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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넘치는 교회 김장하는 날
해마다 우리 교회 김장은 자랑할 만하다.
재료 준비부터 김치 담그는 일까지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여러 해 동안 해 온 성도들의 모습도 진심으로 보인다.
교회 뒷밭에 배추 400포기를 심었다.
목사님이 물도 주고 관리를 잘 하셔 예년보다 잘 된 것 같았다.
날마가 배추 자라는 것을 보는 우리 마음도 푸근했다.
우리집은 일주일 전에 김장을 했고 조금 남은 것을 교회에 드렸다.
준비한 무와 육수 낼 때 쓰라고 싹이 난 보라색 양파도 내어 놓았다.
다른 성도들도 배추와 대파와 양념감도 교회로 가져왔다.
배추 나르는 날은 남자들이 활기를 띠었다.
베드로회는 90이 넘은 장로님과 권사가하루도 빼지 않고 일하셨다.
손수레와 자동차로 몇 번을 실어날라 쌓아두었다.
배추 절구는 날은 나이 드신 여자 권사님들이 활기를 띠셨다.
배추를 반으로 잘라 내면 남자들이 나르고
물과 소금의 비율을 맞추는 것은 기술이 좋은 김장꾼들이 맡았다.
간간이 내오는 따뜻한 커피와 고구마와 찐빵들은
추위를 몰아내는 창과 칼과 같았다.
음식을 준비하는 팀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공급하였다.
저녁해가 지고 늦은 시각에 배추 씻는 일을 하였다.
그날따라 바람이 불고 제일 추운 날로 기록되었다.
자동차 만드는 공장처럼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소금물에서 건져내는 팀, 차례로 헹구어 내는 팀
헹군 것을 소쿠리에 담아 한쪽으로 나르고 쌓는 팀
허리 펼 사이도 없어 추위가 저 멀리 도망갈 정도였다.
베트남의 김** 집사는 키가 크고 손도 길고 일도 잘 한다.
저쪽에서 손을 내밀어 씻은 배추를 바구니에 정확하게 던져 넣었다.
작은 배추가 손에 잡히자
“아휴 무거워! 애기보다 더 무거워!!!!”
베트남 한국어로 하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마치고 집에 돌아가 한 숨 자고 나온다.
김치 담그는 날 아침은 모두가 나와서 준비 한다.
베드로 남자는 교회 주변을 청소를 말끔하게 하였다.
다듬어 놓은 양념거리를 큰 통에 붓고 섞음질을 한다.
목사님과 내가 혼합하는 기계로 골고루 비벼대면
붉고 향기나고 보기에 먹음직한 양념이 된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던 권사님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OK!
버무리는 일이 하이피크다.
네 줄로 서서 배추를 놓고 양념을 날라 비벼 넣고
김치통에 차례로 집어 넣고 포장을 하고 자동차에 싣는다.
두 시간에 걸친 난리를 치르고 나면 휴우하는 안도감이 돈다.
70여 통의 김치는 독거노인에게, 홀로 사는 이웃에게
멀리는 어려운 교회에게 사랑을 실어 배분이 된다.
바깥의 지저분한 청소를 마치고 식당 안을 제자리에 안정시키면
주방에서 나오는 식사가 정말 예술이다.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식사는 자랑거리다.
김이 나는 수육은 어느 식당도 흉내를 내지 못한다.
걷절이는 길게 빙빙 돌려서 밥숫갈에 올려 놓고
반쯤 하늘공간을 보며 입속으로 배부르다면서 들어간다.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걷절이 가져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김장 끝!!!!!!
돌아가면서 걷절이를 봉지봉지에 싸서 들고 나간다.
어떤 권사는 두 봉지를 가져가시지만 누구도 맘을 쓰지 않는다.
필요한 성도는 더 가져가도 된다.
감사가 넘치는 우리 교회의 김장날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만족하는 행사.
그런 행사가 우리 교회에 자랑거리가 되고 싶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사진을 찍어 12월 월삭에 드리는 글에 옮기고 싶었다.
리트비아 여행기
9일차 2023년 7월 28일 금요일 흐리고 비
리가-룬달레(리트비아)-슈레이-빌뉴스
리가 ISLAND 호텔의 아침 식사는 주로 과일과 채소 위주로 먹기로 하였다.
커피를 빼러 갔다가 어디를 눌러야 할지를 몰라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친절한 백인 여인이 나를 보고 웃음을 짓더니 누르는 단추를 알려준다.
타국인에 대한 배려가 친절함에 감사하다고 말해주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내려와 차에 올랐다.
여기서도 가이드가 바뀐다.
이름이 신현숙 가이드라고 소개하자 우리 차에는 현숙이라는 숙자가 들어간 이름이 우리 버스에 한 명 더하여 여덟명이 되어 현숙 자매들이 신이 난 듯 웃음을 터드린다.
가이드는 라트비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시작했다.
라트비아는 북유럽에 있는 공화국으로 공식 명칭은 라트비아 공화국이고, 북쪽은 에스토니아,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리투아니아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발트해와 리가 만에 닿아 있다.
수도는 리가다.
18세기부터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하였으나 1940년 8월 소련 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다.
라트비아인이 58%이며,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국민소득의 48.6%를 서비스업이, 23.9%를 제조업이, 22.8%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기원전 2000년 경부터 핀우그르계의 리브인들과 레트족이라고 불리는 발트인들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들이 리가만 연안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201년 이들에 의하여 리가 시가 건설되었다.
1558년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키자,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독일 기사단은 라트비아를 리투아니아의 보호령으로 양도하였고, 1561년 리투아니아의 보호를 받는 리보니아 공국과 쿠를란트 공국이 성립하였다.
그 후 1600년부터 1629년까지 이 지역을 둘러싸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였다.
스웨덴은 1621년 리가를 점령하였고, 1629년 리보니아 공국은 스웨덴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계속된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간 북방전쟁의 결과 리보니아 지역이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이어 쿠를란트 역시 1795년 폴란드 분할의 결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하자,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라트비아는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경제, 문화, 교육 전반에 있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1934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4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하였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나치 독일과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을 맺어 중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
이 의정서에서 라트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뒤, 소련은 1940년 발트 3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는 곧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소련의 승인을 얻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국제 사회는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불법으로 보고 비난하였다.
1941년 6월 하순에 나치 독일군은 소련군을 몰아내고 1944년까지 라트비아를 점령했다.
소련으로의 편입 과정에서 약 13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1953년까지 약 12만 명의 라트비아인들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약 75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보다 산업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하여,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총인구의 52% 선으로 감소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다.
1999년에는 제6대 대통령으로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가 선출되어 라트비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으며, 친미, 친서방 정책을 펴고 있다.
2012년 2월에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을 정해놓은 투표가 실시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지정하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다.
2012년 8월 28일에 라트비아의 국방장관이 소련군 기념비를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계 정치인들이 반발했다.
발트 해 동쪽에 있는 라트비아는 동유럽 평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국토가 매우 평탄한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저지대로, 비옥하며 숲이 우겨져 있다.
주위에는 다우가바 강, 리엘루페 강, 가우야 강이 있다.
기후는 습윤한 대륙성 기후이다.
그러나 발트해와 접하고 있어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띤다.
여름에는 따뜻하고 봄과 가을에는 아주 온화하지만 겨울은 북쪽에 있어 다소 춥다.
강수량은 8월에 가장 많다.
러시아 일대의 북쪽 기압골의 영향으로 겨울이 되면 칼바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치는 일도 많으나, 북위 60도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기온이 높은 편으로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다.
라트비아인구는 약 230만명이지만, 라트비아 국적자는 약 180만명, 외국 국적 보유자가 3〜4만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약 45〜50만명의 소련 시절부터 귀화하지 않고 영주해 온 이민은 무국적자로 취급되고 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국적이 어느 나라인지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시절의 라트비아에서 태어나서 한번도 외국으로 나간 적이 없는 경우에도, 귀화하지 않는 한 라트비아 국적자가 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의 국적보유조건이 충족되어 있는 것도 아닌 것 또는 생활의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게나 국민으로서의 취급을 받을 수가 없다.
무비자로 러시아 방문이 가능하다.
라트비아는 다민족, 다언어국가이지만 라트비아어가 라트비아의 국어, 공용어이다.
독립 직후부터 라트비아어의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라트비아어가 공용어이나, 리가 등 도시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등)가 많고 높은 러시아어 사용률에 의해서 러시아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수도인 리가에서도 러시아어 사용자가 시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그 때문에 러시아인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에서 가장 러시아인이 많기 때문에, 러시아어 인구도 많다.
특히 수도 리가에서는 인구의 41.7%(2008년)의 러시아인이며,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며, 라트비아인(42.3%)과 거의 같은 수가 되고 있다.
러시아어 이외의 외국어 습득률도 높다.
세대에 의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다르며, 중고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에 더해서 독일어가, 청소년층은 러시아어, 라트비아어와에 영어를 말할 수 있는 비율이 높지만, 청소년은 독일어를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젊은 세대나 지방에 사는 라트비아인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여전히 러시아어의 존재는 매우 크다.
영화관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자막이 병기되어 있으며, 라트비아에서 출판, 발행되는 신문이나 잡지에 있어서도 라트비아어판과 러시아어판이 존재하는 경우도 다수있다.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러시아어판쪽이 종류와 양 모두 풍부하다.
과거 라트비아인은 스웨덴과 독일 북부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련 통치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루터교 신앙은 크게 위축되었다.
루터교 신도가 가장 많으며, 소련 시절 러시아인의 이주가 많았으므로, 러시아 정교회 신도도 상당수 남아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남부지방에는 로마 가톨릭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정교회 교단으로 라트비아 정교회와 라트비아 자치 정교회가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동안 우리는 올드 시가지에 도착하여 투어를 시작한다.
먼저 우리는 검은머리 전당에 도착하였다.
리가는 서드비나 강의 양안에 자리잡고 있다.
1201년 독일인 출신 주교였던 알베르트 폰 북스퇴펜에 의해 건립되었고, 1282년에는 한자동맹에 가입했다.
리가는 한자 동맹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에 중부 및 동부 유럽과의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전형적인 한자동맹 도시였는데, 독립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며 발트해 연안의 뤼베크와 단치히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상업도시가 되었다.
도시의 중심지는 아르누보/유겐트슈틸 건축 양식과 19세기 목조 건축으로 유명하며, 다양한 건축물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완성하였다.
이외에도 세계 최경량 카메라인 미녹스 카멜가 최초로 개발 생산된 곳이며, 1985년 영화 `백야`의 주인공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 역시 리가이고, 러시아의 민요로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도 리가 태생의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가 작곡한 라트비아의 노래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리가 또한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마르틴 루터의 교리를 따라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하지만 1559년,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파견한 러시아군을 막아내지 못해 점령당했고, 많은 인구가 러시아군에게 학살당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새로운 국왕 스테판 바토리는 루스 차르국을 거세게 압박해 러시아군을 몰아냈고 1581년에 리가와 리보니아를 점령하였다.
1709년에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에 궤멸당했고, 표트르 대제는 이 여세를 몰아 1710년, 에스토니아의 레발, 카렐리아의 비보리, 리보니아의 리가에 공세를 퍼부었다.
리가는 9개월 동안 포위당한 끝에 러시아군에 함락되었고, 대북방전쟁을 종식시킨 뉘스타드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에 양도되었다.
인구도 증가하여 1857년에 6만여 명이던 인구는 몇 년 후 30만 명을 넘었다.
리가는 러시아 제국에서 다섯 번째(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키예프, 바르샤바 다음으로) 큰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였다.
1857년에 요새를 더 높이고, 도시 재건을 위한 새로운 계획이 1857년~1863년에 걸쳐 시행되었다.
개발된 신도시에 많은 공공건물, 극장, 학교, 대학, 중앙우체국, 철도역이 들어섰다.
중세의 옛 도시를 현대화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수많은 단지들을 온전하게 재건하고 도로를 확장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폭격으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성 페테르스 교회와 같은 매우 중요한 기념물과 중세의 가옥 몇 채가 복구되었다.
1917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독일 제국군이 진주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1918년에 그 수도가 되었다.
2차 대전으로 파괴되었긴 했지만 고건축물들 복원이 잘된 데다가 근처에 해수욕장도 있어서 소련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이름을 날렸고, 발트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첫 번 도착한 곳은 화려한 모습의 검은머리 전당이다.
검은 머리 길드가 사용했던 건물로 검은 머리 전당은 리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중세시대 무역 모임인 검은머리길드가 쓰던 건물로 여관이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검은머리 이름의 유래는 길드의 수호신이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리가의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다.
14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당시 리가에 있는 상인 길드인 검은머리가 건물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명칭이 된 검은머리 길드는 결혼하지 않은 상인과 선장 등을 회원으로 한 상업 길드였다.
1941~ 44년 독일이 점령하면서 시내의 옛 중심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검은머리전당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1999년 복구를 마쳤다.
발틱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돔 성당은 베드로 성당이다.
성 베드로는 리가의 수호신이란다.
첨탑은 닭이 서 있는데 첨탑에 십자가 대신 닭의 형상을 올려 놓는단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동물이어서 그런 의미로 닭의 모양의 상이 있다.
동그란 곳에는 타임머신이 들어있단다.
이 첨탑은 일곱 번이나 고쳐 지었다고 한다.
첨탐에 올라가면 리가 시내를 한 눈에 볼수 있다.
첨탑의 높이가 120미터인데 건축가가 다 지어놓고 유리잔을 맨 밑에 있는 돌바닥에 던져 넣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았는데 땅에 떨어진 유리잔은 짚더미에 떨어져 딱 두 조각이 났더란다.
그 뒤로 이 성당과 리가는 두 번의 격동기를 겪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위치해 있는 돔 성당은 1211년에 지어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성당의 규모가 발트 3국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높은 가치를 지닌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가 여러 번의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다양한 양식들이 섞이게 되었다.
내부 곳곳에는 리가의 역사를 나타낸 스테인글라스나 여러 그림과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특히 이 성당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으로도 유명하다.
성당 내부에는 7000여 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오르간이 있는데 그 연주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현재는 콘서트홀로도 사용되고 있어 다양한 연주가 열리고 있다.
국립 오페라 하우스 앞이 넓다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자유, 국가, 통합을 상징하는 세개의 별을 손에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
좌측으로는 화약탑이 있는데, 중세의 흔적이 묻어나는 붉은 벽돌탑인 리가의 '화약탑'은 15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로, 당시 화약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1621년 스페인이 침략했을 때 무참히 파괴됐지만 1650년에 다시 세워졌다.
1940년부터 '라트비아 전쟁박물관'의 일부로 활용되어 실제 사용됐던 대포알과 대포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화약탑 옆으로는 리가에서 가장 긴 건물인 스웨덴 병영이 위치해 있는데, 이 건물에는 다양한 카페와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세기별 건축양식을 비교할 수 있는 ''삼형제 건물“
3개의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는 리가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삼형제 건물인데, 라트비아 리가의 구시가 골목을 걷다 보면 대표 관광명소인 '삼형제 건물'을 만날 수 있다.
흰색, 노란색, 녹색의 세 건물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각각 15세기, 16세기, 18세기에 지어졌다.
15세기부터 18세기 기간동안 지어진 집 세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삼형제 건물. 리가의 상징과도 같으며 도시내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관저 및 역사박물관인 '리가 성'
리가성은 리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다.
그 역사는 1330 년에 시작되고, 그 후 몇 년 동안 성은 파괴되고 복원되고 여러 번 수정되었다.
그리고 1515 년에 그는 다시 요새화를 복구했다.
1710 년 이후 성은 방어 기능을 잃었고 1938 년부터 라트비아 대통령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성곽의 구조다.
본래 모양은 마당을 가진 닫히는 사각 블록이다.
각 구석에는 탑이있었단다.
그들은 더 많은 벽과 2 개의 타워를 완성하고 건축했다.
사각형의 대각선에는 두 개의 주요 탑이 있다.
성령의 탑, 관측에서 배가 지나가는 것으로부터 태어 났으며, 납 탑이 가장 강력하고,어떤 곳의 벽 두께는 3m에 이른다.
성벽의 벽감에는 신성한 성모 마리아와 플레 텐 버그의 구호 이미지가 있다.
거룩한 성모 마리아의이 이미지는 그 당시 리가에 있었던 모든 것 중 가장 표현적인 조각 작업이었단다.
화약탑
라트비아 전쟁 박물관은 화약을 저장하기 시작한 17세기에 여러 번 재건되어 현재의 이름을 얻은 화약탑에 있다.
타워에는 11개의 대포가 있었고 "폭탄 포수"가 설치 되어있다.
후에 타워에는 감옥과 고문실이 있었고 무기는 1883년까지 보관되었다.
타워에 전쟁 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때 나중에 박물관 건물로 개편되어 박람회 기능이 추가 되었다.
원형 타워의 높이는 25.6미터, 지름은 14.3미터, 벽 두께는 3미터에 이르며 탑의 벽에는 제2차 북방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포탄이 보인다.
박물관의 주요 목표는 대중에게 라트비아의 군사 및 정치 역사를 공개하는 것이다,
박물관의 주요 컬렉션에는 25,400개 이상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으며 컬렉션과 연대순으로 주제별 전시회로 체계화되어 있으며 다양한 문서, 장식, 무기, 사진, 제복 및 기타 항목이 있다.
박물관에서는 군인과 전쟁 기술에서는 라트비아 역사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볼 수 있다.
라트비아와 라트비아 병사들. 17-18세기 전시에서는 발트해에 접한 국가들이 발트해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던 시기에 대해 알려준다.
라트비아 건국과 1918-1920년의 해방 투쟁 전시관에서는 국가의 형성, 라트비아 임시 정부의 다양한 부대 구성, 볼셰비키, 독일군 및 버몬트인들에 대한 투쟁에 대해 알려준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라트비아 국가 방어"는 라트비아 해방 투쟁이 끝난 후-소련 러시아와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형성된 라트비아 국가 안보 시스템에 대해 알려준다.
2차 세계 대전의 라트비아"는 점령 체제와 군대에 징집된 라트비아 인구의 운명에 대해 알려준다.
소련 점령기의 라트비아. 3차 부흥 1945-1991"전시관은 점령 시기와 독립 회복의 길을 알려준다.
마지막 현재와 미래의 군대의 기술에 대해서 볼 수 있다
화약탑을 지나면 작은 문으로 들어간다.
문 중간에 몸집이 큰 여인이 손에 꾸꿀레 라는 악기를 들고 곡을 연주한다.
들어보니 내가 들어본 적이 있는 우리나라 백만송이 노래가 아닌가?
한참 선율을 감상하려니 백만송이 노래와 감정이 떠오른다.
여러 명이 동전을 던져주고 환호한다.
더 들어가니 성벽에 두 남자가 우리나라 애국가를 호른과 튜바를 들고 연주하는데 어떻게 악보를 구해서 연습을 했는지 우리나라 애국가와 똑 같았다.
사진도 찍고 돈도 넣어준다.
야고보 성당 안을 들여다 본다.
여기는 입장료도 없고 성화를 전시중이라 조용히 돌아보고 나온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이 1시간 반을 달려 룬달레로 이동한다.
룬달레 궁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18세기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 '룬달레 궁'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지은 라트비아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입니다.
라트비아의 베르사유’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라트비아 귀족들의 생활을 보여준다.
'황금의 방', 무도회장인 '흰 방' 등 138개이 있으며 벽장식이 매우 화려하단다.
138개의 방 중 이십 여개의 방을 둘러봤다.
당시의 귀족의 생활상을 느껴보기로 했다.
뒤의 정원은 별도 입장료가 있는 것 갔다.
아쉽지만 창문으로 정원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다
'룬달레 궁'은 18세기 라트비아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라트비아의 베르사유’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라트비아 귀족들의 생활을 보여준다.
공작이 실세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비어있었으나 1760년대에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다시 돌아와 실내장식을 마무리했다.
2차대전 때는 군인들이 사용하였고 학교로도 사용하였다. 지금도 농구 골대를 박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수발로프 가문이 궁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가지고 피신하였었는데 지금은 복원된 물품으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 궁에 들어갈 때는 백팩은 매고 갈 수 없고 셀카봉을 사용할 수 없으며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2유로를 내고 사진 촬영권을 받아야 한단다.
궁으로 향하는 길은 다듬어진 나무 울타리가 길을 안내한다.
우선 붉은 건물이 양쪽에 있는 사이를 지난다.
무엇인가 물으니 마구간이라고 한다.
마구간 사이로 저 앞에 노란색을 띠는 건물이 보인다.
마구간과 궁 사이의 별 꾸밈이 없는 마당을 지나면 양 건물 사이에 대문이 있는데 대문의 난간 위에는 바렌 공작의 상징인 왕관을 쓴 사자가 앉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건물로 둘러싸인 네모난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돌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궁은 큰 창문이 두 층으로 있고 아래에 작은 창문이 있고 지붕의 가운데 부분에는 정면의 건물에는 작은 창문이 있는 곳이 있고, 양쪽으로는 반원형의 구조물이 있는 형태였다.
마당에서 계단이 있어 아래의 큰 창문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13시에 궁에 들어와 입구에서 검표를 한다.
그리고 입구 한쪽에서 사진촬영권을 구입하여 손등에 붙였다.
사람에게 붙이면 그 사람이 찍을 수 있고, 사진기에 붙이면 그 사진기로 촬영할 수 있다.
138개의 방중 우측으로 들어가니 그림 3점이 걸려있고 도자기 모양의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가 도자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대기실이라고 한다.
다음 구경한 곳은 황금의 방이다.
대관식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하는 화려한 방이다.
전체에 금칠을 한 것은 아니고 조각된 문양을 금칠을 하였다.
천정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중앙에 샹들리에가 있다.
더그랜드 홀은 식사 공간인데 직사각형의 방이다.
긴 식탁이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창문이 있고 왼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얀 방에는 전체적으로 흰색으로 되어 있고 회반죽으로 만든 조각들이 벽면에 붙어 있다.
그것만을 감상하더라도 한 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나 우리는 대충 보고는 지나간다.
하얀 방의 천정에 황새 둥지가 있는데 이것은 복원할 때 만든 것이라 한다.
하얀 방의 안쪽 벽면에 붙여 나무모양의 전시대를 만들고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그 도자기는 중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 한다.
한 작은방을 보여주는데 무엇을 하던 곳인가 물으니 드레스룸이란다.
그리고 예배 대기실이랑 몇 개의 방을 거쳐 다시 황금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다음 녹색 바탕에 붉은색이나 흰색 등의 무늬가 수놓아진 바닥이 있는 주보프의 방이란 곳을 보고 서재로 가니 벽난로에 에어컨이 설치된 것이 특징이었다.
가운데 책이 있고 벽면으로 책장이 있었다.
장미방은 붉은색대리석에 장미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지게 조각되어 있는 로코코 양식의 방이다.
봄의 여신에게 바쳐진 방이라 하는데 사용은 남자가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벽난로는 복원된 것이 아니고 진품이라 한다.
통치자의 방도 구경하고 침실을 본다.
에른스트 요한 본 비론 공작의 침실이었다고 한다.
좌우에 벽난로가 각각 있고 벽난로 옆에 거울이 있고 그리고 그 안쪽으로 침대가 있는데 폭이 좁아 보였다.
이곳에서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서면 정원이 보인다.
정원은 베르사유 궁의 정원을 본떠 만든 것인지 분위기가 비슷하다.
서재에는 방에 붙여서 화장실과 서고가 배치된 것이 특색이라고 한다.
통치자의 방 곁에 응접실이 있는데 귀빈을 만나는 장소였다고 한다.
다음에 간 곳이 대리석의 방으로 왕 가족의 식사 장소였는데 당시 사용한 식기는 독일에서 온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방은 전쟁 당시에 초등학교 체육관으로 사용되어서 지금도 농구 골대를 박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농구 골대가 있던 곳에는 조각상이 있었다.
다음은 당구방으로 간다.
당구대가 남았는데 식후에 여가 활동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 궁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슈발로프방인데 이곳에는 그림이 많고 따뜻하였다.
이 방을 나와서 1층으로 내려와 1층 회랑 사이에 있는 계단을 내려와 지하층으로 갔다.
지하층의 복도를 지나며 전시된 유물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이 궁은 전쟁을 치르고 비어있는 기간이 길어서 많이 황폐화되었는데 국민들의 성금으로 복원 사업을 마쳤다고 한다.
궁에서 나와 걸어서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간다.
슈레이로 이동(약 1시간 소요)
수만 개의 십자가들이 박혀진 '십자가의 언덕’
리투아니아 북부에 위치한 슈레이에서 12km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는 십자가의 언덕은 작은 야산 하나에 십자가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곳이다.
1993년 로마 교황의 방문으로 유명해진 이 곳에는 약 10만개 이상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현재도 계속 늘어나며 언덕은 점점 커져간다고 한다.
바오로 2세가 방문한 뒤에 성당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뒤에 붉은 색을 천주교를 지었다고 한다.
작은 언덕에 십 만개가 넘는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꽂혀 있다.
인위적으로 형성한 곳이 아니라 신도들이 러시아의 통치에 반항하여 자발적으로 언덕에 십자가를 꽂았다고 한다.
카톨릭의 성지는 아니지만 신도들은 성지로 간주하며 발틱 3국을 여행하면서 이곳을 들린다고 한다.
주차장 입구에는 십자가를 파는 가게도 있다.
우리 일행 중 몇 분은 십자가를 사서 정성들여 언덕 입구에 꽂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교황도 이곳을 방문하여 표지석과 함께 예수님의 형상을 모시기도 했단다
십자가 언덕 주변에 유채꽃과 민들레꽃이 만발하여 사진 찍기 명소로도 유명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들판으로 나온다.
멀리서 유채를 수확하는 장면이 보인다.
트랙ㅌ와 콤바인 등 기계 3대가 동원되어 베고 벤 것을 알곡으로 만들어 트럭에 싣는 전원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른 들판은 보기에도 부유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좁은 땅에 비교하면 맘으로 부자가 된 것 같다.
빌뉴스로 약 2시간 30분을 걸려 이동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밀밭이 네 시간을 지나가도 누런 평야지대는 계속된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고속도로 포장공사로 차가 대기를 하는 사이에 자세히 보니 누른 것은 보리가 아닌 유채 열매였다.
보리 수확과 유채 수확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
미국의 중앙 대평원같은 느낌을 받는다.
빌뉴스에 오면서 빗바울이 굵어진다.
여기서는 비가 올 때 우산을 쓰면 그 사람을 빗대어 “너 설탕이냐?”
라고 비웃는단다,
설탕은 비에 녹으니 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비를 그냥 맞는 것을 즐긴다는 말도된다
숲속마을로 들어간다.
저녁 식사를 위한 길인데 고풍스런 건물이 식당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려 있다.
그런데 썩어서 떨어진 사과들이 굴러다닌다.
약을 치기 않아서인지 나무에 매달린 사과도 한쪽이 뭉게지거나 상한 것들이 많이 잇
들어가 식탁에 앉으니 스푸를 자기들이 퍼 와야 한다.
아내가 두 번이나 날라서 구청장 팀과 나누었다.
돼기고기 구운 것과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 구운 것, 당근 가늘게 깐 것과 양배추 썬 것이 식사의 전부였지만 우리는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
디저트로는 사과와 가늘게 썬 오렌지인데 그것도 양이 부족하니 사과 사분의 일과 가는 오렌지 한 조각이다.
약간 소홀한 기분이 들었다.
가이드는 숙소에 도착하면서 커피와 맥주를 사서 마시라고 한다.
어림 없는 소리를.....
그리고 30분을 더 이동하여 오늘의 숙소에 도착한다,
안 온다던 비가 밤새 내린다.
우기인 듯한 기분이 든다.
방에 들어와 오늘 하루 있던 일을 기억하며 대강을 기록하고 잠을 청한다.
아,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세로운 것을 보고 우리도 그런 환경속에 살 수 없을지라도 마음만은 그런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도 감사하다.
첫댓글 역시 올해도 김장담그셔서 이웃을 훈훈하게 하셨군요.
모두가 연합하여 선을 이룬 활동에 하나님께서 흐뭇해 하시겠어요.
전교인이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교회 이야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해마다 김장을 통하여 또 언젠가 읽었던 전교인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 예를 들면 목사님은 이웃을 위해 무딘 칼을 갈아주는 역할을 하신다던가 등 정말로 오늘 날의 교회가 닮아가야할 아름다운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어떤 종교를 선호하느냐는 설문조사 결과 카톨릭과 불교는 거의 비슷하게 나온 반면 개신교는 두 종교의 반정도로 선호도가 낮게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매 달 주옥같은 글 올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