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 교훈의 직설법과 명령법에 대해 시대별로 구분하여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바울의 직설법과 명령법을 지나치게 분리시키거나 혹은 그 반대로 지나치게 양자를 일치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장에서 먼저 직설법과 명령법의 기본적인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고, 두 번째로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 속에서의 연결고리로서의 믿음과 성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직설법과 명령법 관계 속에서의 종말론적 전망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1. 직설법과 명령법의 기본적인 성격과 내용
우리가 서론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은 일차적으로 신자의 신분에 관련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명령법은 신자의 삶에 관련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이 나오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일반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 2)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새 생활과 관련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결론적으로 3) 직설법과 명령법의 기본적인 성격과 내용을 요약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겠다.
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성에 관해서 볼 때 직설법은 명령법의 근본이 된다. 바을은 로마서 6장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관련된 구속적 직설법은 인간의 책임을 자극하고 행동을 고무하며, 동시에 죄에 대해 투쟁을 요구하는 명령법의 방향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구속적 직설법은 죄에 대한 투쟁의 명령법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6장 12, 13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 13)
이러한 점에 있어서 골로새서 3장 3절 이하의 말씀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즉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에 대응해서, 단번에 명령이 울려나온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그리스도와 함께 단번에 죽었다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 죽이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에 대한 크고 화급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 동일한 것이 성령 안에 있는 그리고 성령에 의한 생활에 대한 직설법적인 선언들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갈라디아서 4장과 5장에 있는 선언들은 직설법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4:6ff)과 성령을 따라 난 것(4:28ff), 성령에 의해 산 것(5:25)을 입증하고 나서 바로 뒤따라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호소하며(5:16, 25)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이나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기 때문에 길을 잃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속에서 명령법은 직설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새 생활과 관련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성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새 생활에 대해 언급되는 구절들이 나오는 곳에서도 역시 동일한 직설법과 명령법의 이중성이 발견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선물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곧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지 못하던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새 생활의 실제적 성취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윤리 구조 사이의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사도 바울은 직설법을 사용하여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어지고(엡 2:15; 4:24),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새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명령법을 사용하여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1ff, 골 3;9ff)고 신자들에게 요구한다.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구원의 새 창조 가운데 참여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갈 2:20),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롬 6:6) 육적 몸을 벗었다(직설법). 하지만 이것은 새 생활 가운데 계속되어야 한다(명령법). 신자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렸지만(직설법) 실제적으로 새 생활 가운데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명령법). 즉 신자는 성령을 좇아 행하여(롬 8:4)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 특별히 성령 안에서의 새 생활은 성령과 육체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육체가 원리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지만(직설법), 아직도 신자들의 삶 가운데 역사 하기 때문에(갈 5:17), 신자들은 성령의 인도 가운데 계속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한다(갈 5:18, 25). 이와같이 새 생활은 성령의 창조적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새 생활은 중생을 기초로 해서 계속 이루어가야 한다. 즉 신자들의 새 생활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하면서,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세례를 통하여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깃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마서 13장 14절에서는 그 사실에 있어서 교회의 날마다의 책임인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는 명령이 뒤따른다.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언급 방식 상호 간의 관계성을 살펴볼 때, 명령법은 직설법 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분명한 것은 명령법이 이미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들에게, 즉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 자들에게 요구된 것이지 아직도 복음을 듣지 않은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려고 시도하는 자들에게 그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의 윤리적 행위는 신자됨의 귀결이지 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3)직설법과 명령법의 기본적인 성격과 내용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로서의 새 생활과 관련된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성을 살펴볼 때, 바울에게 있어서 직설법은 일차적으로 신자의 신분에 관련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에, 명령법은 신자의 삶에 관련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직설법은 ‘신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시고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속하시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명령법은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창조로서, 성령의 전으로서,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직설법은 신자의 ‘구원’에 대해서, 명령법은 구원받은 이후에 신자가 가져야 할 ‘윤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명령법은 구원론적 직설법에 그 근본적인 근거와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직설법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인 것이다. 직설법은 바울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로 성취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만 받아들이는 순전한 선물이다. 이러한 직설법의 은혜적 성격은 그것에 기초한 윤리적 명령법들이 마지막 구원을 획득하게 하는 행위로 이해되는 것을 방지시켜 준다.
이것은 왜 윤리적 명령법들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가 은총의 직설법을 희생시키고 결과적으로 신자를 도덕주의자 또는 새로운 율법주의자로 만들며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을 무터뜨리게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명령법과 그에 대한 순종이 모두 은총의 사역을 떠나 독립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역으로 명령법을 희생하고 직설법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일은 윤리적인 권면과 순종의 필요성을 무너뜨리는 극단적 신비주의를 끌어들이게 된다. 선은 새 사람에게서 필연적으로 자라 나온다. 이 입장은 사실상 인간의 의무의 바로 그 기초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바울의 다양한 권면들의 실재를 왜곡시키고 큰 손상을 입힌다. 결과적으로, 직설법과 명령법은 불가분적이며, 그 순서가 뒤바뀔 수 없으며 그 관계에 있어서 독특한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