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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들이 드린 헌물과 분배
민 7:1-11
1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2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5 그것을 그들에게서 받아 레위인에게 주어 각기 직임대로 회막 봉사에 쓰게 할지니라
6 모세가 수레와 소를 받아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7 곧 게르손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8 므라리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직임대로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고 제사장 아론의 아들 이다말에게 감독하게 하였으나
9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10 제단에 기름을 바르던 날에 지휘관들이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헌물을 가져다가 그 헌물을 제단 앞에 드리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민 7:1-11 / [지파 우두머리들이 바친 예물] 모세는 성막 짓는 일을 다 마쳤다. 그 날 모세는 성막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곳을 거룩하게 하였다. 성막뿐만 아니라 성막에 딸려 있는 여러 기구들, 제단과 제단에 딸려 있는 여러 기구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2) 그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곧 각 집안의 어른들이며 또한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예물을 바쳤다. 이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수를 조사하여 등록시킬 때 일을 거들던 사람들이다. 3) 이들이 여호와께 드린 예물은 포장을 친 짐수레 6대와 소 12마리였다. 곧 각 지파 우두머리 두 사람당 수레 하나씩, 각 사람당 소 한 마리씩을 성막 앞에 갖다 바쳤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5) `각 지파 우두머리들이 가져온 예물을 레위인들에게 주어라. 그래서 각각 맡은 임무에 따라 성막을 옮길 때 그 예물로 일을 보게 하여라.' 6)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이 가져온 수레와 소를 레위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7) 게르손의 후손에게는 맡은 임무에 따라 수레 2대와 소 4마리를 주었고 8) 므라리의 후손들에게는 맡은 임무에 따라 수레 4대와 소 8마리를 주었다. 아론 제사장의 아들 이다말을 시켜서 이렇게 나누어 주었다. 9) 고핫의 후손들에게는 수레와 소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들이 성막을 옮길 때 하는 일이 짐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0)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이렇게 예물을 가져온 것 외에도 제단이 봉헌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또 예물을 가져왔다. 그들이 예물을 가져와 제단 앞에 바치자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에게 12일 동안 매일 한 사람씩 제단 앞에 봉헌예물을 바치라고 일러라.'
본문은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마치고 모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구별한 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을 모세가 레위인들에게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1)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대로 성막을 완공하고 기름을 발라 구별했습니다. 기름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방패나 집 또는 몸에 바릅니다(사 21:5; 렘 22:14; 암 6:6). 그러나 종교의식과 관련되어서는 성소의 기물(출 40:9-11)이나 제사장, 선지자, 왕의 직분을 인준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릅니다(민 35:25; 출 29:7). 7장의 모든 일은 장막을 세우고, 장막의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바르고 거룩하게 구별한 날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휘관들이 드린 헌물(2-3) 장막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신 성막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이 거하실 장막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구별하게 했습니다(출 40:9-10).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은 기름을 발라 구별하게 했던 반면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장막은 기름을 바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에 기름을 바르는 일이 끝났을 때, 이스라엘 지파의 지휘관들이 성막 운반에 필요한 기구를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예물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과 모세의 분배(4-9)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성막 운반에 사용할 수 있도록 드린 수레를 드렸으며, 모세는 그것을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분배했습니다. 모세는 성막의 외형을 이루는 부분을 운반하는 게르손 자손에게 수레 둘과 소 네 마리를 주었고, 이보다 더 무거운 성막의 골격 부분을 운반해야 하는 므라리 자손에게는 그 두 배인 수레 넷과 소 여덟 마리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핫 자손은 언약궤를 그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하므로 수레나 소가 필요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주지 않았습니다.
지휘관들의 봉헌물(10-11) 성막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마친 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루 한 사람씩 봉헌물을 12일 동안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물 헌상의 규준으로 질서와 조화와 거룩성 유지를 염두에 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함께 모여 자기를 경배하는 것 하나하나를 감찰하시고 열납하십니다(말 2:13).
적용: 하나님은 자기 뜻을 따라 필요한 대로 직분과 은사를 주십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심리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여서 웃는 것이 아니고,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웃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만 고통 속에서 웃음을 지켜낸다는 것, 슬픔 속에서 웃음을 되찾는다는 것, 힘든 삶에서 웃음을 피워내는 것,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웃음을 먼저 찾기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힘든 시기라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우리는 아무 일 없던 평범한 오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설 교 >
하루에 한 사람씩 드릴지니라
민수기 7:1-89 / 최도영 목사(경희문교회)
요절 / 민수기 7: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For the LORD had said to Moses, "Each day one leader is to bring his offering for the dedication of the altar." NIV)
오늘 함께 살펴볼 7장은 89절까지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가장 절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읽는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럼에도 이런 긴 본문을 다 읽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셔서 긴 본문을 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시간상 제 메시지를 그만큼 짧게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민수기 공부에서도 길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어디 쯤 가고 있을까를 알아야 합니다. 한 장 한 장의 말씀은 앞 뒤 이야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행군 준비의 과정에 속해 있습니다. 본문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성막을 옮기는 데 수레가 필요함을 알고 수레를 헌물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 후에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하루에 한 사람씩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역시 당연히 행군 준비의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이는 길게 기록된 제사 이야기의 끝에 짧게 나오지만 없으면 안 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그 의미를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이 말하는 것을 놓쳐버리는 것은 마치 열 두 지파가 12일 동안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나서 ‘어, 우리가 왜 제사를 드렸지?’ 하고 제사 드린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절에서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냈다는 것은 출애굽기 40장에 나오는 성막 완공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1절은 성막의 완공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는 성막 완공을 요약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의 시점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출애굽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이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또 성막 안의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도 기름을 발랐습니다. 이렇게 기름을 바른 것은 거룩히 구별하는 의미였습니다. 즉, 이후로 성막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것이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레위기 말씀은 그 날 이후 대략 한 달간 있었던 일들과 주어진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어떤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어떻게 세워졌는지, 제사장이 지켜야 할 율법은 무엇인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성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율법이 무엇인지 등입니다.
민수기 말씀은 그 한 달 후인 출애굽 제 2년 2월 1일 이후에 있었던 일들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진영 곧 군대 체제로 조직을 정비하셨습니다. 회막을 중심으로 몇 지파씩 연합해서 진을 치게 하셨고(1-2장), 레위 지파는 회막의 일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시종하며, 회막의 이동 시에 짐을 옮기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3-4장). 진영 안의 합심동역을 해치는 문제들을 처리할 방향을 주셨습니다(5장).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는 나실인을 순수성의 핵이요 축복의 통로로 이스라엘 진영 안에 두셨습니다(6장). 이렇게 하심으로 그 조직이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견고한 그릇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진영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이를 통해 오늘 날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어떻게 준비되는 것을 기뻐하시는지 배우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지도자들이 솔선하는 헌신을 기뻐하십니다.(1-9)
2-3절이 현재의 이스라엘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이 여호와께 헌물을 드렸습니다. 그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였습니다. 그 헌물은 하나님이 먼저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 자손들 중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성막을 옮길 때 굉장히 무거운 것을 옮기는 책임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들의 짐을 나눠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논을 한 후 덮개 있는 수레를 헌물 하였습니다. 아마도 모든 지휘관들이 ‘맞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 하고 합심을 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 한 대, 지휘관 한 사람에 소 한 마리씩 장막 앞에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힘 좋은 쌍발 엔진을 장착한 탑차 6대를 헌물한 셈입니다.
4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의 헌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헌물을 모세를 통해 레위인에게 주되 각기 맡은 일에 맞게 회막 봉사에 쓰게 하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좋게 된 것은 아마도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막의 이동 명령이 내려지면 무거운 휘장과 널판들을 손수 짊어지고 옮길 생각에 부담이 많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뜻 밖에도 꼭 필요했던 수레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아마 수레를 받을 때 ‘야호 살았다!’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열 두 지파와 지휘관들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진영의 전체 분위기도 더욱 좋아졌을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그 중심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변화가 있게 됩니다. 나실인처럼 스스로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에 더하여, 본문의 지휘관들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을 드리는 헌신도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그런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신 역사이기도 하였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되도록 인도해 오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공동체가 살아있는 공동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공동체로 점차 준비되게 해 주셨습니다. 금년에는 더욱 우리의 사명인 캠퍼스 목양에 힘쓰도록 하시고, 자원하여 헌신하는 사람들로 이 일을 감당하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통해서 경희대와 외대 학생들 가운데서도 영적 각성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구별해서 드리는 주의 청년들이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위에 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10-88)
10절에 보면, 지휘관들은 수레와 소를 헌물했을 뿐만 아니라, 제단의 봉헌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헌물도 준비해 제단 앞에 가져왔습니다. 이는 제단이 봉헌됨으로 드디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을 맺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휘관들은 크게 세 가지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가 그것입니다. 각각의 제사에는 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번제는 헌신 결단을 드리는 제사이고 속죄제는 죄사함을 받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감사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제사는 모두 짐승의 생명이 희생되어 제물로 드려집니다. 이런 짐승의 희생은 장차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런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된 백성이요, 용서 받은 백성이요, 모든 것을 감사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려고 하실 때부터 원하셨던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랬는데 마침내 성막이 완공되고 제단이 봉헌 되었습니다. 그 제단에서 이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은 자기 지파의 각 사람들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고자 제물을 준비해 제단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셨습니다.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그래서 첫째 날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헌물로 은반(쟁반) 하나, 은바리(대야) 하나를 드렸고,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습니다. 또 금 그릇 하나에는 향을 채워 드렸습니다. 그 외 제물은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를 드렸습니다. 이후 둘째 날에서부터 열두째 날까지 제사를 드린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잇사갈 지파의 느다넬, 스불론 지파의 엘리압, 르우벤 지파의 엘리술, 시므온 지파의 슬루미엘, 갓 지파의 엘리아삽, 에브라임 지파의 엘리사마, 므낫세 지파의 아비단, 단 지파의 아히에셀, 아셀 지파의 바기엘, 납달히 지파의 아히라였습니다. 이들 각 지파 지휘관들은 똑 같은 헌물과 제물로 12일 동안 차례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제사를 드린 것은 무슨 뜻이 담겨 있었을까요? 그들이 제사를 드린 순서는 2장에서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진을 치게 하신 순서와 똑 같았습니다. 이는 일단 그들이 행군 출발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쟁의 출발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번제와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결단했습니다.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이제 곧 행군이 시작되면 전과는 달리 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하며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제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루에 한 사람씩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드린 제사에 대해 12-83절에 똑 같은 비중으로 일일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84-88절에서는 열 두 지파 지휘관들이 드린 헌물과 제물의 총계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후대에 그들의 제사에 대한 부분을 읽는 우리에게는 이런 방식이 사실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루에 한 사람씩 제사를 드리게 하시고, 그것을 일일이 기록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데는 어떤 뜻이 있으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과 같은 졸업 시즌에 졸업식에서 보게 되는 광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에게 같은 상을 줄 때 일일이 상을 주는 경우를 보기 힘듭니다. 누구 외 몇 명 무슨 상을 준다고 하고, 한 사람의 상장만 내용을 다 읽고 나머지는 ‘이하동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이 제사를 드리러 나왔을 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몇 절로 간략히 요약하게 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다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 분량이 제일 긴 장을 우리가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도 민수기 23:19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고, 인생이 아니시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다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왜 입니까? 이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12일 동안 반복 또 반복하게 하시면서, 무언 중에 재차 재차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한 사람인가를 중요시 하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헌신과 속죄와 감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지휘관들로 하루에 한 사람씩 제사를 드리게 하시고, 그 제사를 일일이 받으셨습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에 대해 가장 충분하고도 가장 자세한 설명을 다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 각자의 헌신이 남들과 설령 똑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각각 다 정당하게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처럼 반복되는 일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분이시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길게 기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혹시 모세가 그렇게 똑 같이 길게 기록했더라도 “어이, 모세 이 부분은 좀 간략하게 기록할 수도 있쟎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각자 각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고, 각자 각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드리는 헌신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속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 나의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드리는 모든 감사를 다 알아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떤 분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군중 속의 익명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 사람을 다 알아 주십니다. “네가 내 앞에 나왔구나. 내가 너를 다 안다. 너의 결단, 너의 헌신, 너의 믿음, 너의 감사, 너의 아픔, 너의 눈물, 너의 간구를 내가 다 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 때 우리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분위기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그런 헌신의 분위기가 있을 때 뿐 아니라, 분위기가 침체되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도 나의 하나님을 변함없이 섬기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소통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89)
열 두 지파 지휘관들이 12일 동안의 제사를 마친 후였습니다. 89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였습니다.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열 두 지파 지휘관의 제사에 대한 긴 기록 다음에 나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긴 이야기 끝에 나오는 짧은 말씀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이 짧은 한 절의 말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긴 이야기의 ‘종결자’와 같습니다.
이는 제사가 제사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소통, 즉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소통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제사 그 자체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는 끝이 아닙니다. 그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소통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합니다. 주일을 지킴으로 우리의 삶에는 중심이 생깁니다. 어떤 중심이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으며 나는 그 은혜로 산다는 영적인 중심이 생깁니다. 이런 중심이 생길 때, 우리의 일주일의 삶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힘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 되고, 내게 주어진 일들은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그것이 직장 일이든 가정 일이든 하나님이 맡겨주신 거룩한 일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게 감당하는 일들이 됩니다. 이런 나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일을 지킴으로 이런 삶과 신앙의 일치로 나아가는데 비해 어떤 사람은 예배는 예배로 끝나고 삶은 다시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 차이를 낳게 됩니까? 그 차이를 낳는 것이 바로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지휘관들의 제사 후에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사 후 또는 예배 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구원을 주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 한 후에, 로마서 12:1-2절에서 산 제사로의 영적 예배를 드릴 것과 그 예배를 통해 나아가야 할 자리에 대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헌신을 결단하며, 주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덧입으며, 모든 감사를 드려야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예배의 최종 골인지점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데에 이르러야 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 예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감을 감당하고 나누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고 성경의 든든한 지지 위에 선 일입니다. 이를 감당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이 있는 삶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우리 각자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빚어져 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대로
민수기 7:1-11 / 설성환 목사(새 288장)
오늘 본문 말씀 민수기 7장의 배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그 장막을 세우시고 난 뒤의 일을 다루고 있다. 모세가 다 세워진 장막가운데 그 성막 모든 기구과 제단과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서 거룩하게 구별하였던 모습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그렇게 모세가 장막의 모든 기구과 제단과 기물에 기름을 발라서 하나님께서 지으라고 말씀하신 성막을 거룩히 구별했던 그 날, 그 날 당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휘관들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렸던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10개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었던 성막이 드디어 다 지어졌을때의 기쁨은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엄청났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광야에서 생활했던 수 많은 시간들 속에서 성막이 완성되었던 이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어떠한 날 보다도 매우 중요하고 역사적인 날이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성막의 의미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형성해서 매일 매일 생활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그 진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성막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성막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들에게 그 성막이 진의 중심에 있는 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였을 것이다.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였는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가를 확인 할 수 있다. 성막을 중심으로 사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이 완성되었다라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막이 완성된 그 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ㅇ한 날이였다라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성막이 완성되는 그 내용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막이 완성된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출애굽기 40:17 /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지 두번째 해를 시작하던 해였던 그때 성막이 1월1일에 완성되었다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 시켜 주고 있다. 출애굽기 40장 마지막부분의 말씀을 보면 그렇게 성막이 완성되어지게 되고 지어진 성막위에 구름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이 덮혀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모세조차도 성막에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있는 그러한 공간이 바로 성막이 된것이다. 그런 상황과 동시에 오늘 본문말씀 민수기 7장의 내용이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말씀 민수기 7장을 보면 모세가 완성된 그 성막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것으로 구별하고 있었냐면 기름을 발라서 구별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기름을 바른 사람이나 장소나 도구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사람이라든가 장소라든가 도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는 행동이었다. 이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용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하게 사용될 도구라는 것을 기름을 발라서 그 성막을 거룩히 구별한 그 날에 하나님께서 뽑으신 12명의 지휘관에 의해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바쳐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막을 봉헌한 후에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바친 봉헌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수 있다. 본문말씀을 보면 어떠한 예물이 들어오고 있는가?
민수기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덮개가 있는 수레, 지휘관 두명마다 한 대씩, 총 여섯대가 드려지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가 지휘관마다 한 마리씩, 총 열두마리가 드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휘관들이 덮개가 달린 수레와 그리고 소를 예물로 드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예물은 어디에 사용되어 지는 예물이었을까?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드린 예물은 성막이 완성되고 난 후에 드려진 예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지휘관들이 드린 헌물은 성막을 움직일때 사용하기 위한 헌물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 이 공동체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드린 그러한 헌물이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 지휘관들의 모습을 통하여서 우리가 점검하길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는지 살표 보기를 원하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드려야 좋을 지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과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공동체 가운데 유익을 줄수 있을까하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이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마음인 것이다. 지휘관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헌물을 잘 살표보면 첫번째로 성막이 완성된 것에 대해서 이 지휘관들이 기쁨과 감사를 표현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그 헌물, 그 기쁨과 감사의 표현에서 두번째로 공동체를 향한 지휘관들의 사려깊은 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지휘관들이 드렸던 예물의 타이밍 어떤가? 너무나도 완벽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너무나도 필요할 때에 이 헌물이 드려졌던 것을 보면 아마도 지휘관들이 예물을 드렸을때에 누군가가 시켜서 했던 것이 아니라 급하게 예물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성막이 완성되면 하나님께 어떠한 예물을 드리면 좋을 지 그들가운데 충분한 고민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를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 광야라는 지역에서 지휘관들이 드린 예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예물이었고 동시에 레위인들이 성막을 운반할때에 꼭 필요한 도구였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를 분명하게 채우는 것이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막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움직이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구름기둥과 그리고 불기둥이 움직이게 되면 따라서 움직이는 장면이 나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이 움직이고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멈추게 되면 똑 같이 멈춰서 그곳에 장막을 치는 그러한 방식이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동하는 속도에 따라서 즉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속도대로 거기에 맞춰서 이동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멈춰지게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시에 멈춰서 성막을 그 곳에 셋업하고 살다가 다시 출발하게 되면 성막을 다시 걷고 이동해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막을 셋업할때의 모든 재로를 챙겨서 이동하는 것이 제사를 책임지는 레위인들에게 어쩌면 하나의 고민 이었을 것이다.
그 무거운 성막의 기구들을 어떻게 운반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지파가 그것들을 운반해야만 했다. 그 레위지파, 아론의 아들의 몇명, 세명중에서 첫째아들 고핫과 둘째아들 게르손, 셋째아들 므라리, 모두 성막의 도구가 각각 다 중요하지만 특별히 첫째 아들이어던 고핫의 자손들은 성소안에 있는, 성막안에 있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거룩한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운반할것을 말씀하셨다. 둘째아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의 휘장과 회막, 그 덮개와 회장문을 맡아서 운반하게 하셨다. 그리고 셋째아들 무라리의 자손들은 장막의 널판들 성막에 둘러싸고 있는 기둥들, 받침들과 말뚝들, 줄들을 맡아서 운반하게 하셨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것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첫째아들과 둘째 아들과 셋째아들에게 맡겨직 그 직임가 각각 달랐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 맡기신 것들이 각자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똑 같은 것을 맡기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똑 같은 자리가 아닌 각자 다른 하나님께서 맡기신 분명한 자리가 있다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지휘관들이 지휘관 두 사람당 하나의 수레와 지휘관 한 사람당 한 마리의 소로 드린 결과 덮개가 있는 수레 여섯대 그리고 소 열두마리가 모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셔서 레위인들에게 그것을 주셔서 각기 직임대로 회막에 봉사에 쓰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 아들에게 모세가 헌물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의 상식대로 이 헌물을 놔두게 된다면 어떻게 놔눠야 될까? 아마 우리가 놔눠야 된다면 똑 같이 공평하게 나눴을 것이다. 공평하게 수레 두대씩 소 네 마리씩 공평하게 놔눠야 한다고 생각할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헌물을 놔눌때 특별한 방법으로 놔누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아들 게르손 자손에게는 수레 두대와 소 4마리를 주었고, 셋째 아들 므라리 자손에게는 수레 4대로 소 4마리를 놔눠 주었다.
수레 한대당 소 두마리를 배정해서 소 두마리가 수레 하나씩을 끌도록 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과 셋째아들은 그것을 받았지만 맏이 였던 첫째 아들이었던 고핫 자손에게는 수레와 소를 전혀 전혀 공급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주지 않았던 이유를 오늘 본문 말씀은 설명하고 있는데
민수기 7:9 /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첫째가 운반해야될 성막의 기구는 그 첫째의 직임은 직접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은 수레에 실을 수 없고 반드시 직접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만 했다. 이것을 짊어지고 광야의 길에서 운반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을 것이다. 어찌보면 고핫자손에게는 그 마음가운데 불평의 마음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형제들과 비교해 봤을때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길을 가야 하는가? 왜 나에게는 이 수레와 소를 주지 않았을까’ 하고 불평하고 불만하는 마음이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나누셔서 헌물 주신것이라는 그러한 고백이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맡기셨을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야라는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가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핫자손들이 그 광야길을 무거운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갈때에 동생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성막의 기구를 수레에 실고 상대적으로 편하게 운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비록 고핫자손들이 성막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옮기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 자리는 하나님앞에서 영광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마치 고핫자손같이 저와 여러분의 삶가운데서도 각자 다른 사명으로 각자 다른 삶의 무게로 무거운 짐이 맡겨진것과 같을때 그 자리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불평하게 만들고 불만하게 만드는 자릭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이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고 깨닫게 되는 그러한 인생이 되길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우리의 삶가운데 무거운 짐이 잔득 올라가 있는 것과 같은 삶의 무게감이 가득할 지라도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자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전 봉헌의 예물
민 7장 / 디럭스 바이블
[내용개요]
본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막을 완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족장을 중심으로 성막 봉헌을 위해 예물을 드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족장별로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정하고 그것을 레위 족속에게 분배하여 성막 봉사를 위해 쓰게 하였다(1-11절). 그후 열두 지파의 족장들은 매일 한 사람씩 십이 일에 걸쳐 예물을 드렸다(12-83절). 후반부에는 족장들이 바친 예물의 총계가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봉헌에 응답하시는 장면에 기록되어 있다(84-89절).
[강 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처소요 선민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부인 성막 미 완공된 이후 하나님께 성막과 제단의 봉헌식을 올리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성막과 단의 봉헌식을 통해서 여호와 종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분의 거룩한 뜻대로 예배 드리며 오직 그분께 영광 돌려 드려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종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성막을 위한 봉헌 예물
1) 성막 봉헌 예물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 처소인 성막의 식양을 모세에게 계시하시고 그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도록 간섭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막이 완공되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명하시어 성막 봉헌식을 거행토록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봉헌식에 참여하는 각 지파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일정한 양의 예물(수레와 소 등의 운반 도구들)을 가져 나오도록 명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이 같은 예물을 요구하신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이 성막 봉헌 예물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광야 행진 동안 레위인들이 성막을 손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같은 예물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초월한 지혜와 선한 경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시104:24)
b. 세상이 넘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고전1:21)
2)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히 구분된 성막
성막이 완공되고 성막 봉헌 예식이 있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성막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성령의 초월한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권위를 덧입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막에 기름을 바르게 하신 것은 비록 그 재질은 세상의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터전으로 삼으시겠다는 거룩한 의지를 피력하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a.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령한 권위(출40:34-35)
b.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구분됨(행10:38)
3) 사명을 맡기시고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 중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매우 무겁고 힘든 성막에 딸린 기물들을 운반토록 명하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들에게는 수레와 소를 제공하심으로써 그 기물들을 순조롭게 운반토록 주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자에게 고유의 사명을 맡기시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a. 능력 주시는 하나님(빌4:13)
b.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벧전4:10)
2. 번제단을 위한 봉헌 예물
1) 당신께 나아가는 길을 여시는 하나님
성막 봉헌 예물에 이어 단의 봉헌 예물과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여기서 단이란 곧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가리킵니다. 이 제단은 히브리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거룩한 기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유의 은총을 받아야만 했고, 피 흘림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사유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께 나아와 죄 사유함을 얻고 또 당신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단의 봉헌 예식을 통해 제단의 기능을 정식적으로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구도의 노력과 부단한 집념으로 인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하고 복된 길을 열어 주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고 그분과의 복된 만남을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기독교는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종교입니다.
a.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주님(요1:14)
b. 죄인을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눅15:7)
2) 모든 인격이 동일한 자격으로 하나님께 나아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지도자들은 정성껏 준비한 헌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에 대해 성경은 하나도 빠짐없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인격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신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며, 모든 인격들의 수고와 희생과 봉사의 손길을 결단코 잊어버리시거나 외면치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적 조건을 따져서 만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고 겸손히 당신께 무릎 꿇는 백성은 누구나 기쁘게 만나 주시며 그들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이뤄 주십니다.
a. 누구에게나 개방된 구원의 문(요3:16)
b. 모든 사람을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롬11:32)
3. 단의 봉헌 예물과 하나님의 응답
1) 정성스럽고 최선을 다한 봉헌 예물
하나님의 명을 좇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 지도자들이 드린 헌물은 참으로 정성스럽고 풍성하게 바쳐졌습니다. 그들은 매지파당 은반 한 개, 은 바리 한 개, 소제물(기름 섞은 고운 가루와 향), 번제물(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숫양 각 한 마리씩), 속죄 제물(숫염소 한 마리), 화목 제물(소 두 마리, 숫양 다섯 마리, 숫염소 다섯 마리, 어린 숫양 다섯 마리 등), 금 숟가락 한 개 등 참으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헌물들을 아낌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풍성한 헌물들은 결국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이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물들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물질의 다수로 정성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헌물에 대해 아무 거부감이나 거리킴 없이 자신에게 허락된 날에 신속하게 드린 것을 보면, 분명 그들 지도자들의 헌신의 열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성을 다한 예물, 즐거운 마음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며 만족해하십니다.
a. 헌물 드리는 자의 자세(고후9:7)
b.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예물(빌4:16-18)
2)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봉헌 예물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 정성껏 준비한 봉헌 예물을 모두 드린 이후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막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음성을 통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드린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물질의 양을 보시지 않으시고 드리는 자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헌물을 결단코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예물(사1:11-14)
결 론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들이 하루 한 명씩 무려 12일에 걸쳐 봉헌 예물을 드린 장면이 생략 없이 그대로 소개된 것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특권과 책무를 가진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모든 성도는 그 어떤 인간적인 조건이나 구분 없이 자유롭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덕분입니다.
[단어해설]
1절. 구별한 날. 당시 이스라엘에서 통용되던 달력은 출애굽에서 시작한 종교력, 출애굽 전에 사용된 민간력 두 가지. 여기서 '구별한 날'이란 정확하게 출애굽 제2년 종교력 1월 1일을 의미(참조,출30:22-25).
7절. 게르손 자손. 레위의 맏아들인 게르손의 후손들. 이들은 모든 앙장, 휘장, 세마포장 등을 관리하거나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8절. 므라리 자손. 이들의 임무는 목재의 관리나 운반으로 성막의 기둥, 말뚝 등을 관리.
9절. 고핫 자손. 레위의 아들 고핫의 후손들. 성막의 법궤, 떡상, 등대, 분향단 등의 기구들을 관리, 운반하였다.
15절. 번제될. 하나님께 헌신과 친교의 징표로 드린 제사의 제물로 소, 양, 비둘기가 대표적.
22절. 속죄 제물.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린 제사, 제물은 사회적 신분에 따라서 틀린데 보통 수송아지, 숫염소, 양 등이 있다.
35절. 화목 제물. 하나님과의 화목과 친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린 제사.
89절. 증거궤. 십계명 돌판을 넣어 둔 상자.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과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 속죄소 증거궤의 덮개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내려오시는 장소. 따라서 인간에게는 은혜가 되는 장소.
[신학주제]
예물의 봉헌과 분배. 이스라엘 백성들은 족장을 중심으로 성막 봉헌식을 위해 예물을 바쳤다. 이스라엘의 진 배치에 따라 유다 지파를 선두로 납달리 지파까지 차례로 봉헌하였다. 그런데 바치는 예물의 양은 열두 지파가 동일하였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일에 대해 공동의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록 순서는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취급받고 의무에 있어서도 동등하게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한편 족장들의 예물을 나눌 때는 레위 지파의 족속별로 나누면서 그 양에 차별을 두었다. 이것은 족속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그들의 임무에 따른 정당한 차별이었다. 즉 강도 높은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므라리 족속에게는 가장 많이, 비교적 가벼운 성막 기구를 운반하는 게르손 족속은 절반의 예물을, 손으로만 운반해야 하는 고핫 자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예물의 분배는 하나님의 차별이 아니라 정당한 구분을 증거하는 사건이다.
[영적교훈]
본장에서 하나님은 레위 족속들에게 그들의 임무에 따라 예물을 나누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자신의 사명에 따라 합당한 달란트를 하나님께 부여받았음을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객관적인 봉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 얼마나 합당하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노력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재능이 모자라지만 자신의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봉사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민수기 7장 1-3절 / 이한규 목사
< 하나님의 일꾼으로 구별시키는 것 >
성막을 봉헌할 때 기름(관유)을 성막 자체와 제단과 모든 기구와 기물에 발라 거룩하게 구별했다(1절). 어떤 대상에 거룩한 기름을 바른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쓰임 받아야 한다는 암시다. 구약 기대에 세속적인 사람과 사물을 거룩하게 만들려면 ‘기름 바름’이 있어야 했다.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처럼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행하지 않기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구별시키는 핵심 요소로 여겨진다.
목회자만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로 여기며 나는 특별한 은사가 없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축시키지 말라. 나도 영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로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이 준비되었음을 믿으라. 이렇게 말하지 말라. “나는 남에게 있는 특별한 은사가 없기에 평범하게 살리라.” 그러나 나도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구별된 존재임을 믿고 복된 운명을 향해 일어서라.
하나님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면 모세처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 저는 못해요. 저는 달변가가 아니에요. 그가 말을 잘하니까 그를 쓰세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하라. 나의 약속은 네게 있다.” 결국 할 수 없이 그 사명을 받아들이면 어느 순간에 어떤 감동이 생기면서 거룩한 사명을 누구보다 잘 이행힐 때가 많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내게 필요한 능력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처럼 내 안에 감춰진 은사가 충분히 있음을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축복의 장으로 나아가라.
어떤 사람은 남에게 앞선 자리를 미루며 말한다. “앞서 가면 저는 그저 따라갈게요.” 겸손한 것은 좋지만 겸손이 지나쳐서 위축된 상태로 구별된 자리에서 자꾸 뒤로 빼지 말라. 하나님의 약속은 남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지만 나를 통해 이뤄질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게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주었다.” 내가 구별된 존재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하라고 내게 성령의 기름 부음을 이미 주어졌음을 잊지 말라.
<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
성막 봉헌 후 각 지파의 감독 역할을 하는 12명의 지휘관들이 장막 앞에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였다(2-3절). 덮개 있는 수레는 소 두 마리가 끌고 바퀴 두 개가 달린 당시의 고급 수레를 뜻한다. 그때 각 지파의 지휘관들은 동일하게 소 한 마리와 수레 한 대의 절반의 몫을 헌물로 드렸다.
왜 하나님은 성막 봉헌 때 그 지휘관들이 예물을 드리게 했는가? 예물에 담긴 마음을 받고 또한 그 예물로 하나님의 일꾼 및 사역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연약하고 허물 많은 인간이 의식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특하고 애틋하게 보시겠는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내가 하나님의 일꾼의 필요를 채우겠다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축복의 문도 열어 주신다.
오래 전에 한 여자 청년이 교회를 위해 자기 금반지를 바쳤다. 목사가 감동해서 소리 없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그 자매가 어려운 중에 소중한 예물을 바쳤습니다. 자매의 마음을 받으시고 복된 길을 열어주소서.” 그녀는 순간적인 감정으로 금반지를 바치지 않았기에 그렇게 바친 후에도 헌신적으로 교회를 꾸준히 잘 섬겼다. 그 헌신적인 믿음을 보고 한 장로가 며느리를 삼게 해 달라고 기도한 끝에 결국 며느리로 얻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헌신적인 믿음을 잃지 않았고 시댁에서는 최고의 며느리가 우리 가정에 왔다면서 좋아했다.
내가 마음을 담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그 예물을 통해 하나님의 일꾼의 필요도 채우시지만 그 예물을 드린 사람의 마음도 받으시고 복의 문을 열어 주신다. 다급한 문제가 생기면 감사하는 마음과 헌신하는 삶이 바탕이 된 비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극적으로 움직이라. 무엇을 받겠다는 계산적인 마음이 전혀 없는 순수한 예물 봉헌은 하나님의 마음을 최고로 움직이게 하는 요소다.
장막안의 세계
민 7:1-11
지난 시간에는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축복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과 발전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인 희생과 섬김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온전한 나실인의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에게 강림하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리하신 희생의 자리에 우리도 함께 하는 것만이 곧 복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복의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어떤 잘못에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장막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장막은 하나님이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만들라고 지시하신 장막입니다. 출 40:17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과 연결되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장막이 이스라엘에게 왜 주어졌는지 그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장막은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들의 죄로 인해서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을 봐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막이란 이런 의미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 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라고 말합니다. 즉 장막을 거룩히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라고 하신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 외의 장막은 다 더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에만 함께 하십니다. 그 외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만이 거룩합니까? 희생의 피가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일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과, 거룩하지 못한 장막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은 장막을 지은 재료가 거룩해서 장막이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장막에 기름을 바르고,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서 거룩히 구별했다고 하지만 기구 자체가 거룩해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닙니다. 장막이 거룩할 수 있는 것은 장막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입니다. 즉 희생이라는 일 때문에 장막은 거룩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장막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 봅시다. 장막 밖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장막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의 모임, 즉 교회라고 합시다. 우리는 교회를 거룩하다고 합니다. 왜 교회가 거룩한 것입니까?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거룩합니까? 아닙니다. 교회 밖의 세상과 뭔가 다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섬김과 희생입니다. 세상과 다른 정신으로 사는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누르는 것을 쾌락으로 삼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결과로 자연히 약자들이 눌림 받고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희생이 없는 장막 밖의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장막에서는 자기는 비참하게 되고 피흘리면서 남을 살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을 거룩하다고 합니다.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정의가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였습니다. 스스로 세상 사람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천국 가고 너희는 지옥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모스 5:24절에 보면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라고 말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공의도 없고 정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의가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공의, 정의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를 바로 세우고, 민주화를 이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누군가가 비참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약자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웃을 자기보다 약한 약자로 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공의이고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아모스 5:21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절기를 지키는 것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회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제사도 받지 않으시고 제물도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찬송 소리도, 악기 소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의가 없고 정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과시하고 약자를 업신여기는 불의를 행하고 있으면서 절기 지키고 성희를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바로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런 성경 구절을 볼 때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기사 애당초부터 여호와의 법을 세우고 여호와의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기 위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오직 내교회 크게 만들어서 나도 힘좀 써보자는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눈에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만 힘쓰고 있으니 성경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겠습니까? 그런데 거짓된 목사가 가고 있는 망하는 길로 교인들도 함께 가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막 안의 세계는 장막 밖의 세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장막 안의 세계는 자기의 본 모습을 피흘리고 죽어 가는 제물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사회적인 지위, 재물, 이런 것에 자신의 모습들이 치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자신도 역시 비참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건강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건강을 잃어봐야 알고, 지금이 최선의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도 더 힘든 환경으로 빠져들어가 봐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에 내가 함께 달린다는 것은 나의 비참한 모습을 미리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것이 뭐가 있든 상관없이 자기를 과시하지 않고,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은혜를 모르고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은혜라는 말을 많이들 합니다. 그러나 보면 진짜 은혜를 알고서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자기를 과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건강하다면 이것은 내가 잘나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이 과연 자신의 건강을 과시하고 자랑하겠는가?
나는 병들고 고생해야 하는 인간인데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설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입혀졌기 때문이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금 모습은 여러분의 본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 때문에 지금 예배당에 나올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믿음에 대해서 소홀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돈버는 세상일에는 땀을 흘리면서 열심을 내고 살아가는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정말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가?'라는 의문점이 들 정도로 믿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급한 것은 돈이고, 자식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급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예배당은 꼬박꼬박 나오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배당을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이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이것이 곧 장막 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신자로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장막 안의 세계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는 약하고, 놀림받고, 비참하게 되어야 할 그런 인간인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안절부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남과 비교해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있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돈이 없습니까? 건강이 있습니다. 건강도 없습니까? 남편이 있고,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까?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생명도 잃어버릴 지경입니까? 뭐가 걱정입니까. 하나님을 알았으니 세상의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 아닙니까? 이렇게 사는 자가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는 세상의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자랑할 수도 없고 과시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피흘리고 죽어가는 제물을 통해서 저주받은 우리의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죽을 자가 살아있다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 있기 때문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 안에서는 장막 밖의 세상의 사고방식이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립니다. 그 예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린 예물은 레위인에게 주어져서 레위인이 회막 봉사하는데 쓰여집니다. 족장들이 드린 수레와 소는 레위인이 장막의 기구들을 나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은 결국 레위인들이 회막을 메고 옮기는 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이스라엘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회막 봉사를 맡았으니까 레위인에게 다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수레와 소를 바침으로 우리 역시 장막을 메고가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레위인의 일은 레위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회막의 일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것은 레위인과 같이 그들도 동일하게 회막을 메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제단으로 삼으시고 스스로 제물 되셔서 피흘리신 예수님은 온전한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그 레위인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정신에 함께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일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만 하고 있지 실제로 십자가를 지신 그 정신에는 동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나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알지 못하고서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수많은 신자아닌 신자들이 자신의 비참한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십자가를 따른다고도 하고, 믿는다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모습들이 교회에서 보여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지 못한 은혜와 감사는 가짜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데에 대한 말뿐인 감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던 것을 하나님이 빼앗아 버리실 때 원망이 나오고 불평을 할 사람들입니다. 좋은 것이 있어서 감사했는데 감사할 좋은 것이 없으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전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서 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막 안의 세계와 장막 밖의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장막 안에 거하고자 하면서 장막 밖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장막 안의 세계를 사모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장막 안은 그리스도안을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안의 세계와 그리스도 밖의 세계인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안에 살기를 원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 밖의 세계를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안을 원합니까? 세상을 원합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원하신다면 세상에서 발을 빼는 것이 곧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을 가지고 자신을 보면 결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막에서 피흘려 죽어 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의 조건이 좋다고 할지라도 결국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더러운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내 멋대로 살았고, 내가 나 된 것이 내 힘으로 된것인줄 알았던 것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막 안, 즉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시려면 우리가 얼마나 힘없고 부족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머무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장막에서 피흘려 죽어 가는 제물을 보면서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이고,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족장들이 드린 예물
민 7:1-89 / 엘림전원교회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자 거룩히 구별한 날에 이스라엘 족장들(종족의 두령들)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1. 7:1-9절- 예물은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마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단과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1절)에 드려졌다.
그런데 장막은 출애굽한 후 제2년 정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출40:7)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는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2년 이월 일일에 (민1:1) 실시되었습니다. 따라서 7장의 사건은 1장보다 선행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기 40장부터 민수기 6장까지는 성막을 세울 때부터 인구조사 때까지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7장은 인구조사 이전으로 돌아가 그때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족장들이 예물을 드리는 일(12절 이하)과 레위인의 성결의식(8장)에 앞서 레위인의 직무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곧 민수기 4장에서는 성막을 철거하여 운반하는 규정이 있는데 고핫 자손은 성막 비품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들(증거궤, 등대, 금단 등)을 매어 운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은 고핫 자손이 맡은 비품보다 더 무거운 비품(성막의 양장, 가죽덮개, 기둥 등)을 운반해야 했습니다. 7장은 이 무거운 비품들을 어떻게 운반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족장들이 드린 수레 여섯은 게르손 자손에게 두 대가 할당되어(7절) 성막의 양장과 회막 따위를 운반하였고, 나머지 4대는 므라리 자손에게 할당되어(8절) 장막 널판과 기둥 따위를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2. 족장들이 드린 예물(7장)
종 류제 물소제물 130 세겔 중 은반(銀盤) 1개(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움). 70세겔 중 은바리 하나 (피를 담아 제단에 드릴 때 사용하는 그릇)향 10세겔 중 금숟가락 (손바닥만 한 작은 그릇, 금사발) 1개-향을 채워서번제물 숫송아지 1마리, 숫양1마리(1년 된 어린 숫양)속죄물 숫염소 1마리화목제물 소2마리 숫양, 숫염소, 1년된 어린 숫양 5마리씩
3. 7:22절: 속죄제물- 속죄제의 제물, 속죄제는 동물제사의 한 형태로서 제물의 고기는 성전 또는 성막 구역의 바깥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속죄제물의 피는 지성소의 앞장에 뿌리고 향단의 뿔에 발랐으며 또한 번제단 앞에 부었습니다. 제물의 기름은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4. 7:10-88절
본문에는 단을 봉헌하기 위해서 각 지파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린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의 이름과 족장의 이름만 바꾸어서 같은 사건의 내용이 단조롭게 반복되어 있습니다. 단이란 날마다 드리는 예배의 중심지(中心地)입니다. 그러므로 단을 위한 봉헌은 첫 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행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여기서 각 지파가 동일한 예물, 번제물, 속죄제물, 화목제물을 드리고 있음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번제물을 제외한 나머지 제사물들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특히 소제물(素祭物)은 제사장의 중요한 몫이었으며(레6:14-18) 속죄제물과 화목제물도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 (레7:11-18, 28-36) 본문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뒷받침하고 있는 족장들의 일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은 거룩한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제사장들을 도와 그들의 사역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열두 지파가 드린 예물과 제물을 동일하게 반복하여 기록한 까닭은 모든 지파가 균등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한 각 지파가 서로 협동하여 성막과 제사장 직을 받들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5. 7장에 나오는 제물(祭物)
소제물(素祭物)이 다른 제물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43절) 보통 소제물은 번제물과 함께 드려집니다. 소제물은 제사장의 식생활의 주요 공급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물은 첫 번째로 언급하므로서 족장들인 제사장의 사역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속제물(贖祭物): 단(壇)을 봉헌하는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제물을 드리는 가운데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후에 성전을 봉헌할 때는 제사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왕상8:64)
고운 가루, 향: 이것들은 소제의 요소입니다.(2장) 7장에서는 소제, 번제, 화목제, 속죄제가 다 드려졌지만 특별히 무거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드리는 속건제는 안 드렸습니다.
6. 7:89절
단이 봉헌 된 후 하나님께서 실제로 회막 가운데 거하시게 됨으로서 이제 획막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배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룹은 여호와의 보좌를 지키는 천사로 법궤의 양 끝에 서서 날개로 법궤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 두 그룹 사이에서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제단에서 나오는 말씀을 잘 듣고 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12지파 족장들의 이름의 뜻
족 장 이름의 뜻 나 손뱀느다넬 하나님이 주셨다. 엘리압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엘리슬 하나님은 반석이시다. 슬루미엘 하나님은 평화시다. 엘리아삽 하나님은 더하게 하신다. 가말리엘 하나님은 상급이시다. 엘리사마 하나님은 들으신다. 아비단내 아버지는 재판관이시다. 아히에셀네 형제는 도움이시다. 바가엘 하나님과 만남. 아하라 형제는 친구의 하나다.
이들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이름인 “엘사다이” 또는 “압”(아버지), “암”(친족) “아”(형제)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름은 문장투로 지은 것은 B. C 2-1세기경에 셈족의 공통적인 풍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