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의 예언과 정보통신문화
유 · 불 · 선 삼교에 통탈하시고, 선교(禪敎)를 겸수하셨으며, 교학 중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탄허 스님께서는 생전에 수많은 예언을 남기셨다.
스님의 예언은 주역과 음양오행설, 그리고 김일부 선생의 정역(正易)등에 근거한
것으로, 스님에게는 여기(餘技)와 같은 것이었지만, 길흉화복에 웃고 우는 미혹한
대중들은 스님이 선지(禪旨)와 학행(學行)보다 예언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6.25동란, 삼척 · 울진 공비침투 사건, 미국의 월남전 패배, 박정희 대통령과
마오쩌뚱의 사망,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스님의 수많은 예언들은 적중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조만간 천지개벽이 일어나 강대국의 핵폭탄이
저절로 폭발하고, 전 인류의 대부분이 일시에 사망하며,
일본 국토의 1/3이 침몰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과 동해가 육지로 변하고, 만주
땅 우리 것이 되며, 우리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 이상의 산유국이 되고, 곧이어 남
북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찬 예언들은 그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는지 실현
될 조짐이 없다.(金呑虛 著,《부처님이 계신다면》 참조).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보는 숙명론은
도덕과 수행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견(邪見)이기에 배척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완전히 열려 있다고 보는 사르트르(Sarttre)
식의 극단적 자유론이 옳다는 말은 아니다.
불교의 인과응보설이나 아뢰야연기론에서 가르치듯이, 우리가 현생에 받고 있는
모든 것은 과거 또는 전생에 지었던 업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전생에 지었거나 현생에 짓고 있는 업들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하나 씨앗으로 결실된 후 미래의 언젠가 발아(發芽)하여 과보로
나타나기 위해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성숙하고 있다.
예언이 들어맞는 경우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된 업종자의
의미를 그대로 해석하거나 직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업종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어떤 예언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현재 우리가 짓는 행위에 따라
업종자에 변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전생이나 과거의 악업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계행(契行)을
다짐한다면 마음 창고 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며 익어가던 악업의 씨앗들은
거 성장을 멈추고 쇠락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매일매일 적극적으로
선업을 지으며 살아간다면, 그로 인해 야기될 행복의 과보가
내생이 아닌 현생에 미리 나타나기도 한다.
《명심보감》에서도 "착하게 살아가는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잇다
〔積善之家 必有餘慶〕."고 말한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인과응보설은 극단적인 숙명론도 아니고 극단적인 자유론도 아니다.
미래에 우리가 겪을 일들이 대체로 결정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가 지금 무엇을
짓는가에 따라 미래는 변할 수 있다. 탄허 스님의 예언이 간혹 적중하지
않았던 것은 인과응보의 이러한 가변성(可變性)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탄허 스님의 예언들 중 지금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님께서는 앞으로 화엄의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즉 비단 불교계 내에서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이 화엄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며, 이런 화장장엄
(華藏莊嚴)의 미래세계는 한국사람들에 의해 선도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화엄학을 공부하고 있지 않고 공부하려
하지도 않는데,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고 모른다.
그런데 화장장엄세계를 컴퓨터와 인터넷과 휴대폰이 주도하는 현대의
정보통신사회와 동치 시킬 경우, 스님의 예언은 그 의미가 살아난다.
방대한 《화엄경》의 가르침을 짧은 시구로 요약한 의상(義湘) 스님이
〈범성계〉에서는 한 티끌 공간 속에 온 우주가 들어가고〔一微塵中含十方〕,
한 찰나의 생각에 무량겁의 시간이 담겨 있다고 노래한다〔一念卽是無量劫〕.
한 톨 먼지 크기의 공간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고, 한 순간의 생각에 온
시간이 담겨 있기에 언제 어디서든 그 누구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누구나 모든 것을 갖추신 부처님이란 말이다.
사실 물리적 측면에서 보아도, 우리 눈동자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온 우주의
모습이 모두 빨려 들어온다. 이것이 세상의 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진상을 모르고 자신을 못나고 부족한 존재라고 착각한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무명 중생이다.
그런데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에 의해 주도되는 현대의 정보통신 사회는 우리와
같은 무명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만들어 준다. 손톱만한 메모리 칩 속에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온갖 정보가 담겨 있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의
단말기에 누적된 모든 정보와 만날 수 있으며, 언제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도
휴대폰을 통해 항상 모든 사람과 교신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나는 모든 것과 만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一切智, 全知〕,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神通, 全能〕.
이렇게 '한 티끌 만한 공간 속에 온 우주를 담는 화엄적 문화'인 현대의
정보통신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심은 각별하다.
컴퓨터와 휴대폰 보급률, 인터넷 통신망, 메모리 칩 생산 등의 분야에서 우리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개발은 서구인들이 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우리가 가장 적극적이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컴퓨터 게임의 경우
전세계 100위 권 이내를 우리 청소년들이 석권할 정도로 그 성취가 놀랍다.
우리 민족의 이런 화엄적 성향은 오늘날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불교의 경우 겉모습은 선종이지만, 정토, 화엄, 진언등 대승의 온갖 사상이
녹아든 통불교적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최근에는 남방의 위빠사나와 티베트불교까기 흡인하려 한다.
벽촌에 가도 술자리만 벌어지면 김대중이가 어떻고 이회창이가
어떻다는 거대담론이 오가며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
어린아이가 말문이 트일 정도가 되면, 피아노, 웅변, 속셈, 미술, 영어 등 온갖
학원을 순례시킨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런 성향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는 노예'가 아니라 '모든 것을 총괄하는 주인'으로
살아가려는 심성이며, '천수천안의 보살'이 되려는 마음가짐으로 전화될 수
있는 불교적인 심성이다. 현대의 정보통신 문화를 대하는 우리 청소년들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이유도 그 핏속에 흐르는 종합과
회통의 유전인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진정한 화장장엄세계로 만들기 위해 앞으로
우리 불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정보통신문화에 '윤리'의 지침을 제
공하고 '자비'와 '지혜'의 거름을 대는 일일 것이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