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