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붓아, 먹아, 이 말을 잘 들어라
번역문
후세의 군자는 참으로 저술에 능하지 못하다.
능하다 한들 무엇을 저술할 것인가? 말할 만한 것은 옛사람이 다 말하였고,
옛사람이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은 감히 말할 수 없는 바이니, 저술을 일삼을 일이 없는 것이다.
선유(先儒)가 저술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세상에 가르침을 부지할 때 글을 썼고, 많은 사람의
미혹함을 분별할 때 글을 썼고, 성인의 뜻을 발휘하거나 사관(史官)이 빠뜨리고 적은 글을 보충할
경우에 글을 썼다.
이 몇 가지 경우 외엔 글을 쓰지 않았다. (중략)
아, 선비의 저서는 위로는 후세를 맑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길이 전할 계책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전인(前人)이 남긴 글의 찌꺼기를 다시 주워 모으는 것이라면 좋은 책판
재목을 베어 책벌레한테나 먹이는 꼴이니 누구를 위하여 이것을 한단 말인가? 또 책이 귀한 것은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니, 진실로 어찌 꼭 내 손에서 나온 뒤에야 마음이
흡족해질 게 있겠는가? (중략)
그 옛날 안연(顔淵)은 누항(陋巷)에서 조용히 거처하며 한 편의 글도 남긴 게 없었지만 성인이
그를 인정해 주어 여러 현인 중 으뜸이 되었고, 후인들도 그가 저술을 남기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문장으로 전해지는 것은 사람됨으로 전해지는 것만 못하다.
문장으로 사람이 전해지는 경우는 때로 사라지지만, 사람됨으로 사람이 전해지는 경우는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난다. 배우는 자가 다만 성인이 남긴 경전을 품고서 삼가서 지키고
독실히 행한다면 죽은 뒤에 편지 한쪽이나 짧은 글조차 없다 해도 순유(醇儒)가 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나는 예전에 학문하는 방법을 몰라 함부로 글을 적은 일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욱 부족함을 느꼈다. 이에 두려워지며 정신이 번쩍 들어,
적어 둔 것들을 가져다가 불에 던지고 필묵을 주머니에 담아 다시는 쓰지 않을 뜻을 보이며 말했다.
“붓아, 먹아, 이 말을 잘 들어라.”
원문
後世君子, 固無能於著述. 雖曰能之, 奚述焉? 可言者, 古之人盡言之; 其未言者, 所不敢道也,
盖無事乎著述爲也. 竊甞觀先儒氏之述作也, 扶世敎則書, 辨衆惑則書, 發揮聖人之旨,
補史氏之闕文則書. 無是數者, 不爲也。(중략) 嗟呼! 士之著書, 上欲以淑來世, 下不失爲不朽計.
若復掇拾前人糟粕, 災梨棗以餉蠧魚, 誰爲而爲之? 且所貴乎書者, 以其資人之用也,
顧何必出吾手然後恔於心乎? (중략) 昔顔淵默然處陋巷, 無一篇書, 而聖人與之, 爲羣賢首,
後人亦未甞以是病之. 故傳之以文, 不若傳之以人. 以文傳人者, 有時而泯; 以人傳人者, 久而彌章.
學者但當抱遺經, 謹守而篤行之, 雖身後無片簡隻辭, 不損其爲醇儒也. 余往也, 學不知方, 妄有記述,
旣而內顧, 彌覺不足. 乃惕然悟, 取而畀之欝攸之神, 囊筆櫜墨, 以示不復用曰: “毛穎陳玄, 實聞斯言.”
- 한장석(韓章錫, 1832~1894), 『미산집(眉山集)』 「분고지(焚稿識)」
해설
미산(眉山) 한장석이 이 글을 쓴 19세기 말은 지금보다 책을 내기도 어려웠고, 글의 전파 속도도 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장석은 글 쓰는 일에 대해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보고, 심지어 전에 써 두었던 글들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태우기까지 했다. 한장석은 어떤 경우에 글을 쓰는 것인지, 왜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을 꼭 내가 써야 하는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점검했다.
그리고 날로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날마다 새로운 학설을 내세워 천하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는
것 가운데는 성인의 도를 잃은 것이 열에 아홉이라 하며 저술이 가져오는 화(禍)를 우려하기도 했다.
그가 40세(1871)에 지은 『자서(自序)』의 내용도 이와 유사한데, 그는 이 글에서 글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잘못 쓴 글로 인해 허물을 남기느니 차라리 독서만을 일삼고 글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정신이 삭막하고 지기(志氣)가 또 예전 같지 않아서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하면 아주 난처해지니,
그러면서 어찌 진척이 있기를 바라겠는가? 차라리 사서(四書)를 숙독하고 궁리치지(窮理致知)에
힘써서 붓과 벼루를 불태워 버리고 한 글자도 함부로 짓지 않아야만 허물을 줄이고 일을 덜게
될 수 있을 것이다.” [菁華索然, 志氣又不如前, 握管對觚, 已戛戛乎難矣, 尙何望其有進耶?
無寧熟讀四子書, 用力於窮理致知, 焚棄筆硯, 不妄作一字, 庶乎寡過而省事耳.]
오늘날은 이 글을 쓴 19세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글을 읽고 쓰고 전하기 편한 세상이다.
컴퓨터를 켜면 온갖 자료들을 불러와 읽을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대중에게 보일 수도 있다.
글을 읽은 사람들은 공감하는 글을 SNS를 통해 지인에게 전파하고, 이를 놓고 글로써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이제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이 마음먹고 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말하듯이 가볍게 남길 수 있는 것이 글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글쓴이의 손을
떠난 글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만리 날아가고, 한번 날아간 뒤에는 삭제를 원한다 해도
완전히 삭제하기가 어려워진다. 전파가 쉬울수록 수습은 어렵다.
글쓰기가 보편화된 세상에 살다 보니, 글을 쓸 일이 자주 생긴다. 시대가 달라졌고,
글의 효용도 다양해졌다고 가볍게 생각하다가도 선인들이 저술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글을 쓰는 본질적인 이유’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쓴이-하승현(河承賢)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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