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런의 조각상. 그리스에 있는 바이런의 조각상.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죽었지만 바이런이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스의 독립전쟁은 전 유럽의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반전의 예술사 ⑭ 조지 고든 바이런
그의 미모와 함께라면 비극조차도 아름다웠다
베토벤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교두보에 서 있던 예술가였다. 그에게서 가장 낭만주의답지 못한 점을 꼽으라면, 수많은 고통과 비극 속에서도 결국에는 희망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는 최악의 순간에도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신의 날개 안에 천국에서 하나가 될 거라 노래했다. 어쨌거나 그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자유를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절망에 중독된 사조였다. 그 절망이란 이름의 독은 현실세계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즈음만해도, 시민들은 이 폭풍우만 지나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과학의 발전은 우리를 보다 현명하게 이끌 것이라고, 산업화는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권, 과학, 산업화, 이 모든 낙천적인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판으로 증명되었다. 혁명으로 쟁취한 자유는 곧바로 반 혁명파에게, 또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독재자에게 무력하게 강탈당했다.
그러나 실망이 되풀이되면, 사람이란 그에 익숙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듯이, 사람들은 당연한 듯 또다시 현실의 불행에 무감각해졌다. 이러한 무감각을 인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 다름 아닌 시인 바이런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보아도 이기적이리만큼 비관주의의 정수를 달리는 인물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각을 애써 일깨우고, 현실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며, 바이런은 나폴레옹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괴테나 푸시킨처럼 최고 명성의 작가에서부터 비스마르크와 같은 위대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가장 세상물정에 관심이 없을 법한 십대 소녀조차도 바이런의 작품이라면 히스테리에 가까운 열광을 보였다.
바이런의 작품들. 출판되는 그날로 매진을 기록했던 바이런의 작품 초판본들. 차례로 ‘돈 주앙’, ‘마제파’, 차일드 해럴드의‘편력’
어떻게 조지 고든 바이런과 같은 인간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는 그의 직계 조상들을 살펴보면 파악 가능하다. 바이런 가문은 귀족 집안이었지만 다혈질로 명성이 자자했다. 큰할아버지는“악당 바이런” 으로 불리는 살인 전과의 소유자였고, 해군제독을 지낸 친할아버지는 부하들 사이에서“악천후 잭” 이라 불리었으며, 아버지는“미치광이 존”으로 통했다. 특히 “미치광이 존” 은 남달리 복잡한 여자 관계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조지 고든 바이런은 그가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독자였다. 이 결혼은 애정보다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바이런의 어머니 캐서린 고든은 스코틀랜드 출신 부호의 상속인이었으며, “미치광이 존”은 귀족 명패만 달고 있는 빚에 시달리는 가난뱅이였다. 정략결혼이었던 만큼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며 아내의 재산마저 몽땅 탕진한 존은 집을 나가 프랑스를 방랑하다 객사했다.
이런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그녀가 분노의 표적을 아들에게 돌렸다는 데 있었다. 만만치 않을 만큼 격렬하고 변덕스런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아들 바이런에게 냉담했으며 때로 는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기형인 아들의 오른쪽 다리를 가지고 인신공격성 발언도 했다. 유모 메이 그레이 또한 독실한 청교도여서 언제나 엄격한 기준을 들이댔다.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는 유년기를 보낸 바이런이 궁극적 비관주의자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비극은 끝나고, 결혼으로 모든 희극은 끝난다” 라는 그의 명언은 염세적인 삶의 관점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바이런의 삶이 전적으로 비극적이지만은 않았다. 큰할아버지에게서 남작 지위를 물려받고 어머니로부터 독립한 뒤로는 오히려 행복에 가까운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그는 빛나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유럽을 2년간 여행하고 이를 토대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12)라는 장편 시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 대한 찬사와 인기는 당시 바이런의 저 유명한 소감으로 알 수 있다.
“ 어느날 아침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다(I awoke one morning and found myself famous).”
바이런의 이름을 단 신작은 나왔다하면 수 만부가 며칠만에 동이 났다.
“ 나는 절대로 글을 두 번 고치지 않는다”라고 공언할 만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영감과 직관에 남다른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바이런에게는 글만큼이나 자신 있는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외모였다.
미적 기준이 다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바이런의 초상화는 상당한 수준의 미남을 묘사한다. 실제로 동 시대에 그는 ‘그리스 조각상 같은 얼굴’로 명성이 높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실물로 보고 감격해서 기절하는 여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바이런의 문학이 비현실적이리만큼 신속하게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외모에 대한 명성도 한몫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이런의 모습. 실물을 보고 혼절하는 여성이 있을 정도로 바이런의 외모는 출중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초상화를 앞다투어 그렸다.
그는 시대의 지성인이자 또한 일거수일투족 주목받는 연예인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다이어트 아이콘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였던 바이런에게도 두 가지 신체적 약점은 존재했다. 하나는 오른쪽 다리가 기형이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모친까지도 비열하게 놀려대던 기형 다리는 그에게 일생일대의 콤플렉스였다. 자신을 지칭 하건 아니건 어디서 “절름발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한없이 예민하게 반응할 정도였다. 이런 신체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체력 단련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승마·크리켓·수영·펜싱·사격에 이르기까지 당시 유행하던 종목은 대부분 섭렵한 만능스포츠맨이었으니, 거리가 무려 61킬로미터나 되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한숨에 헤엄쳐 건널 정도였다. 그가 운동에 집착했던 이유는 또 하나의 약점인 살찌기 쉬운 체질 때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뚱보가 될까봐 노심초사한 바이런은 운동 이외 에도 충격적이리만큼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시도했다. 조금만 군살이 늘었다 싶으면 식초에 절인 감자와 소량의 비스킷만 먹으며 근근이 연명했고, 일부러 엄청나게 두꺼운 털스웨터를 입고 땀을 냈다. 그러다 얼마 안있어 보상심리로 흥청망청 먹어대다가 소화불량 때문에 제산제를 복용하곤 했다.
1816년 제네바 호수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셸리 일행과 머물 때에는 아침은 차 한 잔에 얇은 빵 한 조각, 저녁은 가벼운 채소와 와인을 탄 탄산수로 끝냈다. 차를 마실 때는 절대로 우유나 설탕을 넣지 않았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억제하기 위해 그의 손에서는 담배가 떠날 날이 없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바이런의 작품은 낭만주의 시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 또한 바이런의 ‘사르다나팔루스’ 를 읽은 뒤 이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 런던의 한 와인상은 신사들의 체중을 달아주고 이를 장부에 기록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1806년 바이런의 몸무게는 88킬로그램에 육박했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1811년에는 57킬로그램에 불과했다. 5년간 거의 32킬로그램에 가까운 감량을 한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혹사시키는 이유에 대해 바이런은 “날카로운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바이런 개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최고로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대중의 모범이자 모방의 대상이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다이어트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위에 언급한 와인상에는 댄디룩을 창시한 남성 정장의 선구자 보 브러멜도 자주 와서 체중을 재곤했다. 그는 1815년부터 1822년까지 40번이나 다녀갔는데, 이 기간 중 그의 체중은 81킬로그램에서 69킬로그램으로 줄어들었다.
바이런의 몸매에 대한 강박은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바이런 덕분에 빅토리아 시대에는 연약한 몸매와 (영양실조로) 창백한 뺨이 날카롭고 예민한 지성과 동의어로 취급됐다. 십대에서부터 환갑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이 식초와 밥만으로 생명을 유지하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바이런은 “진정한 여성이라면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오직 랍스터 샐러드와 샴페인만이 예외가 될 수 있다” 라며 이런 병폐를 부추겼다.
그리스에 막 도착한 바이런을 환영하는 그리스인들.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전쟁 중인 그리스에 대한 지지운동이 벌어졌다.
타고난 필력과 미모, 그리고 후천적으로 단련한 신체로 바이런은 여성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성들과 뿌린 염문은 아버지 못지않게 화려하고 또 방탕했다.
1815년 첫 번째 아내였던 밀뱅크는 “남편은 정신적으로는 정상일지 몰라도 도덕적으로는 비정상”이라며 남편의 방탕함을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떠났다. 이복누이인 어거스터와 근친상간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으며, 동성애자라는 의심도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대중적인 명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보수 언론을 포함한 반대편 안티 세력들의 공격도 거세졌다. 결국 28세가 되던 1816년 그는 수많은 명성과 오명을 뒤로 하고 영국을 떠났다.
바이런의 여성편력은 영국을 떠나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그칠 줄 몰랐다. 베네치아에서는 스스로 200명이나 되는 여성과 사귀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사귀는 여성이 늘면 늘수록 그의 문학적 영감은 빛을 발했다. 훗날 슈만을 위시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깊고 진한 영감을 남긴 <돈 주앙>과 <만프레드>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던 바이런은 1823년 그리스의 메솔로기온으로 향했다. 이 시기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창 독립운동 중이었다. 팔이 안쪽으로 기울 듯이 서양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바이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다혈질이었던 그는 한술 더 떠서 군대 경험도 전혀 없는 주제에 그리스 반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첫 전투를 치 르기도 전 다이어트에 오랫동안 혹사당한 그의 몸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두 달 뒤 서른여섯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8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퇴폐적인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던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문의 영지에 매장되어 있던 그의 시신이 오늘날처럼 웨스트민스터 지하에 입성한 것은 20세기인 1969년의 일이다.
글·::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47
Symphony No.4 in A major, Op.90 ' Ita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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