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곰 한 마리와 새끼 곰 한 마리가 풀밭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바구니 안에는 온갖 종류의 먹음직스러운 과일과 빵이 가득이다. 이때 귀를 쫑긋 세운 토끼 한 마리가 휘리릭 뛰어 오더니 겁도 없이 홍당무를 꺼내 먹는다.
당황하는 곰. 하지만 곰은 그런 마음을 애써 감추고 조용히 '가!'라고 말한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먹기를 계속하는 토끼. 참지 못한 곰이 먹던 과일을 토끼에게 내던진다. 그러나,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먹고만 있는 토끼.
더 화가난 곰은 이번엔 도끼를 들어 내리치려 한다. 이 순간 토끼 눈에 핏발이 서고 어디서 준비했는지 모를 맥주병을 머리로 마구 깬다. 토끼의 엽기적인 행동에 놀란 곰은 들고 있던 도끼로 과일을 깎아 열심히 토끼에게 바치며 부들부들 몸을 떤다.
이는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엽기토끼'의 한 장면이다.
'엽기토끼'라는 애칭을 가진 '마시마로의 숲 이야기' 애니메이션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검색엔진에서 '엽기'라는 단어를 찾으면 '엽기토끼'가 빠진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다.
이쯤 되면 '엽기토끼를 누가 만들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귀염을 떨면서도 어느새 엽기행각을 일삼는 '엽기토끼'의 작가를, 그래서 만나보았다.
김재인씨의 첫인상은 어쩌면 '엽기토끼'를 닮은 듯한(?)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올해 24살인 김재인씨로부터 '엽기적이기 싫은 엽기적 상상력'을 들어보았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네. 먼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멀긴 멀었다. 하남시에서 그의 집 불광동은 정말 멀다)"
-지금 네티즌들 사이에서 '엽기토끼'가 대인기인데 본인도 아세요?
"아뇨.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인터넷을 한지 불과 한 달여 밖에 되지 않았고 또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어서 실감이 나질 않네요(웃음). 그리고 전 인터넷을 잘 몰라요...(또 웃음. 그는 나중에 디지털 카메라가 뭐냐고 까지 물었다. 놀랐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인기가 대단해요. 인기의 비결이 있다면 좀 가르쳐 주시죠?
"(웃으며) 비결이요? 그런거 없어요. 다만 캐릭터 자체보다는 애니메이션을 플래시로 보여주다 보니 좀 더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있는 장면이 나온 것 같아요. 그게 전부예요(쑥스러운 듯 연신 웃는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엽기토끼'라고 불려요. 그런데 왜 하필 엽기토끼죠?
"실은 저도 몰라요. 제가 엽기토끼라고 이름을 붙인 적도 없고 그렇게 불려지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거든요. 유행을 타잖아요. 엽기라는 단어도 그럴 것 같아요. 아마 이 사이트에서 저 사이트로 옮겨지는 도중에 네티즌들이 갖다 붙인 이름이겠죠? 원래 이름은 '마시마로'인데..."
-마시마로요? '마시마로'가 무슨 뜻이죠?
"원래 그 토끼 이름이 '마시마로'예요. 애니메이션 제목도 '마시마로의 숲 이야기'잖아요. '마시마로'는 제 매니저(장미영.30세)가 지어준 이름인데 '메쉬 멜로우'의 유아적 발음이죠. 왜 있잖아요. 초코파이 속에 들어있는 하얀 크림 같은 것...(웃음) 하지만 별 뜻은 없어요. 다만 아주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길래 예뻐서 지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마음에 들어요."
-그렇군요.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엽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 그 엽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좀 무섭다는 생각을 해요. 마치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가 못된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나 섬뜩한 느낌 같은 게 들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마시마로를 두고 엽기토끼라고 불리는 게 내키진 않아요. 내용도 실은 엽기와 관련이 없죠. 다만 풍자적이면서도 해학적인, 그리고 웃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면 족해요. 엽기는 싫어여~."
-그런데 왜 하필이면 토끼죠? 뭐 다른 것도 많을 텐데... 원숭이나 강아지 등등...
"실은 처음부터 토끼로 하겠다고 만든 건 아니었어요. 얼마전 유아용 책에 들어갈 일러스트를 하려고 만들어 두었던 캐릭터가 바로 '마시마로'였어요.
아이들은 곰이나 토끼 같은 동물을 좋아하잖아요. 곰과 토끼를 놓고 어느 것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곰은 다른 분들이 많이 그리고 계셔서 토끼로 결정한 거예요. 재미있는 건 토끼를 그리다가 귀만 빼버리면 곰이 되요. 그래도 귀가 있는 토끼가 훨씬 귀엽죠."
-그럼 토끼 '마시마로'는 언제 탄생했고 전에는 무슨 그림을 그렸나요?
"지난 7월이니까 이제 3개월이 되었네요. 플래시를 하기 전에는 시사만화나 일러스트, 캐리커처 등을 주로 그렸어요. 본격적인 만화 애니메이션 창작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시마로를 처음 선보인 것도 불과 3개월 밖에 안되었다는 말이죠. 처음에는 두 편만 만들었는데 제의가 들어와 시리즈로 나오게 된 거예요."
-시리즈로 현재 5탄까지 나왔는데 앞으로도 계속 하실 예정인지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처음엔 재미삼아 그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 인터넷 사이트와 계약과정에 있어요. 2주에 한편씩 그리다보니 5탄까지 나오게 되었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계약관계를 지속 하기는 어렵겠지만 '마시마로의 숲 이야기'는 계속 그릴 거예요."
-만화가가 꿈이었나요?
"전 만화가이고 또 그게 직업이예요. 만화가라는 직업은 줄곧 제가 원하던 직업이었어요. 만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도 만화예술과(공주전문대)를 갔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릴 거예요. 그런데 아직도 졸업을 못했네요.(또 웃는다)"
-만화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냥 좋으니까 해요.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이죠. 다른 이유는 전혀 없어요. 만약 어느 순간 실력에 한계를 느낀다거나 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만화를 하지 못한다면 (지금 생각에는) 죽을 것 같아요. 그야말로 필사적이죠."
-필사적이라뇨?
"(다른 곳에서는 말한 적이 없는데) 솔직히 '필사적'이라는 단어가 적절하겠네요. 대전에 살다 이곳(서울)에 올라온 건 직업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다니지도 못하고 금방 해고를 당했죠. 또 다른 회사를 다녔지만 그곳에서도 해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전 이것(만화)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좋아서도 하지만 여건상으로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해고를 당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리고 매니저는 뭐예요?
"이유가 있었죠.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캐릭터 개발과 만화에 들어가는 배경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어요. 해고할 정도면 재미가 없긴 없었나 봐요(쑥스럽다는 듯 웃음).
그 때 매니저도 같은 회사에 근무했었어요. 하지만 같이 해고를 당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늘 가까이 있죠. 매니저가 많은 걸 챙겨줘요. 오늘도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고민했는데 매니저가 해결해 줬죠. 지금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예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시마로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무얼까요?
"'마시마로'는 제도적 합리성으로부터 탈출을 꿈꾸고, 기존가치에 도전함으로써 사회 속에 일탈의 쾌감을 제공하려고 해요. 모두 똑 같다면 재미없잖아요.
풍자와 해학을 담고 거기에 궁극적으로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려요. 상식적으로는 가녀린 토끼가 거대하고 힘센 곰을 상대로 식사를 방해 할 수는 없죠. 그러나 만화에서는 가능해요.얼마든지요. 전 그러한 것에서 느끼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공유하고 싶어요."
-작업할 때 특별히 어려운 점이 있다면?
"저작권 문제가 마음에 걸려요. 저작권이란 창작을 하는 사람들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봐요. 그런데 네티즌들은 제 그림을 여기저기로 퍼 옮겨요. 굳이 그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최적의 상황에서 그림이 보여지길 원하는 제 마음을 왜곡되게 하더라고요. 여기저기 옮겨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가 많이 감소하거든요.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은 '보여주지 않으려면 왜 그렸냐'는 식으로 반응하더군요. 그게 제일 속상해요. 그리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프로그램이나 작품들을 아무렇게나 퍼가도 된다고 여기는, 또 당연시 여기는 일부 네티즌들의 마음을 접할 때 힘들어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요. 일단 지금 계약된 회사와의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이것저것 많이 할 거예요. 일러스트나 시사만화, 애니메이션 등등 그림에 관한 일이라면 다 해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마시마로를 사랑하는 조인스 회원들께 한마디하신다면?
"사랑해주셔서 너무나 고맙다는 말씀 드려요. 그러나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랑을 받으면 자만할까 두렵기도 해요. 그리고 엽기토끼라는 말보다 앞으로는 '마시마로의 숲 이야기'로 불려졌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드려요. 고맙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어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엽기토끼'로 불리는 '마시마로'를 빚어낸 젊은 신인 작가 김재인씨. 만화를 그리는 시간을 제외하곤 독서와 농구로 시간을 보낸다는 보통 청년이지만 밖에 나가는 것을 매우 싫어해 집에서 두문불출한다는 다소 엽기적(?)인 만화가다.
직장에서 두 번씩이나 해고되는 경험도 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목숨을 걸고 싶어하는 젊은 패기를 가진 김재인씨. '마시마로'를 얘기하는 그의 말투에서는 만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인터뷰 내내 조용히 웃으며 어색하고 쑥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던 김재인씨는 '사진 때문에 거금을 들였다'는 기자의 말에 활짝 웃으며 사진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네티즌들의 기대만큼이나 우리 만화계의 비전을 엿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