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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고창/공음면] 봄볕이 아름다운 봄날의 ‘도암서원(道巖書院)’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150 13.04.22 09:06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질박한 아름다움이 깃든 효의 상징,

'도암서원(道巖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칠암리 819 /  063-564-8161 

 

참 맑고도 맑은 어느 봄날,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들어선 마을의 한켠,

효자를 모신 서원이 자리합니다.

따스한 봄볕, 따스한 서원여행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단순하지만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가끔 그것을 잊거나 무시하고 살고 있는 것이 우리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성은 우리의 삶은 팍팍하게 합니다. 또한 스스로의 부끄럽거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잘못에 대한 감추기 위하여 더 큰 거짓으로 스스로를 유린합니다. 더욱 빠른 세상이 되어 갈수록, 더욱 개인적인 사회가 되어갈수록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를 우리는 스스로 거부하려 합니다.

 

해를 손으로 가릴 수 있던 세상,

누가 어디서 콩을 심던 팥을 심던 신경을 쓸 겨를이 없던 시대, 그러나 스스로의 철학으로 오직 지켜나가는 선인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서는 그 분들을 영웅’, 내지는 표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중 영원히 변치 않는 시대의 근본, ()입니다.

내리사랑을 넘어 설 수 있는 사랑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암서원(道巖書院)'은 광해군5(1613)에 세워진 서원으로 영모당 김질(永慕堂 金質, 1496~1555)’선생의 효성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선생의 집터에 세워졌습니다. 이 후 헌종1(1835)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증손 은송당 김경철(隱松堂 金景哲)’과 임진왜란 당시 왕을 호종(扈從)하면서 왕을 업고 80리를 달렸으며,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현무재 김익철(賢武齋 金益哲)’을 추가로 배향하고 있습니다. 은송당과 현무재는 형제사이로 영모당 선생의 증손입니다.

근래에 들어서 ()안동김씨 익원공파의 파조 낙포 김사형(洛圃 金士衡, 1333~1407)’의 부조묘를 20068월에 더하여 세웠습니다.

 

 

 

   

 

 

 

도암서원에 배향 된 세분은 모두 효자로 이름난 분들이십니다.

먼저 영모당 김질(永慕堂 金質, 1496~1555)’선생은 '통례원찬의 김복중(通禮院贊儀 金福重)'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예의와 효가 남달랐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총명하였다고 합니다. 학업에도 충실하였지요.

벼슬에는 뜻이 없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지나는 것을 본 어머니가 그를 부러워하자 어머니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 진사시에 급제를 하였고, 사바벼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던 중종23(1528), 모친상을 당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 벼슬을 내려 놓고 묘소에서 3년상을 치루며 부인을 멀리하여 효를 다하고자 합니다.

이 후 벼슬에 천거 되었으나 홀로 남은 아버지를 모시고자 관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효성으로 아버지를 모시다가 그마저 돌아가시자 직접 흙짐을 져서 분묘를 하였으며, 풀과 채소로 연명하며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정성껏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평소에 꿩고기를 좋아하신 아버지를 위하여 저자로 나가려 하였으나 폭설로 가지 못하게 되어 통곡을 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드는가 하면, 제수에 쓸 간장을 쥐들이 흐려놓자 자신의 공이 부족함을 한탄하자 밤사이 무리를 지은 쥐들이 장독대 아래에 죽어 있었다고도 합니다. 한 겨울의 폭설에도 묘소주변으로는 눈이 내리지 않으니 마을사람들이 선생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을 받아 시묘 살던 곳을 여막골이라 하였고, 묘소가 있는 산의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 부를 정도였지요.

 

선생은 예의를 갖추고 올바른 행실을 평소에도 보이며,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아 스스로 어줍잖은 선비가 되지 않으려 노력을 다하기도 합니다. 성리학을 연구하며, 유교철학을 공부하면서 후손들을 위하여 영모록(永慕錄)’, ‘육사자책설(六事自責設)’의 두 권의 책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던 1555년 선생이 생을 다하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는 그의 집을 영모당(永慕堂)’이라 편액 하였고,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은 선생과 교우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아쉬운 마음을 시로 적으니 현재 영모당에 현판되어 있습니다. 이후부터 선생은 영모당 선생이라 불렸고, 명종원년(1546) 명나라에서 조선의 충렬효행을 묻자 졸당 민성휘가 영모당의 효가 으뜸이라 하니 명황은 친필로 효자진사김질지려(孝子進士金質之閭)’라 사액하니, 훗날 임진왜란으로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 영모당현판을 본 왜구가 감동하여 해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전해집니다.

 

선생의 증손이자 함께 배향 된 은송당선생은

어머니의 병에 정성껏 간호하며 하늘에 빌었으며, 어머니에게 등창이 생기자 잇몸으로 빨아내어 효험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6년의 여묘를 살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으로 움직였으며, 이괄의 난 때에는 의병을 모으고 양곡을 비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복호(復戶)하였으나 받지 않았고, 관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의 동생 현무재선생도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을 호위하며 왕을 업고 80리를 달려가기도 하였으며, 병자호란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모으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봉양을 위해 더 이상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귀향, 효를 다했습니다.

 

이렇듯 효의 모습은 집안 내력인 듯합니다.

보이고 배운 모든 것이 어른들의 모습인지라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는 효를 기본으로 예의를 몸으로 익히게 된 것 이지요  

 

 

 

 

 

 

영모당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세워진 영모당은 광해군5(1613)에 세워 졌으며, 헌종13(1847) 선생의 증손 은송당과 아우 현무재를 추가 배향하였습니다.

그러던 고종5(1868), 흥선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으며, 이 후 고종19(1882)에 복설 된 건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과 향교의 전형적인 공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솟을문을 지나면 바로 영모당입니다.

영모당은 정면4, 측면3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지만,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하고 고즈넉합니다. 중앙2칸에 대청을 두었고, 좌우로 한칸씩 방을 들여 놓았습니다. 후면 서쪽으로 효자각을, 동쪽으로 봉안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중앙에 평대문으로 세워진 내삼문인 효충문(孝忠門)’을 지나면 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당은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만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넉넉함이 돋보입니다.

 

사우의 뒤로 근래에 세워진 또 다른 내삼문 현충문(賢忠門)’이 자리하고, 그 뒤로 2006년에 건립된 익원공부조묘(翼元公祖不?廟)’가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낙포 김사형(洛圃 金士衡, 1341~1407)’의 사당으로 영모당 선생의 익원공파 파조가 됩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8년여의 정승을 지내는 동안은 물론이고 평생 단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은 인물로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안동김씨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바로 낙포 김사형(洛圃 金士衡, 1341~1407)’ 오은 김사렴(梧隱 金士廉, 1330~1405)’, 두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은 형제지간입니다. 그러나 김사렴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동시에 모든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한 분이고, 김사형은 조선개국에 적극 동참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좌의정이 된 동생은 형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찾았으나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훗날 안동김씨의 세력들은 주로 김사형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조선 전기에는 익원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조선 말기에는 서윤공파가 세도정치의 중심이 됩니다.

이로서 김사형의 후손을 구()안동, ()안동, 상락김씨(上洛金氏)라고 하며, 김사렴의 후손을 신()안동, ()안동, 장동김씨(壯洞金氏)라 합니다.

 

봄바람 일렁이는 완연한 계절,

정겹고 넉넉한 시골길을 달려 만난 도천사의 품격, 소박하고 단아한 풍경 속에 담긴 효성 가득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곳입니다.

도천서원, 고창의 여행길에 만나보면 좋은 공간입니다.

    

 

 

 

 

 

 

 

 

 

 

 

 

 

 

 

 

 

 

 

글, 사진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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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4.22 09:33

    첫댓글 서원이면서도 효의 상징인곳이군요 좋은곳 아름다운곳 깨끗한곳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멀리 좋은곳 다녀오심에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4.29 05:54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많은 곳이 사라졌지만,
    다시 재건하거나 지켜진 곳이 남아 있어 이리 둘러 볼만합니다.
    즐거운 날 되세요.

  • 13.04.22 18:50

    공음면에 친구가 살아서 여고시절에 놀러갔던 곳인데 사진으로라도 보니 반갑네요...^^

  • 작성자 13.04.29 05:55

    마을 자체가 조용하고 목가적이서 참 좋았습니다.
    시간만 허락 된다면 마을스케치도 좋겠더군요.
    행복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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