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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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37:16~22
성경에서 말하는 구름의 메타포(은유)는 하나님의 강림으로 인한 영광을 뜻합니다
출애굽시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불가운데 강림하실 때 나타난 자연적인 현저한 특징이 있었다면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과 나팔소리와 산의 진동함이였습니다
여기서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난 자연적인 빽빽한 구름은 먼훗날(약 오백년후?)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 또다시 재현됩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지성소)로 메어 들이고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 합니다
때문에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였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지성소안에 들어가야 할 언약궤가 안치 되었을 때 비로서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찬 것을 봅니다
이 언약궤의 영광으로인해 하나님께서는 휘장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때가 찰 때까지 휘장을 쳐
분리시키도록 하셨읍니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라고 부르기도 했읍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휘장된 자기 육체를 찢음으로 지성소 안에 임재하신 여호와의 영광을
우리들 속에다 발현시킬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읍니다
이렇게 우리들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강림할 수 있는 하나님 임재의 영광을
겨냥한 진리(본 뜻)를 구름이란 메타포에 숨겨 놓은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듯 비유속에 진리이신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숨겨 놓았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 강림이란 이 놀라운 은혜가 선물이 되어
내 속으로 들어 오게 되면 나는 비로소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 차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나면 도무지 나는 능히 하나님을 서서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겨 왔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착각이며 오만과 패기와 교만이였다는
걸 깨닫는게 은혜입니다
이리 되면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인내로 나를 섬겨주셨다는 것에
설 수 없어 비로서 엎드러지게 됩니다
이 항복이나 겸손은 그분의 은혜로 거저 받은 선물로서의 새 생명인 부활의 성품인 것입니다
비로소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내게서 새 일의 시작일뿐인 첫 봉우리가 터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가운데서 나란 사람은 유일한 한 사람이지만
우리들 각자 무의식 속에는 복잡 다양한 자아의 군상들이 혼돈과 어둠속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태초의 첫째날에 비추이라한 그 말씀의 빛이 비추어지면서 알아 가게 됩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깊음을 어둠이라 부르셨읍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어둠을
선과 악이란 이분법으로 비판 정죄 분리하기에 다급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죄악시, 사단시 할 때도 있읍니다
이 세상 신이 복음(성경)속에 깃드인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조차 선악을 따먹은 논리로 똑부러지게, 혹은 경계선 분명하게
일목요연하게 간추린 문장으로 제출하기를 좋아합니다.
무엇이 이 세상 신일까 생각해봅니다
한 때 나도 이런 경향을 무척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런 경향속에 하나님께서 명명하셨던 그 어둠이 더 더욱 짙은 설움과 회한과
다량의 눈물속에 예전보다 더 깊이 빠져버린 것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천 개인듯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픕니다
내가 이 잘못을 어찌 만회하고 갈까?가 내 인생 남은 명제가 될만큼 아픕니다
마치 선악과처럼 보기 좋고 아름답고 무엇보담 더 그토록 지혜를 사모하던 나에게
이런 것들은 나를 지혜롭게할만큼 탐스러운 연구 결과(열매)가 된 셈입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가도 이리 늦게라도 알게 해주신 것만도 감개무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세상이 곧 나였읍니다
때문에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보며 걸어가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걸어 다니는 거룩한 성전이 된 내 안에 가득찬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으로
아직도 꺽이지 못한 자아의 군상들이 그 빛에, 그 사랑에, 그 말씀으로 섬겨주심에
절로 하나 둘 씩, 한 군단, 두 군단씩 무릎이 굽혀지길 기도합니다
우리들 무의식 저 수많은 자아의 군상들이 하나같이, 한결같이 다 무릎 끓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같은 자들을 매개로 발현한다는 걸 기대하지 않는 자는 비극입니다
이러한 것에 얼마나 우리는 애통할까요?
엘리후는 욥으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읍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그리도 하나님을 잘 안답시고 끝까지 당신이 옳다는 의에 숨어서
그 많은 주장을 열거했으니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 할 수 있는 말을 가르쳐 달라합니다
당신은 우리들은 당신처럼 밝지 못하고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어째 그리 할 말 다하고 사십니까?
나는 하고픈 말을 다하면 그분께서 나를 삼킬까 두려운데 말입니다
어르신!
할 말이 산더미 같을 때 좀 참으시면 안되십니까?
어떨 때는 궁창의 광명이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엘리후는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온다 합니다
놀라운 계시입니다
그토록 보고팠던 궁창의 광명(고난에 관한 구속사적인 해석, 여호와, 그리스도, 진리)이
바람이 지나 가는데 필요한 시간을 기다리고 나면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엘리후~
성경에서 북방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정사와 권세의 집행소를 뜻합니다
엘리후는 보좌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두려운 위엄"으로 묶어 표현합니다
그러나 엘리후 이후 신약의 성도들은 그 두려운 위엄의 보좌가
긍휼을 집행하는 은혜의 보좌가 되어 있다는 것에 즐거움과 담력을 가지고 때를 따라 달려 갑니다
우리들의 신분이 직분이나 직임을 뛰어너머 있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국 신분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아버지로 살갑게 다가 오지 않는다면 이를 놓고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은 결코 추상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 영광이 아직도 추상화를 보듯하고 뿌옇기만 하다면 내가 의식하든 못 의식하든
결과론적으로 보면 나는 세상 신과 아직 야합한 상태라는 걸 자각하며 깊이 애통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신 영광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 내 생각의 뇌관들이 능히 알아갈 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된 몸으로서의 내 지체들이 능히 알아 갈 수 있는 영광입니다
첫댓글 큐티본문(6/5)-욥기37:14~24
심오한 말씀,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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