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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1일 오늘의 역사
2024년 김우민, 세계수영 자유형 400m 금메달
2023년 피겨 스케이팅 이해인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선수권대회 금메달
피겨 스케이팅 이해인(세화여고)이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선수권대회 '역전 우승'으로 김연아(은퇴) 이후 14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날 쇼트 프로그램 1위로 역시 금메달에 도전한 김예림(단국대)은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해인은 11일(한국시간) 미국 콜로라도주 스프링스 브로드무어 월드 아레나에서 열린 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74.96점, 예술점수(PCS) 66.75점, 합계 141.71점으로 시즌 최고점을 기록하며 1위에 올랐다.
2023년 미국 서부 최악의 송유관 기름유출사고로 일부 폐쇄…네바다주 비상사태 선포
2022년 여수 산업단지에서 NCC 폭발사고 8명 사망
2022년 구자홍 LS그룹 초대 회장 사망
2019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 헌정차상 처음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기소
2011년 9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2017년 9월 24일 퇴임하였다. 검찰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제기하였으나 재임 중에 자체 조사에서 문제가 없다고 밝혔으나 대법원장이 바뀌면서 대법원이 검찰에 수사 협조를 하여 강제징용 사건 재판 지연,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등에서 재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으며 2019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양승태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범죄혐의가 상당 부분 소명되고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 구속된 사례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2016년 북한 개성공단 내 남측 자산 동결과 남측 인원 전원추방 통보
2012년 미국 가수 휘트니 휴스턴 세상 떠남
앨범 7장 영화 사운드트랙 3장이 1억7000만장 팔림 ‘보디가드’ 사운드트랙은 사상처음 단 한 주 동안 100만장 넘게 팔림 빌보드 음악상 최우수 팝앨범상/그래미상 최우수 여성 팝보컬상, 올해의 앨범상/아메리칸 음악상 최우수 여성 팝앨범상 등 받음, 여성가수로는 처음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2011년 강릉 100년 만에 폭설 77.7cm 1911년 기상청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적설량, 동해시는 14일까지 102.9cm 내림
2011년 부산발 KTX, 고속철도 개통 후 첫 탈선
한국형 고속열차인 KTX산천이 11일 오후 경기도 광명역 인근 상행선 일직터널에서 선로를 이탈하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열차가 광명역에 진입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는 상황에서 탈선사고가 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경찰과 코레일에 따르면 부산에서 광명으로 향하던 KTX 산천 224호 열차가 이날 오후 1시5분쯤 광명역 전방 500m 상행선 일직터널에서 선로를 이탈하며 멈춰섰다. 시속 300여㎞로 운행하는 사고 열차는 광명역 진입을 앞두고 속도를 줄여 운행하던 중 몇차례 덜컹거리며 10량 중 후미 6량이 선로를 이탈했다.
사고 열차는 이날 오전 10시45분 부산역을 출발해 오후 1시3분 광명역 도착하는 주말 임시열차로, 전 구간을 KTX 고속선로를 이용하는 열차였다.
한국철도공사측은 “저속으로 운행하고 있어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고 열차에서 터널 밖으로 뛰어내리다 발목 통증을 호소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던 정도”라고 말했다.
이날 사고는 차량 결함보다는 선로(線路) 전환기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고 선로 전환기를 잘못 조정해서 발생한 인재(人災)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직원들은 수리를 잘못했을 뿐 아니라 수리결과를 관제센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용역업체와 코레일 직원들, 철도관제센터 등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크고 작은 실수를 했고 이로 인해 고속열차인 KTX의 선로 이탈사고가 난 것으로 정부는 파악했다.
2011년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발표
국민들의 퇴진 압박을 받아온 호스니 무바라크(Muhammad Hosni Sayyid Mubarak) 이집트 대통령이 2011년 2월 11일 오후 6시(한국시각 12일 오전 1시)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을 통해 하야를 발표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되자 부통령으로서 권력을 승계하여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해 왔다. 그의 재임기간 이집트는 경제 성장률, 기대 수명, 문자 해독률 등의 사회경제적 지표 대부분이 향상됐으나, 무슬림형제단으로 대표되는 야권에 대한 탄압과 치솟는 물가와 실업난으로 인한 빈부격차에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튀니지의 민주화 시위를 통한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Ben Ali) 대통령 하야라는 민주화 물결이 이라크까지 확산되어, 2011년 1월 25일 이라크 수도 카이로에 모인 수만명의 시위대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시위 소식은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었다. 2월1일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광장에서 '100만인 행진'이 있었고, 6일 약 30년 동안 지속해온 비상조치법 폐지 ·시위 도중 구속된 시위대 석방·언론 탄압 중지·9월 대선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불출마·대선까지 상황을 관리할 국민위원회 설치와 집권당인 국민민주당(NDP) 지도부 총사퇴를 통한 점진적 개혁 방안을 발표했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10일 오후 무바라크의 퇴진 임박 예상이 당일 밤 무바라크 대통령 본인의 거부 방송을 통해 뒤집혔다. 다음날인 11일 무바라크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공군 헬기를 통해 카이로를 떠나 시나이 반도의 샤름 알셰이크 리조트로 피했고, 대통령실은 무바라크의 하야를 발표했다. 미국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하야에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으나, 친미성향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으로 중동정책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2010년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사망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40)이 런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영국 언론들은 그가 3일 트위터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글을 남겼고, 평소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점을 들어 자살로 추정하고 있다.
맥퀸은 택시 운전사의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16살 때 학교를 떠나 런던의 고급양복점이 몰려있는 새빌 거리에서 견습생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찰스 황태자의 결혼식 예복을 만든 기브스 앤 호크스라는 유명 양복점에서 재킷을 만드는 방법을 익혔다.
뒤늦게 세인트마틴 예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맥퀸은 영국 패션계의 거물인 이사벨라 블로우의 눈에 들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해골 등 독특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20대 후반인 1996년 지방시 하우스 수석 디자이너에 임명되면서 세계 패션계의 ‘앙팡 테리블’로 이름을 떨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후 맥퀸은 영국이 매년 뽑는 최고 디자이너에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모두 4차례 선정됐으며 2002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가 뽑는 올해의 세계디자이너에도 이름을 올렸다.
2009년 현대 제네시스, 캐나다 올해의 자동차 선정
2009년 인공위성 사상 첫 충돌
2009년 2월 11일 오전 1시55분(한국시각) 러시아 시베리아 타이 미르 반도 789㎞ 상공의 우주에서 거대한 파편 구름이 생성됐다. 미 항공우주국(NASA)측은 “두개의 온전한 인공위성이 사상 처음 충돌했다” 며, 피해규모 조사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NASA의 첫 레이더 측정에선 “파편의 확산 범위가 커져, 다른 위성과의 후속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는 결과가 나왔다.
사고 위성은 1993년에 발사된 러시아 코스모스 2251 통신위성(중량 900㎏)과 1997년에 발사된 미국 이리듐사의 33 통신위성(560㎏). 그 중 코스모스 2251호는 수명이 다해 방치된 위성이었다. NASA에 따르면 지금까지 궤도상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은 모두 4차례지만, 소진된 로켓이나 소형 위성의 부품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뉴욕타임스는 11일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궤도 내에 위성의 수가 너무 많다며 (이 상황을) 경고해왔다” 고 보도했다. NASA측은 두 위성이 정면으로 충돌해 피해 범위가 넓다며, 발생한 파편은 600개가 넘는다고 밝혔다. 어느 위성이 먼저 충돌을 초래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07년 중국 날씨위성인 ‘펑윈(風雲) 1호’ 가 중국의 미사일 요격실험으로 파괴됐을 때 2000조각 이상의 파편이 발생했으며, 아직도 저(低) 궤도를 돌고 있다. 만약 이 파편들이 다른 위성과 부딪힌다면, 추가 파편이 발생하는 ‘폭포 효과(cascade effect)’ 가 발생할 수도 있다. NASA는 2009년 현재 우주에는 위성만 6000개가 떠 있다고 밝혔다.
2009년 삼성 이재용 전무, 수천억원대 이혼 소송
2009년 2월 11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41) 삼성전자 전무의 부인 임세령(32)씨가 이 전무를 상대로 이혼을 청구하면서 수천억원대의 재산 분할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임씨는 11일 서울가정법원에 소장을 냈으며, 이 전무를 상대로 위자료 10억원과 수천억원대의 재산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씨는 이 전무와 사이에 두고 있는 아들과 딸의 양육권도 함께 요구했으며, 구체적인 이혼 사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이후 이 전무와 임씨는 같은 달 18일에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린 이혼 조정에서 법원이 제시한 조정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8일자(字)로 협의 이혼했다. 이에 따라 임씨는 서울가정법원에 제기한 이혼 소송을 이날 취하했다.
이날 열린 이혼 조정에서 1남1녀의 자녀에 대한 친권은 이 전무가 갖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위자료 액수나 재산 분할액 등 구체적인 혐의 이혼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임씨는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로, 지난 1998년 6월 이 전무와 결혼했다.
2007년 시장경제 강조한 '새 교과서 모델' 나와
2007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2007년 2월 11일 국가보호시설에 수용 중이던 외국인 27명이 화재로 죽거나 중경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1일 오전 3시55분쯤 전라남도 여수시 화장동 ‘여수 출입국 관리사무소(4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 사무소 3층 보호실에 갇혀있던 중국인 8명(중국 동포 포함)과 우즈베키스탄 사람 1명 등 9명이 10여분 만에 가스 질식에 의해 숨졌다. 또 18명은 중경상(重輕傷)을 입었고, 이중 상당수가 중태여서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한편, 경찰은 불이 발생한 304호에 수용돼 있던 중국 동포 김명식(39.사망)씨가 오전 3시51분쯤 물에 적신 휴지로 감시 카메라(CCTV) 렌즈를 가리고 난 뒤 4분 후쯤 연기가 피어 올랐다는 직원들의 진술을 확보, 방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있다.
2007년 하버드대 드류 길핀 파우스트 교수를 제28대 총장으로 임명
미 하버드대학 개교 371년 만에 첫 여성 총장이 탄생했다. 하버드대는 2007년 2월 11일 역사학자인 드류 길핀 파우스트(Drew Gilpin Faust) 교수를 제 28대 총장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파우스트는 버지니아주의 말사육업체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윤리에 충실한 전통적인 어머니는 그녀에게 순종을 가르쳤다. 그러나 딸은 어머니 말을 듣지 않고 어릴 때부터 독립의 길을 걸었다. 바느질을 거부하고 4H클럽에 들어가 남자 애들과 함께 놀았다. 흑인노예 문제에 공감을 느껴 9살 때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를 아이젠하워(Eisenhower) 당시 대통령에게 보냈다.
파우스트는 고교 시절 고향을 떠나 매사추세츠의 대입 예비학교인 콩코드(Concord)아카데미를 다녔고, 여성 지도자 양성으로 유명한 브린모(Bryn Mawr)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어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5년간 이 대학에서 미국 남북전쟁 및 남부 역사 분야의 권위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2001년 1월 하버드대 래드클리프(Radcliffe) 고등학문연구원 초대 학장을 맡으면서 대학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한 그녀는 래드클리프를 매년 300만 달러 규모의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게 했다.
하버드 출신이 아닌 교수가 총장이 된 것은 1672년 찰스 촌시(Chauncy) 2대 총장 이후 335년 만이다.
2007년 박지성 시즌 2호골 '골대 징크스' 머리로 날려
2007년 안성에서 6번째 고병원성 AI 발생
2003년 露 한인동포 박 미하일 교수, 50년 걸려 러시아어 삼국사기 최초완역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최초로 러시아어로 완역한 러시아 한인동포(고려인) 박 미하일(84) 교수는 2003년 2월 11일 완역본인 3권의 책을 손으로 비벼대며 금세 감격에 젖었다. 50여년에 걸쳐 삼국사기를 러시아어로 완역해낸 노학자의 학문적 정열은 러시아 학계에서 대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완역본 총 3권 중 1959년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번역한 제1권을 출판한 뒤 백제본기 제2권은 20년 동안 번역을 거쳐 1980년 작업을 끝냈지만 재정지원이 끊기며 출판을 하지 못했다. 박 교수는 러시아 주재 대사관 등 주위에 사정을 호소했다. 이를 전해 들은 한국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이 재정지원을 하면서 1995년 백제본 2권이 완역됐고, 나머지 지· 열전 부분인 최종 3권이 이날 출판됨으로써 결실을 본 것이다.
러시아 동양학 전문가들은 "박 교수의 완역은 과업(課業)이요, 사변(事變)"이라고 감탄했다. 출판을 맡은 동양서적출판사측은 "러시아 최초의 삼국사기 완역은 러시아 내 동양학 연구의 최고 결실"이며 "러시아어를 아는 외국인 학자들에게 한국 연구 접근을 쉽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지난해 완역을 거의 마쳤지만 책 디자인 작업과 주해(註解), 삼국시대 지도 첨부작업이 지연되며 완역본 출간이 미뤄졌다"며 "단돈 100달러의 예산도 없이 시작한 번역작업이 완역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국제교류재단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함경북도 경원에서 살던 조부모가 1869년 기사년 기근을 피해 얼음이 두껍게 언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국경 핫산 근방에 정착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10남매 중 홍역으로 7명이 사망하고 박 교수를 포함한 아들 3형제만 살아남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이주 당시 아버지는 일본 스파이 혐의로 총살됐다. 박 교수는 1936년 고교 최우등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대학에 입학하며 화를 면했다. 그는 "죽어서도 한국 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 어머님의 유언이 없었다면 오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서울시, 청계천 복원 기본 계획 발표
11일 서울시가 발표한 청계천 복원 기본 계획에 따르면 청계천은 한강물과 지하수를 이용해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복원된다. 또 자동차와 시민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 21개가 놓이고, 산책길도 마련된다.
◆ 일부 복개구조물은 보존 =청계천의 일부 구간은 양쪽에 2차선 정도의 복개구조물을 그대로 남겨둬 그 밑으로 홍수 시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했다. 하천 양쪽에는 각 2~3차로와 폭 1.5~4m의 보도를 놓고, 상가 밀집지역에는 폭 2m 정도의 조업주차공간이 조성된다.
청계천 상류에는 미니 저수로를 조성하며 빨래터, 수표석 등이 재현된다. 청계 4~7가에는 징검다리·창포군락·수변 쉼터 등이 조성되며, 하류에는 데크 관찰로, 물억새·갈대 등 대규모 식생군락, 자연학습체험장, 지압보도 등이 마련된다.
◆ 복원구간은 동아일보 앞에서 시작해 동대문을 거쳐 신답철교에 이르는 약 5.84㎞ 구간. 360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3개 구간으로 나눠 동시에 공사를 진행하게 된다.
하천 조성공사는 2005년 말까지 완공된다.
◆ 하루 9만4000여t 물 공급 =청계천에는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 원수(하루 7만1700t)와 인근 14개 지하철역사의 지하수(2만2000t) 등 모두 9만3700t을 흘려보내 수심 30㎝ 이상을 유지할 계획이다.
◆ 다리 21개 설치 =청계천 남북 방향에는 차도 14개, 보도교 5개, 보·차도교 2개(세운상가·통일상가) 등 모두 21개의 다리가 설치된다. 하천 둔치에는 폭 1.5~3m의 산책로가 들어서고, 계단이나 경사로 형태의 접근로 14곳이 생긴다.
◆ 청계천 주변 개발 =청계천 상류부터 무교동 일대는 국제금융 및 비즈니스산업 세운상가 일대는 IT 및 멀티미디어, 문화산업 동대문시장은 토털 패션산업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개발한다.
2001년 정부, 시화호의 담수화 포기를 최종 결정
정부가 시화호 담수화 계획의 실패를 공식 시인하고 이를 전면 백지화했다. 건설교통부는 2001년 2월 11일 심각한 수질오염이 발생했던 시화호의 용도를 놓고 환경부·해양수산부·농림부 등 관련 부처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시화호 담수화 계획을 포기하기로 공식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시화호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수호로 남게 됐다.
정부는 지난 1994년 6220억원을 들여 방조제를 축조, 시화호를 담수화해 공업·농업용수로 공급할 예정이었으나 수질이 급격히 악화되자 1997년 3월 담수화 계획을 중단한 뒤 갑문을 설치, 해수가 드나들도록 한 바 있다.
담수화 백지화 결정은 탁상행정이 낳은 전형적인 실패 사례로 남게 됐다. 1985년 농업용수 및 공업용수 확보라는 목표로 시화호 담수화가 추진된 지 16년 만에 정부는 슬그머니 해수호로의 전환 결정을 내렸다. 시화호를 담수화해 1억8000만t의 수자원을 확보하겠다는 정부의 계획도 공염불에 그치게 됐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방조제 건설비 6220억원과 하수처리시설 4498억원 등 1조원이 넘는 혈세를 날리게 됐다.
2000년 영국 정부, 북아일랜드 자치권 회수 및 직접 통치 개시(북아일랜드 분쟁)
1999년 최순영 신동아 회장, 사기협의로 구속
1999년 이스라엘, 헤즈볼라 거점 폭격
1998년 한국최초의 서양식 교회건물인 약현성당 화재
1997년 에콰도르 의회, 파비안 알라르콘 에콰도르 의장을 새 대통령에 선출
1990년 타이슨, 무명의 더글러스에 KO패
90%에 가까운 KO율, 1라운드 KO승 17차례, 게임당 평균 소요 라운드수 3회미만 등 공포의 펀치로 각종 신화를 만들어온 `핵주먹` 타이슨의 연승 퍼레이드가 종지부를 찍었다. 1990년 2월 11일 도쿄돔에서 벌어진 프로복싱 헤비급 타이틀전서 무명의 더글러스가 타이슨에 10회 1분23초 만에 KO승, 세계복싱팬들을 경악시켰다.
이날 더글러스는 신장과 리치우세로 선전하다 8회 한차례 다운당했으나 9회부터 반격, 10회들어 위력적인 콤비블로와 오른손 올려치기 마무리주먹으로 극적인 KO를 끌어냈다. 이로써 타이슨은 37연승(33KO)만에 7차방어에 실패했으며, 더글러스는 30승(20KO)1무4패를 마크했다.
타이슨 측은 8라운드에 더글러스가 다운됐을 때 주심의 늦은 카운트로 12초나 소요됐다고 주장, 타이슨의 KO패 처리에 이의를 제기해, WBA 및 WBC 등 양대기구는 경기종료 7시간 경화 후 더글러스의 챔피언인정 유보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1990년 남아공 흑인지도자 만델라 수감 27년 만에 석방
1990년 2월 1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시청 발코니에 70대 흑인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토착 아프리카어로 외쳤다. "힘, 힘, 아프리카는 우리 것!" 그는 흑백 인종차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해 온 영웅들을 기리고 계속적인 투쟁을 촉구한 후, 자신을 석방시키는 결단을 내린 데 클레르크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넬슨 로히흘라흘라 만델라. 그는 이날 아침 27년여의 감옥 생활에서 막 풀려나온 후였다.
남아공 흑인해방운동 조직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지도자인 그는 반정부 투쟁 조종혐의로 1962년 투옥돼 5년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다른 혐의로 다시 재판에 회부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빈 섬 교도소에서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수감된 후 악명높은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감됐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투쟁정신을 통해 만델라는 점차 남아공 흑인인권 투쟁의 상징이 되어갔다. 자유의 몸이 된 만델라는 곧 남아공을 그가 꿈꾸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1년 7월 오랜 동지인 올리버 탐보의 뒤를 이어 ANC 의장에 취임한 그는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긴밀히 협력하며 민주적 헌법 제정과 실천을 향해 나아갔다. 국제사회는 이같은 두 사람의 노력에 대해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여함으로써 격려했다. 1994년 4월 남아공 사상 처음으로 흑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만델라는 60% 이상을 득표하여 데 클레르크를 물리치고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3년 샤론 이스라엘국방상 사임
1983년 미국, 인도양해군사 창설
1982년 보건사회부, 의료보험 적용대상을 5인이상 사업장으로 확대
1982년 프랑스, 국유화법안 발표
1981년 제12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대통령선거인단 선거
1981년 정부, 은행지로제 확대실시
1980년 EC 루마니아와 첫 무역협정 체결
1979년 이란 군지도부의 중립표명으로 바크티아르 정권 붕괴. 혁명파 승리
1975년 대처여사, 영국 보수당수 피선
1971년 65개국 해저 핵실험 금지조약 조인
1970년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동경대 우주항공연구소가 1970년 2월 11일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오후 1시25분 길이 4.9m의 인공위성을 지구궤도로 진입시킴으로써 일본은 세계에서 4번째로 위성을 발사한 국가가 됐다.
이날 동경대 우주개발관측소로부터 발사된 람다 L4S형5호라는 우유빛의 이 위성은 순조롭게 1단계, 2단계, 3단계로 분리돼 6분47초후에 계측기기를 탑재한 4단계 로케트에 점화, 초속 약 8Km의 속도로 인공위성궤도에 올랐다. 위성부분은 중량 23.1Kg이고 탑재기기는 9.4Kg이었다. 위성은 발사지점인 오오스미(大隅)반도와 연관해 `오오스미`라고 명명됐다.
이 위성은 미국, 소련, 프랑스의 초기 위성과 달리 고연체료를 사용했고 무수도중력턴 방식을 채택,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간단한 방법에 의해 발사되었다는데 특징이 있다.
1967년 세계적 디자이너 메리퀀트의 미니스커트 패션쇼 열림
1965년 미군, 북베트남 병참기지 공습
1964년 한국 프랑스와 국교단절. 프랑스의 중국 승인에 보복
1963년 이주당사건 공소심 판결(장면 5년 집유, 안병도 무기징역)
1961년 민족일보 창간
1961년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발족
1960년 흐루쇼프, 네루 수상 회담; 군축과 개발촉진에 합의
1959년 국어심의회, 외래어 한글표기법 최종결정
1958년 원자력법안 확정, 원자력원 설치
1951년 국군, 서울 탈환
1951년 거창 양민학살사건
6.25라는 혼란의 와중에서 수백명의 거창군 양민들이 학살되는 참극이 1951년 2월 11일 발생했다. 이 사건은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빨치산 대공세가 강화되자 거창군 신원면의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일대에서 공비토벌 작전중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부락주민 719명을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내탄부락과 박산계곡에서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국군은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950년 12월 5일에 400~500명의 빨치산이 신원면의 한 국군지소를 습격해 이듬해 2월 7일 국군이 진주할때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3대대는 거창양민학살에 앞서 2월 8일에 산청군, 함양군 등에서도 705명(유가족 집계)의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거창양민학살은 3월 초순경 거창 군민 2명이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에게 알리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신중목은 3월 29일 피란 국회가 열리고 있는 부산극장에서 다른 의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날은 국민방위군사건 특별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이 의결된 날로 정부에 대한 의원들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4월 7일 국회차원의 조사가 시작됐지만 계엄사령부는 국군 1개소대를 공비로 가장해 위협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등 조사를 방해했다.
그러나 4월말,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외지들이 거창사건을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4우러 24일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신성모 국방장관은 5월 초 장관직에서 해임됐고 연대장과 대대장 등 관련자들도 그해 말 군법회의에 회부돼 3년에서 무기까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후 신성모 국방장관은 주일대표부 공사로 보내졌고 관련자들은 1년 뒤 모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47년 정부, 공민증제 실시
1946년 미국, 영국, 소련 얄타비밀협정 전문 공표
1945년 얄타 회담이 끝났다.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 창립
1940년 일제, 창씨개명제 실시
조선총독부가 1939년 11월 10일에 공포한 창씨개명제를 1940년 2월 11일부터 실시했다. 조선민사령을 개정해 만든 창씨개명제는 조선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도입할 목적으로, 모든 조선인은 이날부터 8월10일 사이에 자신의 `씨(氏)`를 결정하도록 강제했다. 하지만 시행 첫 3개월동안 신청자는 전체 인구의 7.6%에 불과했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8월까지 조선인 전체의 80% 개명을 목표로 3도의 경찰부, 258개의 지방 경찰서, 2943개의 주재소 순사를 동원해 협박을 일삼기 시작했다. 창씨를 하지 않는 사람의 자녀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했고, 교사들에게는 어린이들을 이유없이 구타케 하고 집에 가서 창씨개명을 안해서 맞았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창씨하지 않은 호주는 `비국민`의 낙인을 찍어 사찰을 하고, 노무징용의 우선 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했다.
이처럼 창씨는 친일의 증거가 아니고 일제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겪어야 했던 처절한 피압박의 증거였다.
1929년 바티칸, 이탈리아로부터 독립
이탈리아와 오랫동안 반목하고 대립해 온 로마 교황령(領)이 1929년 2월11일, ‘라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 바티칸시국(市國)으로 탄생했다. 라테란은 가톨릭이 유대교와 이슬람 신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한 뒤, 박해하기 시작한 1215년의 '라테란 공의회'가 열렸던 궁전 이름이다. 조약은 교황 비오 11세를 대신해 교황청 국무장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가 서명했다.
로마 교황령이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1870년 이탈리아 왕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가 로마를 점령한 뒤 교황 비오 9세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비오 9세는 로마의 강점(强占)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바티칸의 수인(囚人)’을 자처하며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뒤를 이은 교황들도 마찬가지였다.
59년간의 갈등 해소에 나선 사람은 1922년에 로마로 진군, 이탈리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떠오른 무솔리니.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가 절실했던 무솔리니는 가톨릭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무솔리니는 가톨릭을 이탈리아 유일의 종교로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에 대한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며 몰수한 교회재산도 돌려줬다. 교황도 이탈리아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화답하므로써 무신론자인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주었다.
1929년 라테란 조약 체결
1922년 이광수 등 흥사단계 수양동우회 조직
1921년 조선체육회, 제1회 전국축구대회 개최
1906년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 개최
1906년 2월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야구팀과 독일어 학교팀이 겨룬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가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있는 훈련원 마동산에서 열렸다.
YMCA 팀의 3점차 패. 초창기 한국의 야구사(史)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 총무 질레트가 쏟은 땀방울로 기록됐다. 질레트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 앞마당에서 조선최초의 ‘YMCA 야구단’을 창설,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봄. ‘타구’(打球)로 불릴 때였다. 일본은 ‘야구’(野球), 중국은 ‘봉구(棒球)’라고 불렀던 것과 비교하면 ‘타구’(打球)는 나름대로 한국적인 문화와 의식이 반영된 호칭이었다. 고종도 팀을 불러 경기를 관전하며 강제 퇴위 후의 적적한 심사를 달랬다.
‘YMCA 야구단’은 1912년 11월에는 일본 원정길에도 올라 한국 스포츠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을 시도하는 등 숱한 화제를 뿌리며 승승장구하다가 1913년 해체됐다. 현대 야구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20년 7월의 조선체육회 창설과 그해 11월4일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 휘문 경신 보성 등 5개팀과 청년부 5개팀이 출전한 대회에서 배재고가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1905년 엄주익, 양정의숙 설립
1900년 현대철학의 거장 한스 게르그 가다머 탄생
세계 철학계의 살아있는 전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가 1900년 2월 11일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화학교수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1922년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의 지도로 플라톤에 관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환갑에 출간한 `진리와 방법`은 12년간 작업 끝에 나온 역작으로 20세기 해석학에 관한 기념비적 저서로 꼽힌다. 빌헬름 딜타이와 에드문트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와 정면으로 씨름한 가다머의 해석학은 철학뿐 아니라 미학 신학 법학 사회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하버마스와 `전통의 권위`를 놓고 펼친 논쟁은 현대 지성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가다머는 "모든 것은 전통으로부터 출발한다"며 전통의 권위를 옹호한데 반해 하버마스는 "전통에 담겨있는 이데올로기까지 인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반박하며 세기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화와 변증법`(1980년), `과학시대의 이성`(1982년) 등 저서를 남겼지만 난해한 내용 때문인지 국내에선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 2000년 9월 3부작인 `진리와 방법`의 1부만 번역 출간했을 뿐이다.
1896년 고종황제와 태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은 조선의 고종과 세자가 경북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날이다.
당시에 러시아제국을 "아라사"라고 하였기에 아관파천이라 부르는 것이다.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살해 (을미사변) 당하자 조선백성들은 일본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빠지게 된다.
을미사변후 김홍집등을 왕을 빙자하여 명성황후를 폐서인하고자 하였으나 세자의 강한 반발로 빈으로 정하고 새 황후를 맞이할것을 고종에게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죽을때까지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명성황후의 폐서인 소식등이 전해지자 조선백성들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군사를 데려오게 되자 친러파 이범진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기게 된다.
실제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고종과 세자는 일본의 무차별적 공격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것도 사실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조선은 러시아에 많은 잇권을 줄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압록강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과 종성의 광산채굴권, 경원전신선을 시베리아 철도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월미도 저탄소 설치권등 경제권 잇권을 챙기게 된다. 이렇게 되자 구미 열강등에서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게 되어 경인.경의 철도부설권등 중요 이권이 열강에 값싸게 넘어가게 된다.
약 1년간의 시간이지만 러시아에게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그러자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로 광무로 고치며 황제 즉위식을 통하여 제한 제숙이 독립국가임을 선언한다.
1876년 강화도서 한일수호회담 개막
1650년 프랑스의 철학자 겸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 사망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서 지내면서 그곳의 차가운 바람을 이기지 못한 것이 폐렴의 원인이었다. 스톡홀름 묘지에 안장됐다가 1819년 프랑스로 옮기던 중 한 흠모자가 두개골을 훔쳐가는 바람에 시신보다 늦게 프랑스로 옮겨지는 등 수차례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고, 1616년에는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스콜라 학문에 불만을 품고 세상을 배울 것을 결심, 네덜란드 장교로도 복무했는가 하면 유럽 각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둔 데카르트는 철학 수학 기하학 자연과학 등 필요한 것은 모두 배웠다.
당시 학문이 방법론적 기초가 없는, 주관적 상상과 근거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자 그의 지적 공허함이 그를 엄습했다. 결국 데카르트는 자신의 학문적 기초를 확실히 하기 위해 불확실한 모든 지식을 하나하나 의심해 나갔다. 소위 방법적 회의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결과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한다 해도 단 한가지, 즉 의심하는 나란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명제이자 출발점이다.
1531년 영국왕 헨리8세, 영국국교회(성공회) 수장으로 공인
479년 공자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