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문제는 온라인 남성문화다, 우리가 뒤엎는다!
-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에 부쳐
가해용어로서의 ‘지인능욕’ 행태는 2016년 소라넷 사이트, 2017년 SNS의 한 종류인 텀블러, 2018년 트위터, 2019년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서 포착돼오던 문제이다. 그리고 2024년에도 우리는 ‘텔레그램’이라는 플랫폼을 공간으로 한,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AI로 손쉽게 합성되는 ‘딥페이크’ 기술을 매개로 한 ‘지인능욕’이라는 젠더폭력의 실태를 보고 있다. 8월 19일, 피해자의 제보로 MBC의 단독 보도와 한겨레에서 ‘겹지인방’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난 후, 여러 언론을 통해 공개된 중-고등-대학교, 군인이라는 직업군, 가족 등으로 묶인 방의 제목들은 충격을 주고 있다. 피해가 대대적으로 드러나고서야 긴급히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정부를 보면 짙은 기시감이 든다. 최근 정부가 마치 ‘새로운’ 대책처럼 제시하고 있는 것들은 기실 기존 대책의 반복이며, 으레 했었어야 하는 내용들 뿐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 불안에 떠는 여성들에게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대를 얼마나 찾아볼 수 있는가? 2017년 디지털성범죄피해방지정부종합대책, 2019년 웹하드카르텔 방지 대책, 2020년 n번방 방지법 이후에도 왜 우리 사회는 이 사태를 막지 못했는가?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표명하며 여가부 폐지를 공약으로 걸고, 2023년에는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방지를 위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그런 대통령이 2024년 8월 27일 국무회의에서 딥페이크 영상물은 “익명의 보호막에 기대 기술을 악용하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며 “디지털성범죄를 뿌리 뽑아달라”고 역설했다. 그의 말은 조금만 맞고 심각하게 틀렸다. 디지털성폭력의 공모자들은 국가제도의 편협함과 방임에 기대어 대범하게 조직적으로 커져왔다. 근본적인 원인은 구조적 성차별이고 해결은 성평등이다. 윤 정부 정책 기조의 전면수정이 시급하다.
이번 사안에 여성가족부는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경찰청이 연계해 피해영상물 삭제지원을 하겠다고 설명했다. 허나 삭제지원의 안정화를 위한 성찰과 대책은 빠져있다. 성폭력처벌법 상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이란 구성요건을 편협하게 해석하여 피해이미지에 가슴이나 성기 부위 노출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삭제지원에서 탈락되기도 한다. 스무 명도 안 되는 삭제지원자의 확충과 고용안정화도 시급하다. 그런데 여기에 여성가족부가 몰랐던 새로운 얘기는 무엇이 있던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홈페이지에 “딥페이크 성적 허위영상물” 배너 하나 추가하면 될 일인가. 또한 텔레그램 등 해외 플랫폼과 ‘핫라인’ 개설은 방심위가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이다. 가해자들이 얼마든지 우회 접속하는 해외사이트를 국내에서 “차단”만 하는 것이 진정한 피해구제인가. 나아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디지털성범죄, 명예훼손, 권리침해로 조각난 피해구제 창구에서 성적 노출이 없는, 신상정보 유포가 없는 온라인괴롭힘의 피해자는 어디에도 구제를 요청할 곳이 없다. 젠더폭력 관점에서의 피해구제가 시급하다. 심지어 온라인 플랫폼 규제에 책임이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는 현시국에 침묵하고 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삭제지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와 피해구제는 사후책일 뿐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플랫폼 사업자들과 자율규제 방안을 논의해온 자리들에서 디지털성범죄 생성과 유통 예방을 한번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던가.
경찰은 또 어떠한가. 사이버성폭력수사팀을 중심으로 향후 7개월 간 불법합성 성범죄물 특별 집중단속을 선포했다. 한편 경찰이 집계한 허위영상물 범죄 관련 발생건수는 2023년 180건, 올해 7개월 간 297건이다. 새삼 의아할 정도로 낮은 수치이다. ‘텔레그램이라 잡기 어렵다,’ ‘탈퇴계정이라 잡기 어렵다,’ ‘우회IP라 잡기 어렵다,’ ‘가해자가 미성년자라서, 학생이라서 압수수색이 어렵다’ 등 피해자를 숱하게 좌절시키던 경찰의 태도가 떠오른다. 소수의 “주범”을 심판대에 세우는 것으로 만족했던 조각난 수사는 2019년 텔레그램 성착취 이후 지난 5년 간 폭력 범죄를 키워왔다. 다수의 공모관계자를, 플랫폼을, 연대책임자를 함께 물어 수색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편협한 법과 부처 장벽에 쪼개지지 않는, 디지털 시민의 안전할 권리를 위한 종합적 대책이 필요하다. 공동체에서 절망을 겪은 피해여성들이 국가를 찾았을 때, 피해경험은 성폭력처벌법의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등과 같은 구성요건에 대한 좁은 해석에 기반하여, 파편화된 관련 법들에 의하여, 조각나고 미끄러져왔다. 그러나 여성은 조각난 몸이 아닌 인간이며, 여성의 피해경험은 특정 신체부위나 개인정보 따위를 근거로 개별화될 수 없다. 이에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모든 과정에서 국가는 젠더를 삭제하지 말고 현실 상황과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기반한 실제적인 대응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에 촉구한다. 여성가족부는 성평등 컨트롤타워로서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 및 방지에 관련된 예산을 복원하고 피해지원, 성평등교육, 정책실행 등의 역할을 진지하게 이행하라. 경찰은 디지털성폭력의 특성과 심각성 고려하여 수사를 강화하라.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심위는 여성혐오를 양산, 방조하는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고 규제하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윤석열 정권의 ‘새로운 디지털 질서 정립 추진 계획’을 젠더 관점으로 정립하라. 또한 이는 ‘디지털’에만 국한된 것일 수 없다.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 고용노동부는 고용평등상담실 운영 예산을 복원하고 성별임금격차를 해소하라. 서울특별시는 성평등 도서 폐기를 철회하라. 국회는 온라인에서의 혐오표현에 대한 대책을 만들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이 당연하고 자명한 일들이 이루어져야 국가는 디지털성폭력 해결에 한 발짝이라도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한 시민들의 남성문화 개입이 절실하다. 한국 사회는 소라넷, 웹하드카르텔, 텔레그램 성착취가 여성혐오 문제였다는 것을 외면했고, 온라인 남성문화 개입에 실패해왔다. 여성들은 셀카를 올려도, 몸사진을 올려도 안전한 인터넷공간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축출되어야 할 것은 여성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뿌리깊은 남성문화이다. 텔레그램도, 이른바 ‘지인능욕’의 가해 행태도 전혀 새롭지 않다. 여성의 신체를 동의없이 촬영, 합성, 편집, 가공하고 여성을 동료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 여성혐오에 딥페이크 기술이 마치 새로운 것인마냥 덧씌워졌을 뿐이다. 소라넷 이용자 100만명, 텔레그램 성착취 방 참가자 26만명, AI를 통해 나체를 합성해주는 텔레그램 채널 가입자 22만명으로 이어지는 남성문화의 공모자들이 조직적으로 모여 여성을 대상화하고 놀잇감으로 여겼다는 것, 친구-동료-가족-시민의 자리에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위치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 폭력의 핵심이다. 피해자들의 고통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고통과 분노가 방향을 잃고 뿜어져나오고 있다. 반복되는 절망과 불안 속에서 여성들은 피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 인물의 신상, 학교 등을 공유하기도 하고, SNS에 올렸던 사진들을 내리기도 한다. 여성들의 자유와 안전을 위한 해답이 왜 우리 사회에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온라인 남성문화에 대항하는 여성혐오 근절을 위한 행동이 전사회적으로 일어날 때이다.
‘여성을 동료 시민으로 여기라’는 구호가 2024년에도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피해자들의 용기와 생존, 버팀과 저항 덕분이었다. 불안을 용기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연대에 있다. 절망과 나아감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24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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