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는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라 부르는 관동대지진 100년을 맞았다.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일본 표준시)에 리히터 규모 7.9의 강진이 일본의 중심지 도쿄와 간토[관동(關東)] 일대를 강타하였다. 이 지진을 메이지유신 후 근대사회로 진입한 일본이 맞닥뜨린 최대의 재난이었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14만 명에 이르는 피해는 당시 일본에 살던 조선인에게도 덮쳤는데, 그것은 단순한 지진 피해뿐 아니라, 끔찍한 만행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은 모두 233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지금까지 한일 양국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숫자는 6,661명이다. 그러나 2013년에 발굴된 독일 외무성이 1924년 3월 작성한 영문 사료(MASSACRE OF KOREANS IN JAPAN )에 따르면 기존에 알려진 것의 3~4배에 해당하는 총 2만 3천58명이었다.
한국인이 이 재난을 관동대지진이란 중립적인 이름 대신 ‘간토대학살’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 정부는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조사했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했으며, 학살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식민 지배와 강제 동원, ‘종군 위안부’ 문제 등 자국이 자행한 반인간, 반문명적 만행에 대해서 어떤 책임과 의무도 외면하는 게 일본이고, 일본 정부다.
당시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면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이 때문에 적어도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었다. 최근, 일본 국회에서 이 사건에 대해서 진상을 조사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일본 정부에서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진상조사에 나설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도비구치(鳶口)는 일제강점기 경찰의 지휘를 받는 일본인 소방수가 쓰는 쇠갈고리인데 소방수는 조선 민중의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데도 이 쇠갈고리를 사용했다. 도비구치를 들고 군중을 향해 돌진하여 이를 휘두르는 소방수들의 모습이 마치 악마와 같았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했다. 이 악마는 1923년 간토대학살에서도 목격되었다.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한 일본인들은 쇠갈고리를 휘둘러 피란길에 오른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대지진 1년 전인 1922년 니가타현 나카쓰가와강 상류의 수력발전소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600여 명이 가혹한 중노동과 민족차별을 강요받아 적어도 12명이 사망했다. 이 학살사건은 마치 간토대학살의 예고편과 같았다. 유언비어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유포, 청년단‧소방대‧재향군인회 등 무장한 주민들에 의한 공격, 이에 경찰이 동참 또는 협조‧묵인하고 은폐한 사실까지 1년 후 간토 지역 곳곳에서 재현되었다.
대지진 당시 도쿄 부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약 10만 5천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가옥 37만 채가 파손되었다. 가장 먼저 일본 천황에게 달려간 내무성 장관 미즈노 렌타로는 공석이었던 총리를 대신하여 지진 수습과 인명 구조 대책을 세우는 대신 천황의 안위와 국정 불안을 염려했다. 그리고 곧이어 계엄령을 선포하여 ‘불령선인의 폭동설’을 명분으로 삼아 주민 통제에 나섰다. 미즈노는 3‧1운동 당시 혼란한 정국 수습을 위해 사이토 조선 총독과 함께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왔던 인물이다.
유언비어가 퍼지자, 재향군인과 청년단, 소방대 등 지역 주민들은 신속하게 자경단을 조직했다. 자경단에겐 조선인 학살이 군대와 경찰이 ‘허락한 살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특히 자경단의 중심이었던 재향군인은 동학농민군 학살, 러일전쟁 전후 의병학살과 3‧1운동 탄압, 연해주와 간도 일대 독립운동 근거지 말살과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이었다. 조선인을 탄압 학살한 경험, ‘불령선인’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시선은 고스란히 일본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이들이 자경단을 지도하며 조선인 학살을 선동했다.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은 어린이들의 눈과 마음에도 각인되었다. 도쿄와 가나가와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쓴 소감문에는 조선인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증오라는 감정까지 담겼다. 그들은 경찰과 마을 사람들이 칼이나 죽창을 들고 조선인들의 소동을 정벌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조선인 학살의 끔찍한 경험은 아이들의 일상에서 자경단 놀이로 재현되었다.
열 살 안팎의 아이들이 자경단 놀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목표물로 삼아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집단적 가해를 놀이 삼아 합리화한 것이다. 이 심성은 불과 십여 년 후에 벌어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순응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자경단 놀이는 지금도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향한 증오범죄로 재현되고 있다.
조선인박해사실조사회는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 부,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군마현 등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직된 단체다.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가 중심이 됐다. 후세 다쓰지, 요시노 사쿠조 등 일본인도 협력했다. 이들은 유족들을 방문하고 참살당한 시체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골과 제대로 된 무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매장지들을 참배하면서 대학살의 참상을 듣고 기록했다.
간토대학살 이후 일본 정부 차원의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은 지지부진했다. 9월 중순부터 일본 정부는 학살 자경단원을 체포해 재판에 넘겼지만, 처벌은 반발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이루어졌고, 재판도 형식적이었다. 조선인 살해에 대한 죄는 가볍게 다뤄졌고, 항소심에서는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반면에 간토대학살의 진상이 전파될 수 있는 집회와 강연회는 금지당했고, 희생자 추모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간토대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집회와 투쟁을 이어갔다. 3‧1운동, 5‧1 메이데이, 8‧29 국치일과 더불어 9‧1 간토대지진 추도 집회는 4대 민족투쟁의 하나로 193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현재 일본에는 간토대학살을 기억하는 13개의 추모비가 세워졌는데, 매년 9월 초에 한‧일‧재일 시민들이 함께 추도회를 열고 있다. 이 추모비에는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과 시민들이 그동안 밝혀 온 간토대학살의 진상과 희생자의 이야기가 담겨 간토대학살 100년을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현장이자 기록이다. 간토 지방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추도회와 추모비에 대한 정보는 고려박물관에서 제공했다.
100년이 흘렀는데도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한일 간에는 여전히 ‘현안’이라고 부르는 미해결의 역사 청산 문제가 양국의 선린 교류를 막고 있다. 거기다 일본이 원전 사고 발생 12년 만에 후쿠시마 발전소에서 처리한 방사성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기 시작하면서 우리 국민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중국이 일본 수산물 금수 조치를 내리고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항의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방류를 강행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방류가 안전하며 사람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라고 하지만, 바닷속 생태계와 인류의 안전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원전 사고 뒤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일은 처음이며,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일이므로 단순히 수치만으로 안전을 말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오염수 방류는 사고 원전을 폐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 오염수를 오래 보관하는 데 발생하는 비용을 아끼려는 선택일 뿐인데, 우리 정부는 일본과 도쿄전력의 입장을 대변하기 바쁘니 기가 막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