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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마주한 이곳에서
작가. 울별이티
주제. 고목(枯木) - 말라 죽은 나무
포샵 작품. 자작
푸르렀던 하늘을 향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쩍쩍 갈라져 떨어 질 것만 같은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걸까. 공허한 하늘을 바라본 건 불과 몇 시간도 안 된 것만 같은데 내 앞을 가로 막는 고목은, 내가 딛고 있는 건조한 땅은 내가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오랜 시간이 경과 됐다는 것을 대신 알려준다.
고목이 살아 있었을 때, 지금은 내 곁에 없는 ‘그’와 함께한 추억들도 함께 살았었다. 그 땐 사랑이란 따스한 숨결을 불어 넣어줬으니까. 하지만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일 뿐, 더 이상 예전의 사이로 되돌아 갈 수가 없다. 벌어 질대로 벌어진 쓰라린 상처를 아문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몇 백 년 동안 시골 촌구석에 있는 마을을 지켜왔던 듬직한 나무. 그 나무 아래 우연이란 기적이 일어나고 연인이란 정이 자라고 애인이란 사람과 마주했던 나무였는데 그 애인은 어디에,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내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게 있다면 고목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아네모네’란 꽃이다. 색깔별로 호화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던 꽃들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걸 말이다. 언제 한 번 그가 말해줬었다. 어른이 아닌 풋풋한 고등학생 시절 때. 아네모네는 아픈 사랑과 그리움, 괴로움, 허무한 사랑이란 꽃말을 지니고 있다고.
허무한 사랑…. 그건 그와 나의 로맨스 소설의 비극을 암시하는 복선 같은 역할인 걸까. 내 앞의 고목과 꽃들은 예전 같지 않다. 하나둘씩 마른 잎사귀와 꽃들이 떨어진다. 처음엔 나뭇잎 하나였다가 나뭇잎 셋, 꽃 한 잎, 꽃 두 잎, 꽃 세 잎, 꽃 한 송이…. 우수수 한 번에 떨어지면 후련할 텐데 하나씩 하나씩 떨어지니까 보고 있는 내 마음이 더 아려오는 것 같고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위태롭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이 흐른 걸 뻔히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은 내게 하롱하롱 손짓하는 마냥 날 유혹하듯 말을 거는 꽃과 나무. 꽃은 내게 사랑이란 원래 다 허무한 것이고 제일 비극적인 감정이사랑이라고 말하고, 나무는 지금은 아픈 시련이겠지만 나중엔 좀 더 좋은 사랑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다며 위로해준다. 그러자 마지막 남은 한 송이의 꽃은 늙은 나무에게 반박이라도 하듯 다시 말한다.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고, 여기에 안 온다는 것을. 그런데 왜 넌 여기를 계속 오는지를.
‘어쩔 수 없잖아. 잊을 수 없는 걸….’
한 걸음 한 걸음 그 꽃에게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숙여 그 꽃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런 후에 그의 생각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두 손을 가지런히 그 꽃을 감싼다는 듯이 손을 천천히 뻗으며 속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다고.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그를 잊을 수 없다고. 그러니 마지막 남은 붉은 빛 아네모네는 내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힘없이 떨어졌다. 이로서 허무하게 끝난 나무와 꽃의 다툼. 나와 꽃의 대화.
아마 나를 위로하는 힘없는 고목이 마지막 힘을 다해, 그 꽃이 더 이상 내 마음에 상처 주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메말라 죽은 나무, 그 나무의 이름은 고목. 예전처럼 날 위로해줄 힘이 없는 고목. 그 고목은 잠시나마 나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지 바싹 말라버린 나뭇가지를 내게 흔들어 보인다. 그 흔들림에 옅게 웃은 나. 내가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지, 고목의 나뭇가지 흔들림은 더 커졌다.
커지는 것도 잠시. 옅게라도 웃던 내가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자 나무는 시무룩한지 흔드는 것을 그만둔다. 내가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이유, 그건 아네모네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나의 존재를 잊어 이런 곳에 안 온다고.
나도 여기에 오는 것을 끊고 싶다.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예 없던 일처럼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매번 이렇게 생각하고 이젠 안 오겠다고 다짐을 몇 번 했지만 결국 제자리걸음. 똑같은 말, 똑같은 마음이 수 십 번 반복 된다. 질릴 때도 된 무한 반복 속에 난 깨우쳤다. 난 그처럼 여길 안 오고 싶은데 못 간다는 것을.
고목이 있는 곳에 안 간다는 것과 못 간다는 것은 확연히 다른 말이다. 뜻 또한 다르다. ‘안’과 ‘못’의 차이. 안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있어서 스스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못 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무리 확고해도 할 수 없단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안 가는 거겠지만 난 고목 아래 함께 했던 모든 감정들에 사로 잡혀 헤어나오지 못해 못 가고 있다.
‘나무야, 나 참 바보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바보같이…. 난 그에게 뭐고, 그는 나에게 뭐길래 항상 이렇게 헤어나지 못하고 앞을 나서지도 못한 채 혼자 이곳에 남아 멍하니 고목만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서 무슨 미련이 남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와서 행여나 그가 올까 기다린다. 만나지 못할 그인데. 이런 내가 한심스럽다. 과거를 걷고 있는 난, 내 앞의 고목에게 물었다. 내가 바보 같다고.
그런 내 질문에 고목은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한 나머지 천천히 다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 두 팔을 벌려 그 고목을 감싸 안으며 고목의 표면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런 내게 고목은 대답하기를.
‘아직 늦지 않았을 거야.’
이런 걸 애집이란 것일까. 너무 좋아해서, 너무 사랑해서 그에 대한 집착이 생겼단 것이란 게. 아니면 너무 그리운 나머지 옛 회상에 잠겨 있는 나일까. 오늘도 쓸데없는 두 가지의 생각에 잠겼다. 그와 내가 어깨동무를 하며 사랑을 얘기하던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한 이곳에서
…우리가 마주한 이곳에서. 그와 내가 함께 했던 나날로 돌아간다.
그와 내가 고등학생 때 살았던 촌구석 마을이다. 푸르고 넓게 펼쳐진 논 가운데에서 몇 백 년 동안 마을을 지켜왔던 나무. 그 때의 나무는 그 어떤 나무보다 크고 포근한 존재였다. 늙었지만 항상 푸르게 변함없는 나무 아래, 내 앞의 그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생 2학년 3월 초. 반 배정이 되고 나서 같은 반이 된 그와 나. 친하지도, 그렇다고 말을 해본 그가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나무와 얘기를 했다. 그를 만나기 전엔 그 나무가 나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무에게 말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던 나.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항상 그 나무의 밑에 꼭 붙어 함께 했다.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굳게 닫혀 있어 잘 열지 않았던 마음. 그 나무에겐 열었던 기억이 난다.
똑같은 생활이라 해도 그 나무만 있다면 질리지 않다고 생각한 어느 날. 나와 같은 사람과 마주쳤다. 바로 이곳에서.
‘갑자기 비 오네….’
해가 쨍쨍한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하나둘씩 모여들더니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가려면 못해도 2시간 하고도 3~40분을 더 가야하는 거리. 에라, 모르겠다 싶어 일단 뛰고 보자 생각하고 무작정 뛰는 나. 집까지 가긴 벅차니 나무 밑에서 비가 멈출 때 까지 기다려야겠다 싶어 방향을 틀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 커다란 나무 가지들 사이의 나뭇잎들이 비를 막아, 우산 역할을 한다. 그 아래에서 머리칼에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헝클어 털곤, 옷 끝자락을 짰다. 옷이 얼마나 많은 비를 흡수한 건지 짜도 끝이 안 보일만큼 계속 나온다. 생쥐가 물에 빠진 꼴. 이런 꼴로 집에 간다면 분명 엄마는 잔소리를 할 것이다. 장마시기엔 우산을 꼭 챙겨야 한다니, 여자가 왜 이렇게 준비성이 없는지… 라며. 누가 갑자기 이렇게 비올 줄 알았냐고.
항상 내가 날씨가 좋다고 생각하거나 우산을 뺀 다음 날에 비가 오는 변덕스러운 하늘. 이래서 내가 비를 싫어하는 것이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방금 말했듯이 엄마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듣는다. 이런 저런 비에 대해 엮기고 엮기는 생각을 하면 무조건 짜증을 내야 할 나인데… 신기하게도 오늘만큼은 비에 대해 짜증나지 않다.
그나저나….
‘비는 언제 쯤 그치려나.’
나무와 나만이 숨 쉬고 있는 이곳. 비는 언제쯤 그치려는지 몇 십 분이 지난 것 같은데 멈출 기세는커녕 오히려 더 오는 것 같다. 기다리다 지쳐서 나무에 등을 기대어 어둑한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다 비를 막고 있던 나뭇잎 끝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안 떨어지듯 버티다가 내 눈가 근처에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차가움을 느낀 난, 손등으로 쓱 닦곤 고개를 똑바로 했다. 그 때 보이는 한 사람.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는지 한숨을 쉬곤 머리를 흔든다. 최대한 물기를 짜내려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내 옆의 그가 누군지 보려고 빤히 바라보다 내가 보고 있단 걸 느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내려다본다. 마주한 두 눈. 깜짝 놀라 고개를 잽싸게 돌려 마치 안 본 듯 딴 짓을 했다. 몇 초가 지나서 이젠 날 보지 않겠지 생각하고 고개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렸다. 아직도 날 보고 있는 그.
‘안녕.’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 누군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같은 반 남자란 걸 알았다. 아니, 내가 알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알면 뭐 하는가. 같이 말 섞어 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어색한 걸. 고요한 침묵 사이에 들려오는 시원한 빗소리만이 들리는 순간. 어색한 것도 어색한 거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자체에 낯설어 하는 나라서 여길 벗어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때.
그가 내 팔목을 잡으며 아직 비가 많이 오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어쩌지 고민을 하다가 그의 말에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또 다시 찾아온 침묵. 싱그러운 큰 나무에 등을 기대어 우린 젖은 흙으로 발장난을 했다. 그러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어색함을 깨려는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그의 말이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좌우로 젓기만 하다가 하루가 지났지만 그 다음날, 그 다 다음날에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피하려다 몇 번 마주쳤다. 마치 비가 우리들의 사이를 밀어주는 것 같이 비를 피하다 나무 아래에서 만나는 일이 없지 않았다. 결국 친해진 그와 나.
‘우리 타임캡슐 만들래?’
타임캡슐을 만들자고 먼저 제안한 그. 친구가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기에 너무 설레어 수줍게 웃으며 살짝 끄덕였다. 자그마한 상자에 우리가 몇 개월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추억을 만들었던 물건들, 사진들을 아낌없이 넣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이고 아직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지만, 행복했던 순간의 마음도 넣었다.
이로써, 나의 불행은 끝이고 항상 행복한 일만 생긴다고 말했던 그. 평소처럼의 장난일거라 생각했던 그 당시의 난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는데 진짜 그의 말은 맞았던 걸까. 좋은 일들이 하나둘씩 내 곁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항상 바닥을 치던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다가 상위권까지 들었고, 가정의 불화로 집안이 시끄러웠었는데 평화로워졌다. 더불어 원래 친구라면 그와 나무밖에 없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내 가슴을 뛰게 한 ‘설레임’이다.
‘나랑 사귈래?’
그 당시, 따가운 햇살을 싱그러운 잎들이 손을 흔들며 가려줄 때, 당당하고 솔직한 그의 붉은 입술에서 나온 말. 나랑 사귈래.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를 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이런 게 사랑인 걸까. 멀쩡하다가도 그 말이 떠오르면 어김없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곤 했다. 몇 분의 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던 순간, 난 붉게 물든 볼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우리가 마주한 이곳에서
과거 회상에 잠기고 며칠 뒤, ‘그’만 생각하면 설레어 두근두근 거렸던 맘, 웬일인지 이제는 누그러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완전히 누그러진 것이 아니라서 그 미련에 참지 못해 오늘도 고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몇 시간을 줄곧 달려 도착한 곳. 커다란 고목 옆에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뭔가 싶어 그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갔다.
“오랜만이네….”
“…….”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내 앞의 그.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두 눈을 마주하고 바라본다면 보고 싶었다면서 와락 안겼을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였기에. 하지만, 이젠 아니다. 조금씩 내 마음이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감정이 무디게 변한 그처럼 내 심장이. 내 마음이. 그 때의 마지막 아네모네처럼 지고 있다. 한 줄기의 빛을 타고 내려와 숨결을 토해내던 심장이 차갑게, 더 차갑게…. 이런 내 심장, 그대는 알까.
“여긴 웬일이야? 난 여기가 그리워서 왔는데….”
그는 내게 여기에 어쩐 일이냐고 묻더니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흐릿하게 말하곤 끝내 끝말을 흩트린다. 일부러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식으로 그렇게 흩트린 건지, 아니면 나와 마주한 눈을 보고서 흩트린 건지 알 수 없는 지금. 그는 내게 물론 고목이 그리워서 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웠다며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하지만 그 눈가의 옅은 미소는 잠시, 내가 무표정으로 말없이 아무 반응을 안 하자 웃음을 뚝 멈춰버린다. 예전의 내가 아니란 걸 느낀 걸까….
어쩔 수 없는 걸. 그가 너무 그리웠고, 그를 너무 사랑했었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실망 역시 컸던 내 마음. 솔직하지 못했던 그와 나의 이별을 앞에 두고 하루종일 장맛비처럼 울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갔던 그였기에 혼자 생각했던 만큼 보고 싶단 생각이 안 든다. 그가 내 앞에서 날 반긴다는 것 역시 실감나지 않는다. 아쉬웠던 우리의 사랑만큼. 허무하게 끝난 연애감정인 만큼 어쩌면 난, 내 앞의 그가 사랑한 만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아네모네가 다 져버렸네.”
5월이 지난 지금. 아네모네가 질 시기인 게 너무나 뻔한데, 나보다 더 잘 아는 그인데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를 쓰는지 분위기와 맞지 않는 말을 한다. 그런 그가 한심해 보인다. 물론 나 역시 미련을 두고 있었던 것에 대해 한심했지만 지금은 그 미련을 버렸기에 내 앞의 그가 더 초라해 보인다. 고등학생 때까진 몰랐는데. 초췌한 옷차림, 부스스한 머리카락, 관리 안 해서 고목처럼 쩍쩍 갈라진 피부. 날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만난 바람둥이. 그런 그를 사랑했다니….
내가 왜 그랬을까. 그의 얼굴을 보니 허탈한 느낌이 든다. 그 때의 나는 그의 어디가 좋아서 사귀었던 걸까. 사람의 심리는 원래 다 그런 걸까. 한 사람에 대해 이상한 점을 보았거나, 정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내 눈엔 그 사람의 정 떨어지는 모습만 보이게 된다는 것을. 그를 바라볼수록, 그를 생각할수록 과거의 내가 너무 가여웠던 것 같다.
혼잣말, 그건 그가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려 발버둥 하는 말. 거짓말, 그에게 콩깍지가 씌어져 있는 상태에 날 속게 했던 말. 내 앞의 그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가식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정말 보고 싶었다니, 네가 많이 그리웠다니, 아직도 많이 사랑하는데 그 땐 내가 잠시 정신 차리지 못해서 그랬던 거라니, 이해를 해달라니…. 너무 흔해 빠진 빈 말.
“우리 다….”
“나 감기 걸렸었어. 지독하디 지독한 감기.”
내가 감기 걸렸다고 말하자 아부 하며 내게 다가와 두 손을 내 양쪽 어깨를 거세게 잡으며 아팠냐고 물어본다. 많이 아팠지. 혼자서 그 아픔을 등에 지고서 매일 어깨를 축 늘여 다녔었지. 독감보다 더 강력했던 ‘감기’란 사랑에 대한 아픔. 흔한 감기가 아니라서 떼어내려 고생을 많이 했다. 미치도록 그를 그리워 한 만큼 미치도록 감기에 찌들었었던 내 모습. 세상에서 제일 추할 줄 알았는데 아니란 걸 비로소 오늘 이렇게 그를 마주하고 나서 알게 됐다.
내 양쪽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내가 말한 감기에 대한 뜻을 말해줬다. 그러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날 바라보는 눈. 이젠 그 눈마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려 외면해 보지만 그가 하는 말에 다시 그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 와서….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20대 후반이 된 그와 나. 다시 시작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을 의미하는 건가. 어이없어 이젠 무의식중에 비웃음이 얼굴에 한가득 퍼진다. 뭐든 간에 ‘다시 시작’이란 말은 늦지 않다. 그냥 시작이라 말하고 최선을 못 다한 예전의 나보다 더 잘하면 되는 것이기에.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너무 멀리까지 서로가 다른 길을 걷고 있어서 다시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 말고 다른 여자와 현재의 길을 걷고 있던 그. 그런 그를 잊지 못해 과거의 길을 걷고 있던 나.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가 며칠 만에 같은 길 중앙에서 만나지 못하고 길이 엇갈려 완전히 달라졌다. 그와 내가 걷고 있는 길이. 그렇기에 그와 난 더 이상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고, 우리가 함께한 고목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달라져 버린 ‘우리’란 아련한 말.
“안 돼.”
나중엔 후회 할 텐데 나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마른 땅에 집어 던졌던 그. 그런 그에게 단호하게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잠시나마 내게 기대를 걸은 듯한 그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져간다. 하지만 그의 얼굴보다 굳은 건 나다. 모든 상처를 쥐고 있던 나 말이다. 고목에서 처음 만나 고목에서 추억과 사랑을 쌓고 기나 긴 시간을 모두 다 버린 그. 결국엔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린 그와 나의 연대감.
이 모든 걸 복잡하게 헝클인 건 그였고, 내게 상처를 준 것 역시 그였다. 그런 그에게 ‘다시’란 말 같은 건 없다. 오래전에 끝난 그와 나의 소설 같은 사랑. 차라리 사랑이란 감정이 아예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서로 힘들게 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우리는 그 어떤 인연이 아닌 악연인가보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악연 중의 악연. 그와 난 서로 악연이었기에 누구보다 처참하고 누구보다 비극적이다. 너무나 비극적인 그와 나.
한 때 사랑했었던 그를 향해 한 마디를 남기곤 뒤로 등지었다. 어느새 빗물로 힘없이 흔들리는 고목 아래에서 남긴 말. 그 말이 끝이 났을 땐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거세졌다.
그 거센 빗소리에 묻혀버린다. 고목 아래에서 함께한 그와 나의 추억들도 함께.
‘너무 늦었어.’
애당초 그와 나에겐 사랑이란 감정은 없었다. 고목을 종착지로 삼은 그와 나의 길은 달랐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마주한, 그와 내가 고목을 바라보는 눈은 서로 달랐다. 우리가 마주한 이곳에서의 결말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같은 고목 아래 다른 마침점을 찍는 그와 나. 다른 커플과 조금 다른가보다. 아주 조금….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다시 단편방에 돌아온 울별이티입니다.
지난 단편 소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란 소설이 놀랍게도;;
전혀 예상 못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ㅠ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소설은.. '아, 그냥 그렇게 끝났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다른 소설을 보고 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제가 쓸 때도 슬프지가 않다.. 란 핑계를 둘러대고 싶어요.
실.. 실망 많이 하셨을거예요. 제가 기대 하지 말라고 하셨는뒙 ㅠ
여기까지 봐주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단편방을 찾아오련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주목, 지난 단편 소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란 소설은 비록 단편으로 밝혀졌지만
다음에 시간 날 때 장편으로 새싹연재방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기, 기대는 하시지 마시고요
일단 지금 쓰고 있는 중편 소설이나 열심히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 글도 지지리 못 쓰는 울별이티었습니다.
첫댓글 내자리
☆ 그래 니 자리가 너무 길구나 ㅋㅋㅋㅋㅋㅋㅋ
훗 3일동안 잠적....ㅋㅋ 자리만 찜뽕해놓고 ㅋㅋ 헐... 아련하지만 저런 사랑 언제쯤 해볼려나.....ㅋㅋㅋ.... 글 지지리도 못쓴다는 말에 울컥 ㅋㅋㅋ 아 난 글 쓰면 안되겠구나 요생각이 갑자기 ㅋㅋㅋㅋㅋ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편도 기대하겠쒕!! 추천!
넌 글 쓸 자격있어. ㅋㅋ 내가 문제인 거임. 하 ㅠ ㅋㅋ 장편은 한~참 뒤에 쓸 거임.
찌잉...감동이다 이티야. 아니 진짜 첫문단 읽는데 완전 소름돋아. 진짜 왜이렇게 잘썼니ㅠ^ㅠ 우리 이티 지대작가다리 노려볼만한데+_+!! ㅋㅋㅋㅋ 그러니 항상 화이팅해!! 이티넌 작가가 될수있어!! 그약속 잊지않았지 작가되면 만나기루 했잖어ㅠ^ㅠ 우리좀더 커서 꼭 만나자. 진짜 소설 대박. 완전 잘읽고간다!! 안슬프긴 개뿔. 슬프긴 슬펐다고ㅠ^ㅠ 무튼 다음에 또 단편으로 찾아오면 꼭 연락하기를!!
☆ 내가 처음으로 묘사를 질리도록 한 소설이 아 단편 하나인 듯 ㅋㅋ 난 노려보기엔 실력이... ㅠㅠㅠ 우헹헹 없어 ㅠ 그래도 없으면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열심히 하려고 ㅋㅋ 우리 꼭 만나연 ㅋㅋ 단편 언제 또 쓸지는 모르겠지만 연락 삐링하겠숭 와줘서 고마워 ㅠㅠ
아냐아냐.. 슬퍼... 슬프면서도 잔잔하구 아련하다구..ㅠㅠ나 잠깐 눈에 눈물 맺혔다구...ㅋㅋ 언니가 글을 이렇게 잘쓰는데 지지리도 못한다구우..? 자기 비하하지 말란말이야.... 이상 언니 소설을 좋아하는 나란인간 이였습니다. 추천누르고!!ㅎ
☆ 이 이런 것에 눈물 맺히는 사람 없어 ㅋㅋ 내 친구들은 저거에 우냐고 독설을 미친듯이 내게 퍼부엇다지 ㅋㅋ 나란 인간 오즐이를 아끼는 인간슴돠ㅋㅋ 추천 고마워!
ㅠㅠ글 지지리도 못쓴다고요?완전 잘쓰시는데 ㅠㅠㅠㅠ 그리고 모가 안슬퍼요 은근 슬픈데 ㅠㅠㅠㅠ 뭔ㄷ가 너무 불쌍해요둘이 ㅠㅠㅠ 추천이요 !
☆ 어허허 못했으니까 떨어진 거죠 ㅋㅋㅋ 결과는 뻔했던 ㅋㅋ 결말은 조금 이상할지 몰라도 저 둘에겐 뭔가 신비하면서도 아련하게 끝내고 싶었어요 ㅠㅠ 이런 소설에 추천을;;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지난 단편에서도 우시더니 이곳에서도 우시는 군요 ㅠㅠ 이렇게 매번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번꺼보다 이번게 훨씬 정말 눈물날 정도로 내타입에 재밌었어요.잘보고 갑니다!!!
☆ 아 지난 소설이라면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을 말하시는 건가요? 어쩼든 마음에 드신니 다행입니다!
저번에막새싹소설4방에서울별이티님꺼단편찾다가없어서어딨지이러고있었는뎁ㅋ아전폰으로보는거라가상방에있는바로가기못하거든요ㅋ뭔가슬프게끝나네요ㅠㅠ근데그한지붕아래서그소설도새싹4방에서하는거에요~?
☆ 아아 모든 단편은 원래 단편연재방에서 연재하는 거랍니다. 물론 정회원부터 가능하지만요. 한지붕아래 소설은 원래 새싹4에 예정이지만 독자분들이 원하셔서 3으로 옮겨 동시연재 가능성이 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정말요? ㅠ 부족한 소설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너무 아련하군요..잘 보다 갑니다^^
☆ 엄허 아련하단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용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