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28·KB금융그룹)나 최연소 ‘기록 제조기’ 리디아 고(19·뉴질랜드), ‘괴력의 장타자’ 에리야 쭈타누깐(21·태국)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한 선수가 있다. 사상 최초로 한 해에 US여자주니어챔피언십과 US아마추어챔피언십 동시 석권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성은정(17·영파여고2)이 그 주인공이다. 비록 성인 무대가 아닌 아마추어 대회에서 나온 기록이지만 의미가 작지 않다. 15일 개막한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에비앙 챔피언십에 출전한 성은정은 아마추어가 아닌 세계 정상급 스타들과 기량을 겨루며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지난해 US여자주니어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만 해도 성은정은 큰 주목을 끌진 못했다. 골프에 대한 자신감도 크지 않았다. 그러다 2015년 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에 갤러리로 갔다가 리디아 고의 실수를 본 게 심리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성은정은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가 1m 거리에서 3퍼트를 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더라. 최고의 프로도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털어놓았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성은정은 널리 알려진 ‘트리플 보기 악몽’을 겪은 뒤 정신적으로 더 단단해졌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에서 마지막날 3타 차 선두로 우승을 눈앞에 뒀다가 72번째 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기록하며 무너진 것이다. 결국 성은정은 연장 승부 끝에 오지현(20·KB금융그룹)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성은정은 “준비도, 자신감도 없이 치렀던 대회다. 결과는 아쉬울 수 있지만 우승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대회를 통해 갑자기 유명해졌다. 최악의 상황을 겪고 난 뒤 오히려 멘털이 더 좋아졌다. 골프 인생의 전환점이 된 대회였다”고 덧붙였다. 생각이 많았던 성은정은 이후 루틴을 단순화했다. 이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성은정은 US여자주니어와 US아마추어 챔피언십을 잇따라 제패했다.
장타라면 밀리지 않는 성은정도 태국의 쭈타누깐을 ‘파워퀸’으로 꼽았다. 그는 “쭈타누깐과 꼭 같이 쳐보고 싶다. 드라이버가 똑바로 가면 쭈타누깐을 따라올 선수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쭈타누깐보다 드라이버를 멀리 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성은정은 “쭈타누깐은 드라이버를 빼고 경기하는 경우가 많다. 장점을 제대로 못 살리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그는 “드라이버로도 티샷을 똑바로 보낼 자신이 있다. 적어도 한 라운드에 10번은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쭈타누깐은 2번 아이언을 누구보다 잘 다룬다.2번 아이언으로 드라이브 거리인 250야드를 날려보낸다. 성은정은 “2번 아이언은 딱히 쓸 때가 없어서 뺐다. 예전에 쳤을 때는 비거리가 220야드쯤 나왔다”고 말했다.
키 174㎝의 성은정은 탄탄한 체구를 바탕으로 드라이브샷 거리가 280야드를 넘나든다. 농구 선수 출신인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조기 트레이닝’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밸런스 훈련을 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만들어준 스케줄 대로 훈련을 하다 보니 다른 또래에 비해 체력이 좋은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파워 히터’ 성은정의 스윙 스피드는 시속 107마일(172㎞)까지 나온다. 올해 국내에서 7승을 거뒀고, 장타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는 박성현(23·넵스)의 105마일(169㎞)보다 빠르다. 쭈타누깐의 최대 스윙 스피드는 110마일(177㎞)이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의 평균 스윙 스피드는 112마일(180㎞). 성은정은 “쭈타누깐이나 박성현 같은 장타자와 함께 치면 남자 선수와 라운드를 하는 느낌이 든다. 거리가 짧으면 먼저 가서 샷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라고 고백했다.
아마추어 무대를 정복한 성은정의 다음 목표는 프로 대회 우승이다. 성은정의 눈부신 성장세를 본다면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전망이다. 임경빈 JTBC골프 해설위원은 “성은정은 차분한 스윙으로 힘들이지 않고 멀리 때리는 스타일이다. 아이언샷은 물론 퍼팅도 수준급이라서 지금 당장 LPGA 투어에서 뛰어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성은정은 나이(만 16세 10개월) 제한 탓에 당분간 LPGA의 정회원이 되기 힘들다. 하지만 리디아 고나 렉시 톰슨(21·미국)처럼 LPGA가 나이제한(만18세 이상)을 풀어준다면 일찌감치 프로 무대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는 “만약 기회가 된다면 LPGA투어에서 뛰고 싶다. OB가 별로 없고 장타자에게 호의적인 미국 코스가 내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로가 된 이후의 목표는 도쿄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다. 그는 “116년 만에 여자 골프 금메달리스트가 된 박인비 언니의 뒤를 잇고 싶다”고 밝혔다. 리우 올림픽을 보면서 그의 롤모델은 박인비가 됐다. 성은정은 “박인비 언니가 우승을 하지 못했더라면 올림픽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상에다 압박감이 심한 역경 속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인비 언니의 모습이 정말 멋졌다”고 했다. 그는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깨무는 세리머니를 꼭 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성은정은 박인비처럼 빼어난 퍼팅으로 아마추어 무대를 정복했다. 본인도 최대 강점으로 퍼팅을 꼽았다. 그는 “최근 아마추어 대회 때 1.5m 이내의 퍼팅은 놓친 적이 없다. 3~4m의 거리에서도 성공 확률이 60~70%는 됐다”고 했다. 그립을 크로스핸드로 바꾼 뒤 퍼팅에 자신감이 붙었다. 박인비, 리디아 고가 크로스핸드 그립을 사용하고 있지만 성은정에게 영향을 준 건 조던 스피스(미국)였다. 그는 “지난해 스피스의 경기를 보고 영감을 얻어 크로스핸드 그립을 시도해봤다. 이후 쇼트 퍼트가 더욱 정교해졌다”고 설명했다.
성은정은 곁을 따라다니며 캐디를 맡았던 아버지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며 해고할 정도로 강단이 세다. 벌써부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17세 장타 소녀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