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금의 봄 외 4편
도은
봄은 누르는 힘이 강해서 판금板金의 얼굴이죠 전철로 끊임없이 운반되는 손가락들, 재빨리 칸에 실리지 않으면 공장 철문이 철커덩 닫혀요
차창 밖 철새들도 북쪽으로 쉴 새 없이 실려 가고 있어요 구름은 부속품을 다 끼워야 할 할당량, 끊임없이 황사를 타고 이동 중이네요
봄은 새순을 철컥철컥 실어 올까요 담장 위로 솟은 목련 나무도 흰 용접에 박차를 가하죠 나는 접합 부위를 녹여서 서로 붙이는 금속성을 생각해요 제대로 접속되면 봄꽃이 켜지기도 할까요
프레스가 뚝딱 냄비를 눌러 붙이듯 늦은 밤이 돼서야 여공들이 절삭유로 흘러나와요 저들도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하고 혼자서 늦은 식사를 하기도 해요
연립주택 작은 창으로 별빛이 조여지고 있네요 유일하게 겉돌지 않으니 꿈속을 파고들기 좋을 거예요 봄은 밤새 보일러를 돌리고 있겠죠 얼음 뚫고 복수초가 실려 나오면 땅도 예열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면 내게도 얇게 조각낸 미소가 묻어나겠죠
빛의 요원
거대한 빙벽을 휘감고 있는 백화점 뒤편
그가 반 평 남짓 유리 부스 안에 있다
주머니 속 핫팩을 쥐었다가
방한모자 챙을 깊숙이 당긴다
주차요원에겐 햇살도 계약직처럼 든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내리쬐는 시급제 햇볕
그마저도 구름에 가려 보장받지 못할 때가 있다
간간이 무전기에서 어줍은 발음이 들려오면
입김 폴폴 날리며
파랗게 언 밖을 내다본다
한파가 매머드처럼 몰려와 있다
유목민이 계절 따라 이동하면서 바위에
암각화를 그렸던 것처럼
그도 일을 따라 옮겨 다니며
각오를 새겨왔으리라
크레바스 같은 지하로 연결된
주차장 입구는 깊다
그 속으로 밀려가는 자동차들
붉은 미등의 줄은 줄어들지 않는다
폭설 경보가 라디오 잡음에 섞이면서
먹구름이 맹렬하게 다가온다
사방이 뿌연 눈보라 속에서
그가 경광등을 횃불처럼 번적인다
멀리서 보면 빛의 동굴 같다
사거리 건너던 차들이
조난행렬처럼 방향을 튼다
그랴
둥글고 따뜻한 기억을 품은 말이 있다
언제나 귓속을 구르며 데워주던 환한 한 마디
그랴
언제부턴가 내 안쪽엔 소원이 적혀 있었고
내가 질문할 때마다
아버지는 높낮이가 다른 그랴로
밑줄을 그어 주었다
뜨거운 주술이 내 안에 채워져
몸이 둥실 떠오른 나는
소를 몰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동구 밖에서 기다렸다
어느 날 흙빛 바람 한 줄기
주름 깊어진 그랴의 등을 훅, 떠밀자
검불처럼 몸이 가벼워진 그랴는
소지燒紙되어 여름밤 너머로 아득히 떠올라 갔다
오늘 아버지는 활활 하늘로 올라가셨고
재들이 치어 떼처럼
집 앞 호숫가
봄을 흙탕물로 풀어놓고
그랴 그랴, 가지를 흔들곤 한다
그랴 라는 말에 불을 붙이면
흰 종이에 적힌 아버지가 별을 켜신다
레몬이 익는 동안
태양이 둥글게 나뭇가지에 걸렸어
레몬에 햇볕이 즙처럼 고이고 있어
조바심으로 나는 껍질을 지그시 눌러보는 중이야
즙이 점점 부풀어 손끝에 묻어날 때까지
과육으로 스며드는 한낮
나무 아래서 해안림의 연주를 보았어
귓속에 울려 퍼지는 바람의 탄주에
그늘마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카페 음악 소리에 취한 레몬나무는
그때 가지를 흔들었어
어떤 소원을 이루려는 열망을 주렁주렁 매달고
쉿! 아말피 요정들이 풍성한 레몬을 세는 시간이야
단단한 외피 안에는 농밀한 슬픔이 있을 텐데
저 많은 걸 언제 다 헤아릴까
슬픔의 진원지는 언제나 너였어
나침반은 항상 네가 있는 곳을 가리켜
에이드 마시며 ‘마이웨이’를 부르던 때가 떠올랐어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던 너의 떨림을 싣고
희망봉으로 가면 배는 어디에 정박할 것인지
한여름 레몬을 한 입 깨물면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지
현기증이란 슬픈 요정이 찾아와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내 몸을 뜨게 하는 일이라는데
난 요즘 샛노란 내일을 맛보고 있어
시디신 맛 속에서 대륙을 발견하는 일이지
정상에 오르면 꼭 내 이름을 불러줄래?
새 한 마리 내 이름을 물고 와 나무에 앉을 수 있게
앗, 하는 사이
거인의 손바닥 같은 먹구름이 과수원을 움킨다 갑자기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섬광이 번쩍 스친다 전지 가윗날 같은 빛이 차갑다 뒤이어 폭우가 쏟아진다
앗,
풋사과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
구球들이 공중의 궤도를 이탈한다
떨어진다 풀잎 위로 떨어진다 덜 익은 풋이 떨어진다 막 입 벌린 까치의 부리 밖으로 떨어진다 벌레 먹은 여름이 떨어진다 폭염을 문 두견새 날갯짓 안으로 떨어진다 경운기 엔진 소리 위로 떨어진다 빗줄기를 고무줄처럼 잡아당기며 떨어진다 과육 속 벌레의 길이 떨어진다 애초의 법칙이 떨어진다 가지째 붙들고 낙하하듯 떨어진다 수탉의 울음도 덩달아 떨어진다 마을의 정적을 꽉 쥐고 떨어진다 과수원 주인의 망연茫然이 떨어진다
앗, 사과들이 오후의 괘종시계 밖으로 떨어져 내린다
2024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작
도은(본명: 김은숙 시인)
2022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수필부문, 2024년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제6회 안정복문학상 대상 수상. 제9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금상 수상.
첫댓글 볏단을 가득 싣고 가는 소달구지에 아버지와 타고 가던 신작로의 그 길, 복사꽃이 휘날리는 언덕에 아버지와 있던 그 자리, 카실대는 복숭아를 따는 중에 천둥 벼락이 쳐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시던 아버지,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점점 사라지고 다정한 아버지가 다가섭니다. 울 엄마 생전에 말씀하셨던 " 남편한테는 맞아도 그이는 내 말을 들었고 자식은 내가 때려도 이길 수 없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지는 거라고 하는데 아버지, 엄마처럼 저도 아버지를 사랑하나 봅니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퍽퍽했는지 이해되고 안쓰럽고 잘 버터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그랴, 다 이해됩니다. 울 엄마, 아버지가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신춘의 열망이 <레몬이 익는 동안> 시에서 감지합니다. 신춘 당선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