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1951년 4월 성금요일인데 날자를 모르겠습니다.
천주교회에서 큰 축일로 지내는 부활절인데 주일 앞의 금요일이고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그날 나는 청주시 교동국민학교 제19회 졸업생이 됩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 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이 졸업식 노래를 후배 학생들이 부르면 학부형과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다 울음바다가 됩니다.
가사가 유치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직 깨어나지 않을 때라서 그냥 순수하기만 합니다.
나는 혼자 졸업장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들어가니 큰형이 운명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형의 눈빛이 전에 돌아가시던 어머니의 눈빛과 똑같습니다.
"형 형 엉엉 헝 죽지마 엉엉"
내가 마구 울자 옆집 아저씨가 와서 형의 이불을 들쳐보며
"새옷을 갈아입혀라"
고 하시며 형의 부릅뜬 눈을 감겨 주시고 나가십니다.
형의 숨소리가 불규칙 스럽게 들립니다.나는 형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대부분 죽는 사람들이 똥을 싼다고 하지만 형은 음식을 먹지 않아서 벗은 몸이 깨끗합니다. 나는 새옷은 아니지만 빨아놓은 옷으로 갈아 입혔습니다.
나는 청주 도립병원에서 일 하는 작은 형에게 달려 갑니다.
"큰형이 죽어가"
라고 하자 작은 형이 놀래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미친듯이 달립니다.
우리가 거의 집 가까이 왔을 때 형의 자전거를 골목길에서 쑤셔박습니다.
우리는 아픈줄도 모르고 다시 달려 집에 이르렀습니다.
큰 형의 숨이아직 매우 미약하게 들려옵니다.
"형형.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엉엉"
작은 형이 오열을 합니다.전에 형과 싸우고 집을 나간것을 후회하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세근아, 나 이모님네 집에 갔다올께"
청주에 사는 나의 단 하나이 친척입니다.
집은 우리집에서 꽤 먼 운천동입니다.
이모부는 시청에 다니고 있습니다.
큰 형은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조용히 마지막 숨을 쉬었습니다.
겨울 피난때 나를 업고 영동군 용산리까지 갔다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맙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는데 이제 볼 수가 없다니 !
날이 저무는데 형이 오지 않습니다.
밤이 되자 나는 죽은 형이 무서워 몸이 마구 떨립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아궁이에 불을 땝니다,
이모부와 작은 형이 와서 죽은 형을 염을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트럭에 실려 성당으로 가서 장레미사를 지내는데
미사가 끝나자 우리는 죽은 형을 태우고 공동묘지로 가서 묻었습니다.
"세근아 , 네 형은 성금요일에 죽었으니 천국에 갔을 것이다"
라고 이모부가 말씀 하십니다.
"너는 이제 우리집에 와 있거라"
고 이모부가 말 하십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부터 운천동의 이모님네 집에서 살게 되는데
이모님네는 할머니, 이모님 부부, 그리고 8명의 형제들이 있는 대식구인데
이모부 혼자 버는 돈으로 살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형제들 중의 4번째 딸이 나를 무척 싫어 합니다.
국민학교 5학년인데 오빠인 나에게
"오빠 가 가"
라고 합니다.
(계속)
첫댓글 어려서 부터 부모님 안계신 설음 을 겪으시면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습니까.
50세가 넘도록 외톨이로 험한 세상을 살으셨으니 오죽이나 고생을 하셨겠습니까.
가슴이 저려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스잔님 늘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제가 좀 더 똑독했다면, 그리고 어느 누가 조언을 하거나 가르쳐 주었다면 이렇게 혼자 망나니 처럼 자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쥔장님께서 큰 글씨로 제목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줄을 몰라요 하하하 색깔을 널줄도 몰라요
그시절은 누구나 고생이 많아 살길이
어려웠습니다.그러나 형광등등님은 부모님 일고 형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의지할곳이
없으니 막막한 일입니다.참 고생도 많이 하시고
앞으로는 좋은일만 있을것 같습니다.수고 하셨습니다.~
어서오세요 푸른잔디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