르게 만들고 기분 나쁜 마음도 기분 좋은 마음으로 만든다. 칭찬이 입에 밴 사람은 같이 있고 싶고 더 대접하고 싶고 더 섬기고 싶다. 칭찬은 몸과 마음의 피로를 잊게 만든다. 칭찬은 삶의 활력소다. 칭찬은 하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들고 받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든다.
나눔처럼 칭찬과 감사에도 인색하지 말라. 형식적인 칭찬은 냉소를 낳지만 진실한 칭찬은 마음을 얻게 한다. 또한 진실한 칭찬은 칭찬 대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그 대상에게 전달한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복된 리더가 될 수 없고 복된 리더가 없이 복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진실한 칭찬은 사람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하기에 성공과 축복 가능성도 커지게 한다.
< 피해 보상에 힘쓰라 >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자세는 피해를 입혔을 때 피해 보상에 힘쓰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사람에게 죄를 저지르면 사람에게만 사과하고 배상함으로 끝내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그 지은 죄를 자복하라. 사람에게 지은 죄는 하나님께도 지은 죄가 된다. 죄에 대해 눈물과 애통으로 참회하며 자복한 후 그 죗값을 온전히 갚으라. 회개가 없이 배상만 하지 말고 배상이 없이 회개로 퉁 치고 끝내지 말라. 회개도 하고 배상도 하라.
얼마나 배상해야 하는가? 손해를 입힌 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하라고 했다. 징벌적 배상을 요구하며 몇 배의 보상을 물리는 것은 고대에 감당할 수 없었기에 물질적인 손해에 더해 정신적인 손해 위자료로 오분의 일을 더해 배상하게 했다. 배상을 해서 죄 값을 철저하게 치르게 한 것은 그만큼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죄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인생의 전진을 막는다. 오래 전 미국에서 기차의 차축 윤활유통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가서 기차 전체가 선 적이 있었다. 내게 많은 장점이 있어도 작은 단점이나 작은 죄 하나로 인해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죄는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약을 용법대로 용량을 맞춰 써야 효과도 있고 해가 없다. 아무리 부작용이 거의 없는 기적적인 해열 진통제도 하루에 6알 이상 먹으면 간에 해가 된다. 작은 죄도 경시하지 말라.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고 사투하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죄를 무수히 지으며 산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남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않을 때 공동체의 평화와 나의 평안을 지킬 수 있다.
거룩하고 정결한 교회로의 부르심
민 5:1 / 김형익 목사
1. 본문은 이스라엘 진의 거룩과 정결에 대해서 가르친다. 이것은 위생상 혹은 의식상의 정결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죄로부터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이러한 구약 광야 교회의 원리는 신약 교회의 원리와 동일하다. 몇 가지 원리를 주목하자.
2. 먼저 죄는 제거되어야 한다(1~4). 레위기 13~15장에서 언급한대로, 나병이나 유출병이 있는 자 그리고 시체와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사람은 다시 정결함을 입을 때까지 진 밖으로 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온전한 공동체,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악을 포함하여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것들은 다 쫓겨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가르쳤다(고전 5:1~2). 천국에는 오직 온전하게 된 자들만이 들어간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드러내야 한다.
3. 죄는 갚아져야 한다(5~10). 이것이 두번째 교훈이다. 죄 해결의 두 요소는 고백과 보상이다. 먼저 죄는 고백(자백)되어야 한다(5).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그 죄가 행해진 사람 혹은 하나님께 배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갚으라’고 하셨고 ‘오분지 일을 더하여’ 갚으라고 하셨다(7). 만일 배상해야 할 상대가 없다면 그 배상 금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이것은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
4. 세번째로 죄는 근절되어야만 한다(11~31). 이것은 남편이 아내의 불륜에 대하여 의심이 생겼을 때 처리하는 규정을 담고 있다. 실제로 간음을 했으나 증인이 없는 경우(11~14a)와 무죄한 아내를 남편이 의심하는 경우(14b)가 다루어진다. 왜 이런 문제가 갑자기 다루어지는가? 하나님께서 간음을 이스라엘 중에서 제거하려 하심이고, 이 간음이 (실제로 이루어졌든지 아니면 단순히 의심이든지) 이스라엘의 기본 단위인 가정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모든 죄와 죄의 모양은 반드시 다루어져야만 하고 근절되어야만 했다.
5. 이것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요, 마음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가 제거되고있고, 갚아지고 있으며, 근절되고 있는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는 이런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고 여기는가? 교회에서 도덕적 위선이나 온갖 종류의 부정함은 다루어져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온전히 수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거룩함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 위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넘치도록 배상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위에 교회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스스로 여기면서 그 거룩함을 이루어가야 한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
6.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고 정결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저희를 사용하여 주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주시옵소서!”
진영 안과 밖의 차이
민수기 5:1-10 / 김영목 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운데 사는 모든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정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2절 말씀을 보니 문둥병에 걸린 사람, 유출병이 있는 사람, 주검 즉 시체를 만짐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사람 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부류에 해당하는 모든 부정한 자를 하나도 남김없이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진영 안에 사는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민 5:3)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 하시매”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분리되다’, ‘구별되다’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이 더러운 것들로부터 구별되고 분리되어 있기를 명령하신 것이죠. 그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진영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데 설거지가 안 되어 있는 그릇을 내어놓고, 립스틱 선명하게 자국이 묻어 있는 유리 잔을 내어 놓는다면 대통령 입장에서는 요리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거나 매우 기분이 언짢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거하시는 진영을 더럽히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부정한 것과의 분리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결을 유지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죠.
이러한 원리는 오늘 날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 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따라서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더러운 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름 그대로 거룩하신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마음 속 부정한 생각들, 죄악된 삶의 습관들을 우리 삶 밖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악한 것과 분리 되어야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죠.
빵이나 과일에 핀 곰팡이를 그대로 놓아 두면, 금새 음식 전체에 곰팡이가 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량의 잉크 몇 방울이 컵에 든 온 물 전체에 퍼져 나가듯 죄는 그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죄는 발견되면 즉시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의 경우도 그냥 내버려 두면 진영 안의 온 백성들을 오염시킬 수 있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은 진영 밖으로 격리 시켜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음행을 행하는 교인들을 가만히 두고 징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교회를 책망합니다. 왜 바울이 이 사건에 대해서 고린도 교회를 책망까지 했을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그 무엇보다 순결을 지켜야 하는 곳이 교회 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음행이란 죄를 보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죄를 용납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환자의 몸 속에서 암세포를 발견하고도 모른 척하고 덮는 의사는 살인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죄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것은 커다란 영혼을 죽이는 범죄 입니다. 죄 지은 것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죄악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죄값을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7절 말씀 입니다. “(민 5:6)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민 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7절 말씀을 보면 진정한 회개는 2단계로 구분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자복 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단계 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단계에서 멈출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말고, 이웃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피해 금액의 1/5 즉 20%를 더해서 갚아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끊어진 상대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진짜 회개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회개의 열매로 하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성어 중에 “낙화불반지 복수불반분”라는 말이 있습니다. “떨어진 꽃잎은 다시 가지에 붙을 수 없고 엎지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수 없다.” 우리가 실수 한 것에 대해서 없었던 일처럼 돌이킬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실수로 인해 상대방과의 깨어진 신뢰, 관계가 이전처럼 다시 회복되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실수하고 잘못한 그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만일 나의 실수, 나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이웃이 있으면 찾아가야 합니다. 가서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며, 철저한 배상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진정한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진영 안에 머무는 모든 부정한 것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이야기 합니다. 진영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진영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결함을 요구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성결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결함을 갖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을 밖으로 내보내고 동시에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도 남김 없이 삶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시기 바랍니다. 세상 속에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결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민수기 5장 1-31절 / 석기현 목사
제가 미국에서 아들 영은이가 태어난 지 약 2년 정도 지났을 때 제 아내가 영은이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몇 개월 동안 혼자 살게 되었는데, 물론 외로운 것도 있었지만 또한 결혼 후 처음으로 자유(?)를 누리게 된 즐거움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중한 자유를 집안 정리에 선용(?)했는데, 제 아내와 같이 살 때에는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가구 배치라든지 실내 장식 등을 100퍼센트 제 마음대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카펫 물청소까지 한 번 해 놓으니까 온 집안이 정말 깔끔하고 깨끗해졌습니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그때 이웃에 살고 있던 제 동생 석기신 목사가 놀러왔다가 정말 깜짝 놀라면서 “형님, 너무 깨끗한 것 아닙니까?”라고, 제가 심한 결벽증에 걸린 것이 아닌지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를 들자면, 제가 욕실 선반에 있는 수건들까지도 군대에서 하던 식으로 ‘각을 잡고 폭과 두께까지 일정하게 정렬해서’ 개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후에 제 아내와 영은이가 돌아오자 집안은 며칠 사이에 곧 예전 상태로 복귀하고 말았습니다.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아무리 결벽증 환자라도 어린 아들이 어지럽히고 더럽히는 것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치울 도리는 없기 때문에 저는 그 ‘깔끔 깨끗’했던 집이 점점 더 지저분해지는 것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벽증까지는 아니라 해도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집을 깨끗하게 해 놓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광야교회’를 두고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이제 가나안을 향하여 본격적인 행진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별 운동’을 명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곧 ‘하나님의 집’도 되는 까닭에 그 집 역시 온갖 ‘부정한 먼지’를 닦아내고 ‘더러운 때’를 씻어내어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의 정결은 과연 어떻게 지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는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에 내리셨던 세 가지 성별 수칙을 통하여 오늘날의 교회가 그 거룩함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에서 드러난 부정에 대해서는 권징을 통해 공적 성별 작업을 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3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4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으니 곧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행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나병”이라 한 것은 비단 오늘날의 문둥병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염성 있는 피부병’을 다 통틀어서 하는 말입니다.
“유출증”은 몸에서 어떤 진액이 흐르는 병들을 총칭하는 말로서, 예를 들면 혈루증이나 하혈 등이 다 포함됩니다.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란 말 그대로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사람입니다.
세 종류로 구분된 이런 부정한 자들은,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당시의 의학 기술로는 그저 일반인들과 격리시키는 것이 최상책이었습니다.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그런 자들을 진중에 그대로 두면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지 그 병이나 부정한 것들이 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신 것이 단지 어떤 위생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명령을 내리신 가장 중요한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께서 친히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하나님 당신께서 무슨 병에 옮으실까 염려되어 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나병이나 유출증 혹은 주검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 즉 누가 보아도 부정하게 된 것이 분명한 사람들을 공적으로 엄격하게 격리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영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순수하게 지켜져야 함을 가르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영육 간의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게 깨끗함을 유지해야 할 광야교회가 적어도 사람이 한눈에 보아도 분명히 더러운 것조차 깨끗이 해 놓지 못한대서야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적어도 교회 안에서 분명히 드러난 공적인 부정과 죄에 대해서는 공적으로 분명하게 처리를 해야만 합니다.
어느 교인의 눈에도 다 드러난 명백한 잘못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또 장로교의 헌법대로 엄중하게 따져서 그 일을 처리해 나가는 능력을 교회가 발휘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교인에 대하여 방관하고 내버려두면 그 부정은 진영 안에서 점점 더 퍼지게 되고 결국 그 공동체 전체가 더럽혀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그런 부정 퇴치 능력을 자체적으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런 교회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 사는 집이라면 마음대로 어질러도 상관없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내버려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라면, 진정 하나님을 교회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교회라면, 그 ‘하나님의 집’이 사람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부정한 것 때문에 더렵혀지는 모습을 결코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적 성별 작업의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 예수님께서 실로 명확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18절에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목사님, 저는 설교는 듣고 기도는 받아도 권징은 못 받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교인이 혹 계십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례서약을 하고 입교하신 교인이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교회의 권징까지도 기꺼이 받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립니까? 나는 세례 받을 때 그런 서약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펄쩍 뛸 교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례 서약 중에서 네 번째 서약을 잘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나는 이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고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쓰기로 작정합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의 관할과 치리’ 중에 하나가 바로 당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권징인 것입니다.
권징은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교회들이 기피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참된 개혁주의 교회라면 반드시 시행해야 할 삼표식, 즉 ‘말씀 선포’와 ‘성례 시행’ 다음으로 오는 세 번째가 곧 ‘권징 실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고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며 종교개혁자와 청교도 신앙선조들이 교회 안에서 어김없이 실행했던 일이 바로 권징입니다.
공적으로 드러난 죄, 교회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에 대해서는 결코 흐지부지하지 않고 엄중하게 공적으로 성별 작업을 하는 것이 곧 당신의 진영을 깨끗하게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인 자신의 부정에 대해서는 각자 개인적으로 회개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5절부터 10절에 기록하기를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7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8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9이스라엘 자손이 거제로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모든 성물은 그의 것이 될 것이라 10각 사람이 구별한 물건은 그의 것이 되나니 누구든지 제사장에게 주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죄’를 뜻합니다.
하지만 그런 죄도 곧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지은 “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 불충한 죄’ 혹은 ‘여호와를 배신한 죄’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웬만한 부부 사이에서 다 있을 수 있는 죄, 따져 보면 잘못한 것이지만 그래도 가족끼리니까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는 죄, 친구 사이니까 대충 넘어가도 될 만한 죄’ -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라고 해서 결코 사람끼리만 적당히 어물쩍 넘길 수 있는 죄는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범한 죄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한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아야”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자복”은 자기의 지은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 즉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저 상대방만 모르고 있으면 그 죄를 알 사람도 없고 물론 고백할 필요도 없다고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저지른 자기 자신까지 모르게 할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도 “여호와께 거역”한 죄가 되는 이상 그 하나님을 속일 재주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개인적인 죄는 마음으로 자복할 뿐만 아니라 “그 죄 값을 온전히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 즉 자기가 지은 죄의 피해자에게 갚아야 하고,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족이 없으면” 즉 그 피해자가 죽었다든지 혹은 만날 길이 없으면 그 친족에게 배상해야 하는데 그것도 안 되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려서”라도 꼭 갚아야만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죄사함을 얻기 전에 먼저 그 상대방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 한마디조차 끝내 못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라고 죄 용서를 구할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참된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외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자명합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서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엄청나게 비싼 ‘죄 값’을 우리 대신 ‘갚아’ 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독생자의 생명’이라는 지극히 값비싼 대속 제물이 이미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돌려 드려야’ 할 의무는 완전히 면제되었고 이제 단지 자복하는 순서 하나만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만큼까지 해 주셨는데도 우리가 이처럼 쉽게 죄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놓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주 회개하십니까?
가족에게, 친구에게, 교우에게 용서를 빌어본 기억이 있으십니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상대방 앞에서 스스로 인정하고 또한 그 죄를 자신의 입을 열어 하나님께 직접 자복해 본 기억이 혹 오래되지는 않았습니까?
죄 자복에 대한 방심과 게으름이 얼마나 나 자신을 점점 더 더럽게 만들고 있는지, 그처럼 회개할 줄 모르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지저분한 부정에 점점 더 더럽혀지고 있는지를 꼭 깨달을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공적 권징만을 가지고 완전히 깨끗해질 수는 없습니다.
당회가 어떻게 모든 교인의 사사로운 일 하나하나를 다 따지면서 고쳐나갈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공적 권징은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행하는 ‘사적 권징’, 즉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범하고 있는 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은 잘 알고 있는 나의 죄 - 바로 이 죄를 각자 스스로 깨끗이 청소하는 교인이 되어야 교회 공동체 전체도 성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죄를 자기 자신이 그때그때 즉시 청결하게 해결하는 일, 곧 자신의 골방에서 자복하고 통회하는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자신의 심령과 생활부터 순결하게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람이 밝힐 수 없는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11절 이하 15절에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탈선하여 남편에게 신의를 저버렸고 13한 남자가 그 여자와 동침하였으나 그의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14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 그 아내를 의심하였는데 그의 아내가 더럽혀졌거나 또는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 그 아내를 의심하였으나 그 아내가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든지 15그의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헌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부정들 가운데 이 세 번째 것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즉 어떤 아내가 과연 간음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남편으로서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고 어떤 객관적 증거도 없으며 단지 정황적인 “의심”만 있는 경우였습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런 부정이란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확실히 발생한 부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처리해야 할 부정 그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를 처리하는 방법이 본문 15절부터 26절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선 그 의심받게 된 아내를 일단 제사장 앞으로 데려가서 “의심의 소제”라고 불리는 특별 제사를 드리도록 했는데, 그것은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 즉 일종의 속죄제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런 후 제사장은 그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18절) 일련의 의식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그 죄의 여부를 판별하는 모든 일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의식의 내용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저주가 되게 할 쓴 물”(18절)을 두고 자신의 결백에 대하여 맹세하게 한 후에 그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은 성막에 있는 ‘놋 물두멍’에서 취한 것으로 원래 ‘거룩한 물’이라 불리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만일 그 여인이 부정을 저지른 경우에는 자신에게 쓴 저주를 가져오게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27절로 31절에 보면 “27그 물을 마시게 한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의 배가 부으며 그의 넓적다리가 마르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28그러나 여인이 더럽힌 일이 없고 정결하면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리라 29이는 의심의 법이니 아내가 그의 남편을 두고 탈선하여 더럽힌 때나 30또는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자기의 아내를 의심할 때에 여인을 여호와 앞에 두고 제사장이 이 법대로 행할 것이라 31남편은 무죄할 것이요 여인은 죄가 있으면 당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그의 배가 부으며 그의 넓적다리가 마르리니”라는 말은 무슨 독에 중독되어 신체가 상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인의 해산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이 무죄한 경우에는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리라”는 후자의 경우와 대조해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점은, 그 물 자체가 무슨 독이 있거나 마술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그 결백과 유죄의 여부를 그 여인의 임신하는 능력을 통하여 보여 주실 것이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30절에 “여인을 여호와 앞에 두고”라는 말이 또 한 번 반복되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해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 상황으로 볼 때에 이런 규정이 결코 아내에게 가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조금만 의심이 생겨도 가차 없이 아내를 내버리는 남편들의 횡포에 제재를 가하는, 즉 아내를 보호해 주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무죄”라고, 즉 그런 의심이 들었을 때 자기 마음대로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제사장 앞으로 자기 아내를 데리고 나가는 행위 자체는 합법적인 것임을 밝혔으며, 또한 “여인은 죄가 있으면 당하리라”고, 즉 유죄인 경우는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셔서 내리실 심판에 전적으로 맡기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바로 이처럼 ‘여호와 앞에 두고’ 그 판단과 심판을 맡겨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또 밝혀질 수 없는 타인의 죄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교회 앞에 밝히 드러난 죄’는 공적으로 치리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사람 앞과 하나님 앞에서 부단히 회개해야 하지만, ‘드러나지 아니한 다른 성도의 죄’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모든 처리를 전적으로 맡겨야만 합니다.
남의 죄를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증명하려 하고 그 죄에 대하여 사람이 사람에게 완벽하게 심판을 내림으로써 이 지상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영적 결벽증 환자’들이 가끔 있습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이 다 그런 심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죄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사람이 왜 곁에 있는 형제자매의 죄를 그렇게도 신경 쓰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때때로 공적으로 드러나는 죄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권징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계가 되도록 만드실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중한 범죄는 반드시 권징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알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는 교회가 무슨 사설탐정기관처럼 뒤쫓아 다니면서 남의 먼지를 들추어내는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의 죄를 정죄하는 일에 열심을 낼 때 교회는 결코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디까지나 다 ‘같은 죄인’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심판주’로서의 위치에 설 수 없고 서려 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드러나지 아니한 죄에 대하여 혹 무슨 소문을 듣거나 의심이 생겼다고 해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증거 없는 비난을 유발시키는 행위야말로 진짜 공적으로 권징을 받아야 할 중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으신 범죄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온전한 판단과 궁극적인 심판에 맡기는 것만이 교회를 진정으로 순결하게 지킬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도 그 곳이 깨끗해야 편안히 발 뻗을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크고 지저분한 식당보다는 실내 장식에서부터 음식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고 정갈한 식당에 아무래도 발길이 끌릴 것입니다.
아무리 의사의 실력이 좋다고 소문나도 누구의 눈에도 비위생적인 설비를 차려 놓고 때 묻은 의료 기구를 쓰는 병원이라면 어느 누가 거기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교회가 만일 성별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교회가 진정 세상에서 무거운 짐 진 자, 환난과 시험을 당한 자, 그 심령이 상한 자들이 찾아와서 쉬고 먹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은 일단 제쳐놓고라도 우선 ‘영적 깨끗함’부터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서점에서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은 아마도 대형교회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책인 것 같았습니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고 했으니, ‘큰 교회는 못 생겼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말이겠지요. 저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큰 교회 목사라고 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 ‘큰 교회는 잘못된 교회이고 작은 교회가 이상적이고 아름답다.’라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신약의 첫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만 해도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고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니, 적어도 수천 명이나 되는 큰 교회였습니다.
출애굽 때 성소를 중심으로 세워졌던 ‘광야교회’로 말하자면 장정만 육십 만 명이나 되는 초대형 교회였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대형교회도 있고 두세 사람 모이는 작은 교회도 있습니다.
결코 교회의 크기를 가지고 교회의 이상형이나 아름다움의 정도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교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영적 깨끗함’ 곧 ‘성별’입니다.
오직 기록된 복음의 말씀을 따라서 그 진리를 깨끗하게 지키는 교회, 거룩하신 하나님의 율례를 순종함에 있어서 틀림없는 교회, 불신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공회의 순결함과 정절을 지키는 교회 – 크든지 작든지 이렇게 깨끗한 교회가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공적으로 또 각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더러운 것, 못된 것, 악한 것들을 부지런히 털어내고 닦아내어 항상 청결한 모습을 유지할 때 이 곳은 우리 자신부터도 더욱 부지런히 모이고 싶은 교회가 되며, 새 교우들이 왔을 때 실로 첫눈에 마음에 쏙 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 앞에 드러난 부정을 공적으로 정확히 다스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의 죄는 항상 스스로 회개하며, 알 수 없는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맡김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이 교회를 더욱 성별되게 지키며 세상 앞에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결에 대한 세부 규례
[민 5장]
[내용개요]
본장은 레위기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정결 규례와 각종 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각종 부정한 자를 이스라엘 진 밖으로 추방하라고 명하셨다(1-4절). 그리고 범죄에 따른 손해 배상법과(5-10절), 간음한 혐의로 고소된 여인에 대한 재판 방법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다(11-31절). 이처럼 부정한 자와 범죄에 대한 처벌법은 정결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맥락을 지닌 것으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언급한 것은 언약의 백성이 지녀야 할 정결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강 해]
하나님의 성막을 중심한 진 배치와 성막에 봉사할 레위인들의 사명이 주어진 데 이어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거룩에 관한 명령이 주어지게 됩니다. 사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과 관계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고, 또한 거룩을 상실한 자와는 결코 교제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거룩은 곧 생명이었습니다.
1. 이스라엘 영내의 정결 요구
1) 부정한 자를 용납할 수 없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하는 영내에서 모든 부정하고 더러운 것을 몰아내야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죄악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문둥병 환자라든가, 혹은 생명 되는 피를 몸 밖으로 쏟아 내는 병인 유출병 환자, 또는 죄의 가장 명확한 결과물인 주검에 접촉한 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반드시 이스라엘 영내에 서 내보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위생적인 청결이라는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이라는 측면에서 결단코 예외 조항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철저한 관리를 통해 자신들이 죄악에 오염됨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는 아픔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이같이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자기 방서 의지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럴 때 개개인의 영적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온 공동체의 건강한 유지와 발전을 죄할 수 있을 것입니다.
a. 죄의 결과인 죽음(창3:19)
b. 피의 유출이 의미하는 것(신12:23)
c. 죄와의 관계 단절(고전3:16-17)
2) 거룩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처럼 예외 없는 부정 방지와 부정과의 단절을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 거룩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조처라 하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으로서 당신께 나아와 당신과 교제하는 자들에게는 예외 없이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부패하고 부정한 인격과 삶을 그대로 지니고서는 하나님과 결코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영육간의 거룩과 순결은 마치 생명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a.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
b.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살전4:3)
2. 죄에 대한 보상 규례
1) 모든 죄는 하나님께 향한 것임
사람들은 흔히 죄를 인간에 대한 것과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분리하여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은 진리와 의와 법의 근원으로서, 아무리 사소한 범죄일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a. 의로우신 하나님(시7:9)
b. 공의롭고 정직하신 하나님(신32:4)
2)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하는 것임
이스라엘 백성은 인간 관계에서 그 어떤 허물과 실수를 범했을지라도 인간에게 사과의 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대한 죄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범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범죄한 경우에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외와 허물을 고백하고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자는 그 죄를 영영히 두는 어리석고 우둔한 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는 다윗(시51:1-4)
3) 회개에 합당한 제사를 드려야 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회개할 때에 단순히 입술의 참회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피 흘림이 있는 속죄의 제물을 드림으로써 참회에 임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힘입지 않고는 그 어떤 죄와 허물도 용서될 수 없다는 구속의 진리를 예시해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a. 피 흘림의 중요성(히9:22)
b. 예수의 피로 얻는 대속(요일1:7)
3. 의심을 밝히는 법 절차
1) 의심의 법을 마련하신 이유
하나님께서는 인간사에 전혀 간여하시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깊은 속까지도 익히 아시며 그 삶의 약함과 부족함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의심의 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의심의 법을 마련하신 이유는 의심을 하는 자나 의심을 받는 자의 심적 고통을 익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의심으로 인해 인간 관계가 상실되고 한 생명이 멸망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내에 공연한 의심이 난무함으로 인해 공동체가 와해되는 아픈 결과를 낳을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마련하신 것입니다. 사실 의심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은 그 인격과 영혼이 황폐화되며, 심지어 살인과 같은 안타가운 범죄를 자행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의심의 법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절망과 황폐 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 인간이 알 수 없는 한계 이상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바른 신앙을 깨우쳐 주는 역할들 한다고 하겠습니다.
a. 인간의 사정을 익히 아시는 하나님(히4:15).
b. 신앙과 의심의 관계(마14:31)
c. 의심하는 자의 허물(롬14:23)
2) 모든 인격이 존중되어야 함
의심의 법을 살펴보면, 의심의 내용을 풀어 나가는 과정이 큰 인내가 필요할 만큼 매우 복잡하고 세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무렇게나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한 생명, 한 인격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들에게는, 모든 인격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자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본받아 우리 역시 주변에 발생하는 분쟁과 재판에 임함에 있어 더욱 신중하고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겠습니다.
·죄인을 다루시는 주님(요8:5-9)
결론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 아름답고 복된 목적지를 가는 도중일지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거룩을 추구하고 지켜 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늘 가나안에 대한 축복을 제시하시는 동시에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거룩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가장 자연스런 삶의 방식이요, 가장 두드러진 삶의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단어해설]
2절. 문둥병 환자. '몹시 괴롭다, 아프다'라는 <[r"x;:차라>에서 유래한 말로 원어 <t["Wrx;:차라아트>를 지칭. 심한 발진성 피부염에 감염된 환자. 성경에서는 죄와 더러움을 뜻함.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 '죽은 사람에 의해서 더럽혀진 사람' 을 가리킴. 즉 시체를 가까이하여 접촉된 사람을 부정하다고 간주함.
6절. 여호와께 패역. '여호와께 반역하여 죄를 짓다'라는 뜻. 하나님은 진리와 정의를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인간은 어떤 형태로도 불의를 행하면 하나님께 범죄함을 뜻함.
7절.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원어 <WD%w"t]hi:히테와두>는 '손을 펴서 경배하다, 손을 잡고 슬퍼하 다'라는 뜻.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나타냄.
8절. 속죄의 숫양.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으로 피해를 입힌 이웃에게 재산상의 보상을 하는 것과 하나님께 속죄하기 위하여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있다.
18절.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털을 권위와 명예로 여겨 슬픈 일이 있거나 죄를 회개할 때 머리를 풀고 재를 뿌리기도 했다.
29절. 의심의 법.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법. 어떤 물증이나 증인이 없는 간통 사건 즉 질투나 의심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무너지고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
[신학주제]
의심의 벌. 남편이 아내의 순결을 의심하여 고소했을 때 간음 여부를 판결하는 법을 의심의 법이라고 한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고소할 수 있는 이 법에 대해 남성 우월주의의 편견이 담긴 것으로 치부하는 의견은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아내의 부정 진위 여부를 떠나 남편의 의심만으로 아내를 처벌하던 당시 고대 근동 사회의 풍습에서 아내의 순결 여부를 가리는 이 법은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을 보여 주는 우월성을 담고 있다. 또한 저주의 두루마리를 태워 그 재를 탄 뭍을 마시고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판결하는 방식이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오히려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로 볼 수 있다.
[영적교훈]
본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기 전에 모든 부정한 자와 죄인들을 가려내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왜냐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 또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순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도 죄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거룩한 백성
민수기 5:1-10 / 허정강 목사
1. 진영을 더럽게 하지 말라
먼저, 악성 피부병에 대한 규례를 가르쳐주십니다. 2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을 탄 사람은 모두 진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지시하여라.” 개역성경에는 악성 피부병 환자를 나병환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은 나병이다. 고대 사람들은 나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지 못해 나병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나병은 피부에 반점이 생겨나 점점 짙어지다가 궤양으로 발달하고, 피부가 벗겨져 몰골이 흉해지고 몸이 마비가 오는 끔찍한 병입니다. 레위기 13장에는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나병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나병환자는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차림으로 '진영 밖에서' 살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병이 심한 나환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삶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부르지만 고대에는 진짜 나병만이 아니라 피부가 손상되는 모든 질병을 나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나병환자들 중에는 습진이나 건선처럼 지금은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에 걸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피부병을 치료하기 어려웠고 대부분 전염성이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잔인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조치였습니다.
이것은 고름을 흘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름을 흘리는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진에서 격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유출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조브’라는 말로 물같이 자연스럽게 ‘흐르다’는 뜻의 ‘주브’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곧, 이 말은 피가 멈추지 않고 몸 밖으로 계속 흐르는 혈루증과 같은 증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피가 곧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유출병은 그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것은, 죄의 결과로 생명이 파괴된 사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사람, 죄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 시체를 만진 사람도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로 여겼기 때문에, 생명이 떠난 시체는 가장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더구나 당시 구약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부정함은 신체적인 접촉을 통해 전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체를 접촉한 사람 역시 부정한 사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에서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 밖으로 쫓아내라고 명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3절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진 바깥으로 내보내어, 내가 머물고 있는 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깨우쳐주신 것은 당신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에게는 거룩함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자기 잘못을 고백하라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6.7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본래의 값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 얹어서 갚아야 한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를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로 준비시키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그 거룩함을 위해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우리가 거룩하고 정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6절 이하에서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죄를 범했을 때에는 어떻게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웃에게 어떤 잘못을 행하여 이 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에 다시 깨끗하게 회복되는 과정을 속건제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깨끗하게 회복되는 과정을 여기서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8절입니다. “그 피해자에게 대신 보상을 받을 근친이 없으면, 그 배상액은 죄를 속량하려고 바치는 속죄양과 함께 주님께로 돌아가, 제사장의 몫이 된다.” 속건제 규정에 따르면 잘못에 대한 배상은 피해자에게 원금에 20%를 더하여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상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속건제 숫양을 성전에 바치러 올라 갈 때 숫양은 제물로 바치고, 그 배상금을 제사장에게 줘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속건제를 드리고 남은 고기도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배상해야 할 대상이 없다고 해서 배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에 대한 죄 값을 꼭 배상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한 회개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거룩함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도 먼저 본인의 고백과 피해에 대한 보상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속건제를 통해 철저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준비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내광야를 떠나 본격적인 광야로의 행진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에게 거룩의 규례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다움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함을 원한다면, 바로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거룩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진 안에(3절) 머물고 계심을 강조하셨던 하나님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하고, 진정한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회복하여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의 더러운 것들을 진 밖으로 내 보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성도님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부정한 사람에 대한 처리
민 5:1-31 / 이동규 목사
민수기 5장은 부정한 사람에 대한 처리와 죄의 값과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방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3절입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1절에서 4절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병과 사람에 대해 이스라엘 진영에서 내보내라는 말씀입니다. 부정한 자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 진영을 더럽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 하나도 없고, 악하고 거짓된 것이 하나도 없으신 거룩하신 신입니다. 오류나 왜곡이 없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더럽고 악하고 거짓된 것을 미워하고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되고 더러운 것을 더 좋아하고, 쉽게 악을 도모하고 행악하며 음란에 빠집니다. 책임을 회피하며 알고 있는 것들을 다 모른다고 뻔뻔한 거짓말을 합니다. 참으로 인간이 이미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줍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조차 거짓과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길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그저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우선권을 두고 매일 말씀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에 철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선적인 속성 중 하나가 거룩입니다.
5절에서 10절은 죄에 대한 값입니다. 7-8절입니다.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누군가에게 지은 죄가 있다면 죄를 자복하고 죄 값을 지불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죄 값을 받을 당사자가 없으면 친척에게 주라 하고 친척도 없으면 제사장에게 드리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반드시 죄 값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보상하고 배상하듯 죄 값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없다고, 세월이 많이 지났다고 스스로 면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값이 있습니다. 죄는 흐지부지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깨달았다면 죄를 인정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속죄의 은총을 누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법적으로 져야할 책임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하고, 받아야할 할 처벌이 있다면 받아야 하고, 갚아야할 빚이 있다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손해를 끼쳤으면 물어주어야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자가 있다면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해야할 자가 있다면 용서해야 하고, 마음에 상처 준 말이 있다면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고, 버리고 끊어야 할 습관이 있다면 버리고 끊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전의 삶의 방식과 옛 습성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지도와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의 인생입니다.
11절에서 31절은 아내의 간통을 밝히는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27-28절입니다. “그 물을 마시게 한 후에 만일 여인이 몸을 더럽혀서 그 남편에게 범죄하였으면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의 속에 들어가서 쓰게 되어 그의 배가 부으며 그의 넓적다리가 마르리니 그 여인이 그 백성 중에서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여인이 더럽힌 일이 없고 정결하면 해를 받지 않고 임신하리라.”
아내의 간통에 대한 유무죄를 밝히는 방법으로 아내에게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을 마시게 하여 그 사실을 밝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의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은 간통에 대해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마르게 하는 신비롭고 무서운 물입니다. 지금도 만일 이런 처방이 유효하다면 배가 붓고 넓적다리가 마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본문대로 처방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 속에 죄에 대해 참혹한 결과들로 나타날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말씀이 전해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숨어서 저지르는 간통의 현장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또한 그것은 아내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남편과 아내로 엮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남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남자는 예외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28절의 “임신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여자는 남자와 달리 10개월 동안 태중에 아기를 품었다가 출산하는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의 책임과 소명을 가진 자로 몸 가짐에 더욱 유의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실로 빠른 것이 세월입니다. 말씀을 거울삼아 한 해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목전의 새해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새해의 미문을 통과하기를 결단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