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바위 둘레길에서
지난 연말 방학에 들어 보름이 지난다. 말벗도 없는 고립된 섬에서 지내다 뭍으로 건너와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낸다. 창원 근교 산자락을 누비거나 강둑으로 산책을 나가고 있다. 다음 주는 신입생 예비소집도 있다기에 근무지에 한 번 나가봐야겠다. 정년을 얼마 앞두고 지난해 봄 내가 옮긴 근무지가 거제라 처음엔 난감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적응되어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일월 둘째 월요일은 바닷가로 나가볼 생각으로 마산역 광장으로 나갔다. 내가 근무하는 거제가 빤히 건너다보이는 구산 갯가로 나갈 참이다. 역 광장 모퉁이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원전행 녹색버스를 탔다. 구산 원전은 거제 칠천도와 마주한 진동만 갯마을로 낚시꾼이 가는 곳이지만 나는 산행 산책 삼아 더러 찾는다. 원전마을 뒷산에 벌바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기도 한다.
버스는 마산 어시장과 댓거리를 거쳐 밤밭고개를 넘었다. 신도시가 들어선 현동을 지나 구산 면소재지 수정을 거쳐 백령고개를 넘어 내포로 갔다. 최근 로봇랜드가 개장되어 반동삼거리 일대는 5호 국도가 연장 신설되고 있어 도로망이 달라지고 있었다. 5호 국도 기점이 마산이었는데 거제까지 연장되면서 구산면 구간은 거의 완공 단계고 해상 구간은 아직 공사가 착공되지 않았다.
승객이 거의 내린 버스는 로봇랜드에서 난포를 지나 용호마을로 들어갔다가 심리로 나왔다. 원전 종점까지는 한 낚시꾼과 아까 어시장에서 탄 할머니였다. 할머니 짐이 크고 무거워 내가 내리면서 들어주었더니 고마워했다. 원전 포구는 임자를 만나지 못한 낚싯배들이 여러 척 묶여 있었다. 방파제로 나가 바다 저편을 바라보니 내가 한동안 머무는 거제의 산세와 지형들이 낯익었다.
실리도가 방파제처럼 감싼 원전 포구를 한 바퀴 둘러 마을 안길에서 벌바위 둘레길로 올랐다.벌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나는 몇 차례 다녀갔다. 장수암에서 올라온 고갯길에서 등산 데크를 따라 오르니 근래 조성된 김해 김 씨 삼현공파 가족 묘원이 나왔다. 어디에선가 여러 기를 이장해 온 납골 평장 묘지였다. 근동에서 개발로 인해 옮겨야할 사정이 있는 문중 묘지인 듯했다.
사람들이 더러 다녔을 법한 등산로를 올라 진해만을 부감하는 바위에 섰다. 홍합 양식장 부표가 뜬 푸른 바다엔 가끔 어선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났다. 안민고개와 불모산 산등선이 에워싼 진해 시가지와 해군 통제부가 드러났다. 진해만의 작은 섬들도 점점이 떠 있었다. 동북 방향에서 진해만을 굽어보고 발길을 돌려 산마루로 올라 벌바위에는 전에 없던 전망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이제 진동만 건너편은 내가 한동안 머물다 떠나온 거제 일대가 다 드러났다. 거가대교 연륙교 구간에서 장목 대봉산이 보였다. 옥녀봉이 봉긋한 칠천도가 눈앞이고 대금산이 뾰족했다. 앵산이 고현만으로 융기해 나와 있고 그 곁으로 계룡산이 에워싼 아래 삼성조선소도 보였다. 나는 주중에 연초에 머물면서 거제 일대를 샅샅이 누벼 지도로 그려내라 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훤했다.
전망 정자에서 천둥산 정상 쉼터로 올라 가져간 도시락을 비웠다. 하산길을 단거리 코스와 장거리 코스로 나뉘는데 후자를 택해 내려섰다. 산등선 어느 지점에서 5호 국도 공사 현장이 보여 거기로 가니 심리 별장마을로 이어졌다. 낚싯배가 있는 작은 포구 마을엔 모텔과 펜션이 몇 채 보였다. 별장에서 다시 고개로 올라 5호 국도 공사장에서 아직 완공되지 않은 터널을 걸어 지났다.
점심 식후 외국인 인부를 태워오던 공사 현장 기사가 나를 보더니 의아해 했다. 나는 초행이라 길을 잘못 들어 이렇게 걷고 있노라니 했더니 운전석 옆에 타라는데 사양했다. 버스 정류소까지 태워주려 했지만 나는 차선이 그어지지 않은 미완성 신설도로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량도 사람도 다니질 않는 포장도로를 한참 걸었더니 로봇랜드 입구 양평마을이 나왔다. 2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