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3.
막1:35-45
예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모든 사람이 주를 찾는다고 전하였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생각과 달랐다.
권세 있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으니 가버나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이곳에 더 머물면 사람들이 상상하던 파라다이스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무리의 힘을 집결하고 경제력을 갖춘 뒤에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아 그들의 희망인 로마로부터 독립을 미리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오신 이유를 밝히 말씀하셨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에 가서 전도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의 발이 땅을 딛고 있으니 땅에 속한 소원이 얼마나 갈급하겠는가?
특히 민족적, 국가적으로 속박당하는 처지라면 독립과 회복이 더욱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시간 속에 갇힐 사람이 아니므로 앞으로만 흐르는 인간의 시간마다 벌어지는 상황만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온 세상과 온 인류의 문제인 사망과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었던 자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생명의 회복이다. 생명을 주는 소식이 복음이요 전도의 내용이다.
반평생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나는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의존했음을 발견한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의 내용보다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하려고 애를 썼다.
십일조뿐 아니라 집 전세금까지 심지어 크게 부하지 않아도 거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고 새벽마다 일어나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으며 신장에 문제가 생길만큼 쉬지 않고 전도와 심방에 매진했다.
행함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신 행동을 나도 해야 거룩한 자가 된다고 여겼다.
물론 이 행함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과 본질보다 앞선 것이 자기 의요,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뜻과 달리 땅의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니 이것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과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올 한해 신앙을 리셋한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깊이 알아 그 가운데서 풍성한 하늘의 기쁨을 실재적으로 누리는 한 해 되길 소원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