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본 장 13장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하고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 무엇을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하는가 총애는 하찮은 것이니 얻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하고 잃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한다 이것을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한다 무엇을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고 하는가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니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자기 몸을 더 소중히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之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也. 及吾无身, 有何患. 故貴爲身於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 愛以身爲天下, 安可以寄天下.1)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하고,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고주에서는 앞구절을 모두 이렇게 풀이한다. '총(寵)'을 동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마서륜) 따르기 어렵다. 단지 이렇게 읽더라도 그 뜻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소철은 "옛날의 달인은 총애에 놀라는 것이 욕됨에 놀라는 것과 같았다. 총애가 욕됨에 앞서 찾아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기본이다. 곧 "총애를 얻게 되면 그 안에는 반드시 욕됨이 있기 때문에(왕필)" 욕됨을 받는 것처럼 총애를 받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하는 사람은 성인이거나 깨달은 사람이다. 이와는 달리 이 문장의 주체를 깨달음에 못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령 성현영은 "사람이 총애를 얻으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욕됨을 받으면 두려워하고 근심한다. 그러므로 총애를 얻으면 마음이 놀라면서 기뻐하고, 욕됨을 받으면 놀라면서 두려워하니 기뻐하고 두려워하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놀라는 것은 똑같다"고 해설한다. 곧 "총애나 욕됨이 찾아올 때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뛰어난 선비인데(육희성)" 그런 부동심이 없는 사람은 총애나 욕됨에 놀라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견해는 '놀란다'는 것이 성인의 정서가 아니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철이 말한 대로 "놀라는 듯이 한다는 것은 실제로 놀라는 것이 아니라 놀라는 듯이 하는 것뿐"이므로 큰 혐의가 없다. 만약 성현영 등을 따르면 아래 글의 뜻이 전부 어그러지므로 전자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 소철 외에 왕필·하상공·동사정 등 대부분의 해설이 이렇게 본다. 두 번째 구절의 '약(若)'은 하상공을 따라 이른다〔至〕는 뜻으로 본다. 이렇게 보아야 의미가 간명하다. 이 '약'자도 앞의 '약'자처럼 '같다'는 의미로 본다면 본문은 "큰 근심을 조심하기를 마치 몸을 조심하듯이 한다"고 옮길 수 있다. 이렇게 보아도 의미는 통한다. 전체적으로 이 글(13)은 중생 사상을 담고 있고, 이 해석도 그런 의미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상공의 간명함이 낫다고 본다. 여기에서 '귀(貴)'는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두려워한다(畏: 하상공), 어렵게 여긴다(難: 소철)는 뜻이다. 이 구절에도 여러 독법이 있지만 대개는 이 글 전체의 요지인 중생 사상에 어긋나므로 일률적으로 취하지 않는다. 결국 이 문장은 총애의 반대면에는 욕됨이 있기 때문에 욕됨이 달갑지 않은 것처럼 총애도 달갑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랑이 깊으면 설령 배반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사랑이 식어가면서 괴로워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얻었다고 기뻐하지 마라. 이것이 이 늙은 선생(노자)의 충고다. 총애나 욕됨이 달갑지 않은 이유는 결국 그로 인해 환란이 몸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큰 근심이 몸에 닥칠까 조심한다"고 하였다. 사실 곧이어 『노자』가 말하듯이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몸은 이미 있기 때문에 『노자』는 조심스럽게 모든 가능한 위험을 피함으로써 몸을 보존하고자 한다. 높은 벼슬을 보장하는 초 위왕(威王)의 초빙을 마다한 장자의 정신도 이랬을까? "당신은 희생에 쓰이는 소를 보지 못했는가.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맛있는 꼴과 콩을 먹지만 사람에게 끌려서 태묘로 들어갈 때는 비록 엄마 잃은 불쌍한 송아지처럼 되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될 수 없다(「열어구」)." 지금 해설하고 있는 문장은 초간문에도 나온다. 초간문과 백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초간문에는 문장 앞머리에 '인(人)'자가 하나 더 붙어 있다. 팽호는 이것을 보고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초간문은 이 글(13) 앞에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亦不可以不畏〕"는 문장이 있다. 그러니까 초간문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人) 총애나 욕됨에 모두……" 이런 식이다.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은 통행본 20장의 앞부분인데 초간문에는 그 뒷부분이 나오지 않고, 곧바로 이 글(13)이 글 앞에 '인(人)'자를 달고서 뒤따라 나오는 것이다.2) 그런데 백서 을본을 보면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절 뒤에 '인(人)'자가 더 붙어 있다. 정리조는 이것이 잘못 들어간 글자라고 하였다.3) 팽호의 재미있는 주장은 이 '인'자가 왜 잘못 들어가 있을까에 관한 것이다. 곧 그는 『노자』를 편집한 사람이 초간문을 보면서 '인'자 전에서 구두해야 할 것을 실수로 잘못 구두하여 '인'자까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에 붙여 읽었다고 주장했다. 초간문을 보면 '외(畏)' 뒤에 단구 부호가 있기 때문에 '인'자는 이 문장에 속하는 글자가 확실하다. 결국 『노자』의 편집자는 초간문을 잘못 끊어 읽고 '인'을 포함한 초간문의 글을 모두 옮긴 뒤 그 뒤에다 새로운 글을 추가하여 통행본 20장에 해당하는 글을 만들어냈다. 그런 이유로 을본에 '인'이 쓸데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4)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흥미있는 추론이다. 만약 이 추론이 옳다면 원래 이 문장은 "사람은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하고……"였던 셈이다. 총애는 하찮은 것이니 얻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하고 잃을 때도 놀라는 듯이 한다. 이것을 총애나 욕됨에 모두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한다 寵之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첫 번째 구절은 여러 판본에서 세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총애는 하찮은 것이다(寵爲下: 왕필·고환·육희성 등)."5) "욕됨은 하찮은 것이다(辱爲下: 하상공·소철·오징 등)." "총애는 귀중하고 욕됨은 하찮은 것이다(寵爲上, 辱爲下: 이도순·장사성·구재질 등)." 백서는 첫 번째 형태와 같고, 결론적으로 이것이 옳다. 마지막 형태는 보다 이른 판본에는 보이지 않는다. 뜻을 감안하여 후대에 고친 듯하다. 두 번째 형태는 하상공본 등에 나오는데, 하상공본의 경우 본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다음 두 구절의 해설을 보면 실제로는 욕됨이 아니라 총애에 대한 것이다. 또 하상공본에는 이 구절에 "욕됨은 하천(下賤)한 것이다"라는 주가 달려 있지만 고환본에 인용된 하상공주를 보면 "총애와 욕됨은 하천한 것이다"라고 하여 앞에 '총(寵)'자가 하나 더 붙어 있다. 욕됨은 원래 하천한 것이므로 원래 "총애는 하찮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욕됨을 같이 거론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철도 "총애는 하찮은 것이다"로 된 판본도 있다고 하면서 해설에서는 이 측면을 주로 설명한다. 아마도 "총애는 하찮은 것이다"라는 문장이 상식에 반한다고 생각한 후대 사람이 '총'을 '욕'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초간문도 첫 번째 형태로 되어 있다. 총애가 하찮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욕됨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총애가 욕됨의 근본이며, 총애를 받은 이후에 욕됨이 있기 때문에 하찮은 것이라고 하였다(동사정)." 그렇기 때문에 "총애를 얻음에도 놀라는 듯이 하고 총애를 잃음에도 놀라는 듯이 하여 총애에는 편안해 하면서 욕됨에만 놀라지 않는다(소철)." "총애(寵榮)를 얻음에 놀란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치 깊고 위험한 곳에 임한 듯하는 것이며", 총애를 잃음에 놀란다는 것은 "재앙이 거듭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하상공)."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니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也. 及吾无身, 有何患 몸이 있기 때문에 근심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보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다. 모든 수양의 목표는 몸을 마음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어떤 전통에서는 몸을 부정하는 정신이 자라난다. 고련으로 자기 몸을 학대하거나 궁극적으로 몸을 죽여서 깨끗한 생명으로 재생하려는 의식들이 모두 그런 것에 속한다. 때로는 이 문장의 해설에서도 그런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능히 천지 위화(委和)가 모두 나의 실유(實有)가 아님을 알아서 형체를 떠나고 지혜를 버리며, 몸이 몸이 아닌 것을 깨우치고 대도와 함께한다면 다시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현종어주)." "몸을 잊고 정신을 기르는 것을 몸이 없다〔無身〕고 한다(절해. 고환본)." "좌망(坐忘)하고 나를 잃으며, 몸을 늘어뜨리고 형체를 떠난다. 몸에 나아가면서도 몸이 없으니 몸이 괴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없다고 하였다(성현영)." 주로 도교·불교의 영향을 받은 해설에서 이런 설명이 나온다. 하상공도 "내가 만약 몸이 없어서 도를 얻고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가볍게 구름을 날고 무간(無間)을 출입하며 도와 함께 신명에 통할 것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하여 이런 식으로 해설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나중에 삽입된 설명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의식의 중국적 연원을 찾으면 『장자』가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설이 주목하는 『장자』의 '좌망'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도교·불교의 영향이다. 원래 '좌망'은 몸을 부정하는 사유가 아니라 지혜를 부정하는 사유다. 『노자』의 경우 몸이 있기 때문에 근심이 있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몸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사유로 나아간다. 몸이 환란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몸은 이미 있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골칫덩이를 잘 간수하지 않으면 삶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삶이 꼭 몸으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몸만큼 삶을 잘 대변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몸은 더욱 소중하다. 또한 모든 위험에서 몸을 안전하게 보전하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삶에서 몸보다 더 비본질적인 것, 가령 명예나 재산 따위 때문에 삶을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다면 그만큼 '내 삶'을 온전하게 지켜줄 사람은 없다. 그는 천하의 주인이 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아래에서 『노자』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위하는 것보다 자기 몸을 더 소중히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위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故貴爲身於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 愛以身爲天下, 安可以寄天下 이 문장은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며, 그 종류도 대단히 많으므로 일일이 비교하기 어렵다. 백서 갑·을본이 일치하고, 초간문도 지워지지 않은 부분에서 백서와 일치하기 때문에(초간문은 을본처럼 문장 마지막에 '矣'가 있다. 나머지는 같다) 이것이 원래 『노자』의 문장이다. 통행본 중에는 백서와 완전히 일치하는 판본이 없다. 통행본과 비교할 때 특이한 것은 부혁·사마광·범응원본을 제외한 모든 판본에서 '맡기다〔託〕'는 글자와 '준다〔寄〕'는 글자가 서로 자리를 바꾸어 나온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이 두 글자의 의미를 구별하여 전자는 영원히 맡긴다는 뜻이고 후자는 잠시 맡긴다는 뜻이라는 해설도 있었다(성현영·왕진·동사정 등). 이때는 첫 번째 구절을 부정적 의미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노자』의 다른 글(72)에 "스스로를 중히 여기면서도〔愛〕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貴〕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72)에서는 보다시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 좋지 않은 뜻이다. 또 이 글에는 지금 『노자』 문장처럼 앞뒤로 '귀(貴)' '애(愛)'라는 글자가 나온다. 그래서 두 글을 비교할 경우 지금 문장의 첫 번째 구절은 부정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준다〔寄〕'는 글자도 단지 잠시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축소 해석하게 된다. 하지만 백서를 보면 이 두 글자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약(若)'은 '즉(則)'와 같은 뜻이다. 많은 통행본에서도 그렇고, 이 문장을 인용하고 있는 『장자』 「재유」에서도 '약'이 들어갈 자리에 '즉'을 썼다. '즉'은 '내(乃)'와 같다. 그러므로 이 글(13)에는 세 가지 용례의 '약(若)'이 등장하는 셈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안(安)'은 '언(焉)'과 같다. 이때 '언'은 종지사가 아니라 '이에〔於是〕'라는 의미로 문장 앞에 붙는 말이다. 「도응훈」에서 이 문장을 인용할 때는 '안'이 들어가는 자리에 '언'을 썼다. 첫 번째 구절은 통행본에 이렇게 되어 있는 경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 해석도 좀 생소할지 모른다. '어(於)'를 비교격 조사로 보고 이렇게 해석했다.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천하보다 몸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만 담으면 된다. 천하보다 몸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과 관련된 고사가 적지 않다. 『장자』 「양왕」에 나오는 왕자 수(搜)의 고사도 그 중의 하나다. 월나라에서 3대에 걸쳐 임금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왕자 수가 임금이 되기 싫어 굴 속으로 도망갔는데, 사람들이 쑥불을 때 그 매운 연기로 나오기 싫어하는 왕자 수를 끌어내 기어이 왕위에 앉혔다는 것이다. 왕자 수가 끈을 잡고 수레에 오르면서 하늘을 올려보고 부르짖었다. "임금 자리라, 임금 자리라. 나를 버려둘 수 없었다는 말이던가!" 왕자 수는 임금이 되는 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되었을 때의 근심을 싫어한 것이다. 왕자 수 같은 사람은 나라 때문에 생을 해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월나라 사람이 기어이 임금을 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고사는 지금 『노자』의 문장과 같은 교훈을 말한다. 또 같은 「양왕」은 부귀를 싫어한 안합(顔闔)의 고사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의 진실됨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로는 국가를 다스리며, 그 찌꺼기로는 천하를 다스린다. 이로 보건대 제왕의 공업은 성인의 나머지 일이며, 몸을 온전히 하고 생을 기르는 것이 못 된다. 이 두 고사를 실은 『장자』 「양왕」은 양주학파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노자』의 문장도 양주학파와 관련을 가질 것이다. 오징은 이 문장을 해설하면서 양주의 위아(爲我) 사상이 여기에서 연원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노자를 양주보다 선배로 보고 한 말이지만 둘 사이의 연관 관계를 지적한 것은 옳다. 양주학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또 하나의 자료는 『여씨춘추』 「중춘기·귀생」이다. 「귀생」에는 위에서 소개한 두 고사가 모두 그대로 등장하며, 이외에 천하를 준다고 해도 마다한 허유(許由)와 자주지보(子州支父)의 고사도 실려 있다. 이것 역시 「양왕」에 나오는 이야기다. 대개의 줄거리는 같지만 그 논평은 조금 다른데, 「귀생」의 것을 보면 이렇다. 천하는 중한 물건이지만 그것으로도 생을 해치지 않으니 다른 물건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직 천하로 그 생을 해치지 않는 사람에게만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지금 『노자』의 문장은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한다. 「도응훈」은 이 문장을 생명을 살육하는 전쟁을 피해 고국을 버리고 망명길을 택한 대왕 단보(亶父: 고공단보)의 고사와 연결시킨다. 이 고사 역시 『장자』 「양왕」에 나오며, 『여씨춘추』에서는 「개춘론·심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도응훈」의 문장은 「심위」나 「양왕」의 문장과 거의 같지만 「양왕」보다는 「심위」에 가깝다. 「양왕」이 언제 쓰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도응훈」은 「양왕」이 아니라 「심위」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천하는 중한 물건이지만 그것으로도 생을 해치지 않으니 다른 물건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직 천하로 그 생을 해치지 않는 사람에게만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여씨춘추』 「중춘기·귀생」 각주 1) * 갑·을본은 서로 일치한다. * 갑·을본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다. 서로를 보완하여 완전한 문장을 얻을 수 있다. 이 글은 초간문에 전부 들어 있다. * 총(寵)은 용(龍: 갑본)·농(弄: 을본), 환(患)은 완(梡: 갑본), 하(何)는 가(苛: 갑본), 탁(託)은 탁()·탁(: 을본), 안(安)은 여(女: 갑·을본), 가(可)는 하(何: 갑본)의 본 글자이므로 모두 이렇게 고친다. 2) 초간문에는 없고 백서에는 있는 통행본 20장의 나머지 부분은 『노자』를 편집할 때 추가되었을 것이다. 3) 유전작(라우, 1982)은 '인(人)'이 있기 때문에 이 문장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군자)도 역시 사람들을 두려워해야 한다"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갑본은 해당 부분이 지워져 있다. 하지만 글자의 공백은 을본과 같다. 5) 종래에는 이 구절을 "총애를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는 식으로 옮기는 독법도 있었다. 하지만 백서처럼 '지(之)'자가 들어 있으면 그렇게 하기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