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심善心(善人 및 일반 불자님들의 마음) : 선심은 소수의 특정 중생을 대상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선심은 3가지 한정적 면이 있다. ⓵선심의 대상이 되는 대중의 범위가 주변인 또는 가끔씩 접하는 단체 등으로 한정적이다. ⓶매일 꾸준히 시시각각 선심을 낼 수 없다. ⓷이타심이 자기를 우선하는 이기심을 앞서기 어렵고, 대부분은 자신에게 어떠한 손해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이뤄진다.
이 단계에 해당하는 일반 선인을 제외한 불교 입문 불자님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소승 및 대승에 진입하기 이전의 초급 단계(보리도차제 '하사도' 해당)로써 “죽음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처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후 가장 먼저 인과율을 믿고, 삼악도의 고통을 고찰하고 10불선업(10不善業: 몸으로 살생·도둑질·사음 않고, 입으로 거짓말·이간질·악한말·꾸밈말 하지 않고, 뜻으로 탐욕·화냄·사견 갖지 않음)을 끊는 계율을 실천하며, 지난 과오들을 참회하고 복을 닦아 향후 윤회의 원리에 순응하여 향후 삼악도에 나지 않고 인간이나 천신 등 삼선도에 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사무량심(소승, 색계 4선 가운데 초선을 증득한 자부터 해당) : 사무량심은 소수 특정인을 향한 선심에서 무량한 중생으로 그 범위가 확대된 마음이다. 네 가지 중 ‘자애’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 ‘연민’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기쁨’은 고통에서 벗어난 중생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 ‘평등’은 앞의 3가지를 부단히 정진하며 집착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무량’은 연이 닿는 중생이 무량하고, 무량한 복을 인연으로 무량한 결과를 감득한단 뜻이다.
채워도 만족되지 않는 욕심이 일체 고통과 윤회의 원흉임을 알고, 사성제를 통해 해탈을 구하는 출리심을 닦아가며, 비로소 초선(初禪: 감각적 쾌락과 욕망 등의 옳지 못한 것들에서 벗어나 사유와 숙고와 명상을 통해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선정의 경지)에 이르러야 이러한 사무량심이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레 발현된다.
초선에 관한 위의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사무량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여러 가지 심경이나 외부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뭇 중생에 대하여 원수나 친한 이나 똑같이 평등하게 대하며, 마음속에 결코 애증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일반적 선행을 훨씬 초월하는 지극한 뜻을 가지고 있으나, 일체 중생을 자신의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승에서는 소승이라 폄칭하며, ‘자신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自了漢]’이라 부른다.
3. 자비심(대승에 진입한 수행자) : 대승에서는 보리심을 증득하기 전에 기초를 닦기 위해 자비심을 발하게 하는데, ‘7중 인과’ 차제를 한 층씩 올라가면서 보리심이 성숙된다. 7중 인과란 "⓵지모知母: 무시이래, 중생은 모두 나의 부모이다. ⓶염은念恩: 금생의 어머니도 우리에게 큰 은덕을 베풀었지만, 지난 생의 어머니도 일체를 희생하셨다. ⓷보은報恩: 어머니를 고통에서 구원하여 안락을 얻도록 한다. ⓸자심慈心: 모든 중생이 복락과 복락의 원인을 얻기를 희망한다. ⓹비심悲心: 중생들이 영원히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⓺증상심增上心: 자기 부모와 같은 중생들이 이고득락 하도록 중대한 책임을 맡을 것을 결심한다. ⓻보리심菩提心: 나 자신이 아닌 중생의 이익을 위해 하루빨리 부처님 경계를 성취하기를 희망한다."
즉 중생을 어머니로, 자식으로 생각하여 일체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발심’을 내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겠다 마음먹는 것과 실제 어디로 가는 것이 다르듯이, 자비심은 전자이고 보리심은 후자이다.
4. 보리심(대승을 구현하는 수행자) : 보리심은 한마디로 ‘일체 중생을 위하여, 일체는 모두 중생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중생의 고통을 내가 짊어지고, 나의 모든 복덕의 과보는 중생들이 누리도록 하는 마음이다. 보리심이 생기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에 옮긴다. 일체 중생을 구원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세세생생이 걸쳐 수행하는 것이 보살님들이시고, 이를 완벽하고도 원만하게 구현하시는 분이 이곳 사바세계에서는 화신불 석가모니부처님이시고, 보신불 가운데에서는 불중불 천중천 아미타부처님과 극락세계가 대표적이다.
(보리심의 핵심을 노래한 무착대사의 ‘불자행 37송’ 가운데 대표적인 게송들을 싣습니다.)
1. 무시이래로 자비하신 부모중생이 고통당하는데 자기의 안락이 무슨 소용인가. 이같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보리심을 발휘함이 불자행이라네.
2. 모든 고통은 아집에서 생기고 원만한 큰 깨달음은 보리심 때문이니 자신의 공덕을 타인의 불행과 경건하게 바꾸는 것이 불자행이라네.
3. 만약 어떤 사람이 탐욕심으로 나의 재산을 빼앗거나 남을 시켜 뺏어도 몸과 재물 등 삼세 선근을 마땅히 그에게 회향함이 불자행이라네.
4. 비록 자신에게 작은 잘못도 없을 지라도 적이 내 머리를 베어내려고 하면 대비의 힘에 의지해 그의 모든 죄를 자기가 대신 받는 것이 불자행이라네,
5.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을 비방하여 삼천세계에 알려도 마땅히 자비의 힘으로써 그의 공덕을 말해 주는 것이 불자행이라네.
총정리 : ⓵선한 마음은 일부 특정된 중생을 상대로 하고, ⓶소승의 사무량심은 무량한 중생을 상대로 하며, ⓷대승 입문의 자비심은 모든 중생을 숙세로부터의 어머니로 보고서 그들이 고통에 빠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누군가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⓸대승의 구현인 보리심은 그런 마음가짐을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서슴없이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제 자신의 근기에 대한 성찰: 유년시절부터 절에는 종종 가보았지만 단순히 절하고 소원을 비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우연히 20대 초반에 공익근무로 복무하며 빈 시간에 불교 카페 등에서 교리를 익히고 관련 책을 사다 보면서 점차로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넓어져갔지만, 어린 나이로 스스로 채식하고 이성욕을 아예 끊고서 선정을 바탕한 수행을 스스로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후 단지 다도와 큰스님 법문을 청취하며 마음챙김하는 것으로 수행을 대신하며 대부분의 세월을 수행과는 개연성이 없는 진로 공부, 공무원 준비, 사회복지 편입 등의 순으로 이어졌고, 그러다 2011년 우연히 송광사 5박 6일 하계 선수련 법회에 참여하며 처음 선정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이후 단 1회 수행에 그쳤고, 전과같이 그저 계와 정이 없이 일상생활 가운데 가끔씩 법문 듣고 불서 읽는 수준에 그쳤으며, 무엇보다 친구들과의 잡담과 용돈 소모 등의 이유로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대학 생활 중 사회성 부분이 많이 취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졸업 1학기를 남겨두고 말도 안 되는 조직적 불법행위를 영문도 모르고 일방적으로 오랜 시간 당하면서 이후 십수 년의 시간을 고통 가운데 보내면서 불교와는 아주 멀어졌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방황과 방탕의 나날들을 보내며 어떤 일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순정시대를 만나고 정토문을 이해하며, 심적 고난들을 점차로 극복해가며 조금씩 이전의 정상적 삶으로 회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6년 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나쁜 습관들을 고쳐가기로 마음먹고, 집에 아미타불님을 모신 법당도 꾸리고, 인과응보에 관한 구할 수 있는 모든 책들을 구입해서 수십 번 연거푸 공부해갔고, 그 인과 이야기에 들어있는 계율 부분들도 관련 책을 통해 공부하며 오랫동안 나쁜 습관들에 노출된 신구의를 고쳐나갔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수년에 걸쳐 거듭되면서 생활이 단조로워지고, 그에 따라 염불하고 불교 교리를 탐구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과연 소승의 초선에도 들지 못하는 제 자신에게 있어 정토문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결론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기존에 쉽게 말하곤 했던 6바라밀이 대승의 위대한 수행자들이 누겁에 걸쳐 닦아온 보리심의 신구의 활동임을 알았고, 역시나 제 간헐적인 종종의 선심 선행에 견주어서 스스로 일컫곤 했던 자애와 연민이라는 용어마저 진실로 소승의 성자들이 내는 신구의 활동임을 알고서 오랫동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나아가 불교 입도의 기본 요건인 3귀 5계에 있어서도 그 철저하지 못함을 통감했습니다.
민국시기 홍일율사 께서는 스스로를 점검하시면서, ‘나는 비단 비구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미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하며, 심지어는 오계를 다 받은 우바새의 자격마저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하셨고,
명대의 자백대사 께서는 40여 년간 옆구리를 바닥에 대지 않고도 오히려 미세한 계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끝내는 감히 출가자에게 사미계와 비구계를 주지 못하고, 단지 부득이하게 재가불자의 오계만 주셨고,
명대의 연지대사 께서는 스스로를 ‘보살제자’ 혹은 ‘사문’이라 부르고, 감히 비구라고 자처하지 않았으셨고,
명대의 우익대사 께서는 율장을 열람한 후 “퇴계연기退戒緣起”를 쓰면서 한결같이 받은 바의 계법에 여법하지 못하여 비구의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보살사미’라 부르셨으며,
민국시기 태허대사 또한 스스로를 ‘비구도 아니며 부처도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단지 나를 보살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금의 고승대덕들의 계율에 대한 엄정하고 신중한 태도에 비춰볼 때에 제 자신의 뒤늦은 자각은 실로 한참이나 진실하고 깊이 있는 태도가 못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말법시대에는 눈, 귀, 코, 혀, 몸에 상응하는 온갖 물품과 콘텐츠 등이 넘실대어 진정 5계마저 완전을 기하기가 실로 어렵고도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제 옛 불교공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환란에 곧장 실패를 겪은 근본이유가 계가 바로서기 어려워 이에 따라 뒤이은 정과 혜의 자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실로 제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집경 월장분 말씀대로 “나의 법法이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수행修行을 하여 불도佛道를 닦지만 한사람도 진리를 터득할 수 없을 것이다.”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보다 3귀 5계가 갖춰지기 어려운 오늘날의 불자에게 정토문은 성도문에 견주어 확실한 믿음에 따른 결실을 약속하는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혜정상인님을 위시한 정전스님의 가르침대로 올곧게 정토문을 만나자마자 제대로 한 길로 갔어야 했는데, 뒤늦게서야 정토문을 중심에 두고 성도문의 계정혜 공부도 곁들이며, 전체적으로 공부를 다시 해나가면서 제 자신의 근기에 대한 고찰과 참회가 병행되었고, 성도문과 견주어 정토문의 구제법에 대한 확신이 그러한 수학 과정 속에서 더욱 절실해져갔습니다. 지금 알고 있던 것을 처음부터 자각했더라면, 그토록 헤매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 글이 연우님들께 별안심(지성심, 심심, 회향발원심) 가운데 심심深心을 구성하는 기와 법에 대한 두 가지 깊은 믿음 가운데 ‘근기를 믿음’ 부분에 있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신기信機
“자신은 죄악생사범부로서 무량겁 동안 항상 침몰하고 항상 유전하여 벗어날 기연이 없음을 깊이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능력이 없음을 믿는 것으로, 자력으로는 생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종법사 지음, 정전스님 번역, 『정토종개론』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고맙습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중생들이 정토문으로 깊이 들어오는 과정도 다 각각의 인연과보에 따라 다른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관음도량의 절 법당에서 생소하게도 아미타경을 처음으로 보고 그날로 바로 아미타경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지만 경전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여 가르침을 주실 선지식이 없다보니 10년을 성도문에서 전전긍긍하다 정토문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년 세월을 돌아 지금 정토문에 와서 생각해 보건데 성도문을 통해 결코 이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해 보지 않고서는 이 구제법문의 귀함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면에서 성도문을 통해 부처님의 본 마음을 알고 나의 근기를 바로 알아야 자력이란 시건방을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오로지 불력에 의한 구제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돌아 돌아 온 듯 해도 흔들리지 않는 신심의 발판이 되어 줄 지난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연우님의 진솔한 수행기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연우님의 진솔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