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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독립군
최재형(崔在亨) 선생 (1860. 8. 15 ~ 1920. 4. 5) 선생은 용의과감(勇毅果敢)의 인(人)이며 기(己)를 희생하야 동족을 구제하랴는 애국적 의협적 열혈이 충일하는 인격자요 겸하야 성(誠)으로써 인(人)과 사(事)를 접(接)하야 민중의 신뢰와 존경을 박(博)하던 이라. - 선생에 대한 추모 기사(《독립신문》1920년 5월 15일자) 러시아로의 이주와 자수성가 선생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다. 선생의 부친 최흥백은 가난한 소작인으로 매우 낙천적이고 호방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선생의 어머니는 재색을 겸비한 기생이었다. 1869년 가을 부친 최흥백은 부인을 고향에 남겨둔 채 선생과 형만을 데리고 훈춘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 지신허(地新墟)라는 한인마을에 정착했다. 지신허 마을은 1863년 겨울 함경도 국경 무산(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 양응범(梁應範)이 13호의 한인들을 이끌고 무작정 월강하여 정착하여 만든 러시아 최초의 한인마을이었다. 1869년 당시 두만강 국경의 육진(六鎭)지방은 대흉년과 기근이 휩쓸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었다. 선생의 가족이 이주했을 당시 1869년 6월부터 12월에 이르는 6개월 동안에 무려 6,500명의 함경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지신허 마을로 이주한 2년 후인 1871년 11살의 어린 선생은 무단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얼마 전에 형 알렉세이와 결혼하여 새로운 식구가 된 형수의 미움과 차별 때문이었다. 가출을 약속했던 2명의 친구들은 두려움으로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리고, 혼자 남은 선생이 무작정 걷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해변가에 굶주림과 피로로 탈진해 쓰러져 있던 어린 선생을 구조한 사람들은 러시아 상선 선원들이었다. 이들은 선생을 자기들의 배로 데려갔다. 상선의 선장과 부인은 선생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선원으로서 심부름하며 일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이들 부부는 대부(代父)와 대모(代母)가 되어 선생이 러시아정교회식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선생의 러시아 이름과 부칭(父稱)인 표트르 세묘노비치는 선장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이후 러시아사료에서 선생은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라는 이름으로만 기록되어진다.
가출은 어린 선생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행운이 되었다. 선장의 부인은 어린 선생에게 러시아어는 물론, 러시아고전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가르쳐 주었다. 정식학교를 다니지 못한 선생이 깊은 소양과 폭넓은 안목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원시절 선장부인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두 번 왕복하는 등, 여러 나라의 문물들을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더욱이 선생은 소년선원으로서 힘든 노동을 통해 굳은 의지와 인내심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6년 동안의 선원생활은 선생에게는 그야말로 훌륭한 대학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1878년 상선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을 때, 선장은 선생을 자신의 친구가 경영하는 상사(商社)에 소개해 주었다. 선생은 선원생활과는 아주 다른 비즈니스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상법을 공부하고 사업상의 러시아어를 습득하였으며 나름의 인간관계를 넓히는 등 성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생활을 하였다.
3년간의 상사생활을 마치고 10년 만에 선생은 1881년 부친 최흥백 등 가족들을 찾았다. 그동안에 가족들은 이미 지신허마을을 떠나 인근의 얀치헤(煙秋)로 다시 이주해 살고 있었다. 농사꾼인 부친은 익숙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변변찮은 농기구나 가축조차 없었다. 선생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말, 젖소, 닭 등을 구입하고 새로이 집을 지었다.
선생은 연추로 돌아온 1년 후인 1882년 결혼하였는데 선생의 나이 22세였다. 첫 번째 부인은 세 아이(아들 1, 딸 2)를 낳고 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 선생은 1897년 김 엘레나 페트로브나(1880-1952)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인근의 러시아군영이 있던 노보키예프스크에 상점을 갖고 있던 김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의 딸이었다. 선생은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8명의 아이(아들 3, 딸 5)를 가졌다.
연추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러시아정부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라즈돌리노예, 자나드로브카, 바라바쉬, 슬라뱡카, 노보키예프스크를 거쳐 두만강 하구 국경지대인 크라스노예 셀로(鹿屯島)에 이르는 군용도로 건설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주변 한인마을의 한인농민들은 부역에 동원되었고, 러시아는 장졸과 임금을 제공하였다. 당시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한인이었던 선생은 도로건설을 담당하는 철도도로건설국의 통역(通譯, 당시는 通辭라 했음)으로 선발되었다. 노보키예프스크 주둔 러시아 경무관(警務官)은 선생에게 영군(營軍) 3백 명을 데리고 노보키예프스크에서 바라바쉬까지의 도로를 개축하게 하였다.
선생은 러시아관리들과 부역에 동원된 한인들간에 중재자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불행하고 차별받는 처지에 있음에도 러시아어를 몰라 불평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던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해주었다. 이런 때문에 당시 한인들간에 선생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한인들은 선생을 러시아 이름인 '최 표트르'의 애칭인 ‘최 페트까(Tsoi Pet'ka)'를 부르기 쉽게 '최비지깨'라고 불렀다. 부역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한인노동자들의 입을 통하여 선생의 이름이 한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인사회에서 선생은 '최비지깨'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선생은 러시아관리들의 돈독한 신뢰를 얻게 되어, 러시아정부는 1888년 '도로건설에서 노고와 열성을 보여주었다"며 은급훈장을 수여하였다. 선생이 러시아정부로부터 받은 첫 번째 훈장이었다. 한인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선생은 서양식의 집을 짓고 화원을 꾸몄는데, 이 역시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최초의 연추읍(邑) 도헌 이에 앞서 러시아는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을 맺어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국경통과를 법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고, 1888년에는 '조로육로통상장정(朝露陸路通商章程)'을 맺어 국경지대에서의 무역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정부는 한인이주민들을 3가지 범주로 나누고, 1884년 이전에 이주해온 한인들에게는 러시아국적을 부여하고, 이후 이주한 한인들은 2년의 유예기간을 주고 여권을 소지하도록 했다. 거주한인은 일정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거주권을 발부받아야 했다. 러시아정부는 1892년 마침내 1884년 이전에 이주한 한인들에게 러시아국적을 부여함과 동시에 국유지를 1가호 당 15데샤친씩 임대 분배하였다.
이에 앞서 점증하는 한인이주민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188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당국은 도헌(都憲), 사헌(社憲)제를 도입하여 자치제를 허용하였다. 당시 각 마을(社)은 촌장인 노야(老爺)를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였다. 노야는 세금징수, 행정명령의 전달, 사소한 법적 분쟁의 재판, 경찰사무 등을 담당했다. 러시아정부는 연해주남부 러시아, 중국, 조선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몇 개의 한인마을들을 합하여 연추를 읍(邑, 볼로스치) 소재지로 한 연추읍을 설정하고, 책임자인 도헌이 행정을 관장케 하였다. 도노야(都老爺)라 하기도 한 도헌은 행정담당자로서 읍회의 의장을 겸했으며, 3년마다 읍회에서 선출하였다. 도헌의 역할은 읍민들간의 분쟁이나 농민과 지주간의 분쟁을 조정하였고, 한인학교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읍소재지 연추에는 경찰서가 있었고, 아지미읍에 그 분서를 두었으며 기타 주요한 촌락에는 경찰관주재소를 배치하였다.
1893년 선생은 러시아 최초로 우리의 면장(面長) 또는 읍장(邑長)에 해당하는 도헌(都憲)에 선출되었다. 한인들이 국적을 취득하기 전인 1880년대 후반이래 연추 도헌에는 러시아인들이 선임되었으나, 1892년 이후 한인들이 국적을 취득할 수 있게 되면서 한인인 선생을 도헌으로 선출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선생이 그만큼 러시아정부의 두터운 신뢰를 얻고 있었고, 한인사회에서의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도헌에 선임된 같은 해 선생은 두 번째의 은급메달(스타니슬라브 綬章)을 수여받았다. 다음 해 선생은 제1차 전(全)러시아 읍장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페트로그라드에 가서 알렉산더 3세의 연설을 들었다. 전국적 차원에서 선생이 한인지도자로서 가졌던 첫 번째 공식활동이었다. 2년 후인 1896년 선생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다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연추도헌으로서 선생이 중점을 두었던 사업은 한인자녀들을 위한 교육이었다. 통역으로 있으면서 선생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 설립에 힘썼다. 이미 1880년대에 연추의 용평과 추풍에 러시아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도헌에 취임하기 전인 1891년 선생은 연추마을(下연추마을)에 정교학교를 창립하였는데, 아이들에게 철저한 러시아식 교육을 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는 한인마을에 세워진 대표적인 러시아식 한인학교였다. 선생은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2천루블의 장학금을 내는 등 열성으로 학교운영을 후원하였다.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는 많은 졸업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였다. 선생의 장학금을 받고 사범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이들 졸업생들이 모교의 교사로 와서 활동했다. 졸업생 가운데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군장교로서 러시아를 위해 공헌을 남긴 자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정부는 선생의 이러한 공헌을 인정하여 1902년 교회헌당식이 거행되었을 때 선생에게 금메달훈장(스타니슬라브 綬章)을 수여하였다.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는 1899년 하바로스브스크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교육부문에서 동메달의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 연해주내 최우수 러시아소학교라는 평가를 받았다.
선생은 또한 교회와 학교 건물 외에도 교사와 사제를 위한 건물을 지었다. 연추마을입구에 세워진 이들 건물은 매우 견고하고 넓게 지은 벽돌건물로 1894년에 이곳을 방문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이나 1904년 서울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이곳에 온 흐리산프(Khrisanf)의 여행기에 잘 소개되어있다. 특히 흐리산프는 여성을 위한 학교가 설립되어 있고 여성이 정교회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등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선생의 지도력에 크게 감동하였다고 썼다. 1895년 선생의 주선으로 1875년에 최봉준이 개척한 한인마을 향산사(香山社)에 러시아정교회와 학교가 설립되었다. 선생은 연추에 우신(又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학교운영을 담당했다.
선생은 각 촌락마다 러시아정교회와 한인소학교가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선생은 교회와 학교의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했다. 다행히 한인들은 선생의 자금모집에 적극 호응했다. 1890년대 말 연해주지역의 32개 한인마을에 있었던 러시아소학교들은 한인농민들의 주도로 설립된 것인데 선생이 지도력을 발휘했다. 도헌 시절 선생은 자신의 봉급 3천원을 전부 은행에 맡기고 그 이자로 매년 1명을 페테르부르그 등 러시아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선생의 장학금으로 러시아 각지 도시의 사범학교나 사관학교로 유학을 가서 고등교육을 받은 약40명의 청년들 가운데는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한명세, 오하묵, 최고려, 박일리야 등 후일 저명한 사회,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들이 많다.
선생의 교육사업을 가능케 했던 것은 그가 유능한 사업가로서 재력을 모았던 덕택이었다. 선생은 연추의 러시아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하는 청부업자였다. 슬라뱡카에는 러시아 병영 건축과 관급(官給)의 벽돌제조공장을 경영했다. 러시아군대와 계약을 체결하여 소고기와 건축자재 등을 공급하며 재력을 모았다. 선생은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추에서 가옥임대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한인사회를 위한 교육과 실업활동을 장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물질적 기반을 확충하기 위하여 재력 있는 한인사업가들과 의기투하였다. 1898년 선생의 뜻에 동조하여 두터운 의형제의 결의를 한 인물들은 한 엘리세이 루키치(한익성)와 그의 동생 한 바실리 루키치, 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최니콜라이 루키치(최봉준) 등이었다. 특히 최 루키치 니콜라예치는 선생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한 인물로, 1900년 의화단사건, 1904-5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하여 재산을 모았다. 이들은 각자의 회사들간에 사업상의 자매관계를 맺으며 상호협력하며 한인사회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마련했다. 항일의병투쟁의 지도자 선생은 떠나온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조국강토가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어 주권이 유린되는 현실을 걱정했다. 선생은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남부우수리지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노보키예프스크에 살고 있던 가족들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시켰다. 선생은 전쟁이 끝나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일설에는 선생의 일본행이 당시 일본에 체류중이던 박영효(朴泳孝)와 기맥이 통하여 그와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6개월 만에 연추로 돌아온 선생은 곧바로 항일투쟁을 위한 의병조직에 나섰다. 헤이그에서 이준(李儁) 선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노령한인들의 애국심과 분노를 고조시켰다. 선생은 전(前)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노보키예프스크에 의병본부를 설치했다. 1908년 봄에는 자금과 의병모집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미 87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던 안중근(安重根), 김기룡(金基龍), 엄인섭(嚴仁燮) 등이 다른 동지들과 함께 선생의 의병본부에 합류했다.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위종(李偉鍾)이 부친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을 받고 노보키예프스크로 왔다. 1908년 4월(음력)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되었고, 부총장에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 서기에 백규삼(白圭三) 등이 선출되었다. 해조신문 1908년 5월 15일자에 발표된 동의회 취지서는 "우리도 개개히 그와 같이 철환(鐵丸)을 피치 말고 앞으로 나아가서 붉은 피로 독립기를 크게 쓰고 동심동력하야 성명을 동맹하기로 청천백일에 증명하노니 슬프다 동지제군이여"라고 끝맺고 있다.
선생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1만 3천 루블이란 거금을 쾌척했다. 이외에 이위종이 1만 루블을 가져왔으며, 6천 루블이 수청(水淸)지방에서 모금되었고, 각지로부터 군총 100정이 수집되었다.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는 1908년 7월초부터 9월에 걸쳐 함경도 국경지대로 진출하여 일본군수비대외 격전을 벌였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수적인 열세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운동은 1908년 가을이후 퇴조기로 들어가게 된다.
선생 역시 표면상으로는 의병운동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게 된다. 선생의 이러한 결정은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한 러시아당국의 정책변화, 이범윤과의 불화, 의형제 관계인 최봉준, 김학만(金學萬) 등의 의병운동에 대한 비판 등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은 1909년 1월 31일 고본주(固本主) 총회에서 1908년 11월에 창간된 대동공보(大東共報)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선생의 노보키예프스크 집에는 한인애국지사들이 자주 체류했다. 안중근의사 역시 하르빈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하러 떠나기 전, 선생의 집에 머물며 사격연습을 하였다. 선생은 안중근의사를 위해 여비를 보탰다. 1911년 2월에 작성된 일본의 첩보자료는 안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이 연추에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으며, 안의사의 ‘처자가 지금 연추 최재형방에서 쉬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1912년에도 안의사의 부인과 어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우수리스크에 있는 선생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1910년 선생의 가족은 결혼한 장남 최만학(최 표트로 페트로비치)에게 노보키예프스크의 집과 재산을 맡기고 슬라뱡카로 이주하였다.
1910년 12월 선생은 이종호와 함께 연추에 국민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고 자신의 주택을 본부 사무실로 제공하였다. 당국의 허가를 얻지 못해 비밀로 조직된 국민회의 목적은 학교설립과 교육의 장려, 인재 등용, 국권회복 등이었다. 주요간부는 채두성(蔡斗星), 황병길, 오주혁 등이었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하였고, 합병선언 다음날인 8월 30일 13도창의회(十三道義軍)의 지도자 42명을 체포하였다. 러시아당국은 이 가운데 이범윤 등 7명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하였다. 이들에게 부과된 죄목은 이들이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군수를 살해할 모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일제가 날조한 문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1911년 초 일제는 같은 수법으로 선생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선생이 일제의 첩자라는 날조된 문서에 근거하여 연흑룡주군관구 사령부는 선생을 러시아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서 연추도헌에서 해고하여 군관구 밖으로 추방할 것을 연해주 군정순무사(軍政巡撫使)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반하여 우수리스크철도관리국 헌병경찰대장인 쉬체르코바는 연해주 군정순무사 스베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제의 간계를 폭로하고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선생은 러시아의 의심할 바 없는 충성스러운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포세트구역 경찰서장 역시 선생이 러시아관리들은 물론 “모든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은 인물이라고 옹호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주일동안 조사를 받고 석방되어 추방은 면했지만 연추도헌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일본은 ‘일본첩자’로 추방될 선생을 일본으로 실어갈 기선을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시켜 놓았다고 한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대동공보가 폐간된 이후 한인들은 그 후속신문의 발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대양보 발간이 결정되자 선생은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이종호와 함께 신문발간비용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안타깝게도 대양보는 인쇄기가 분실되면서 지속적으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한인자치 기관 권업회의 지도자 1911년 선생은 러시아정부의 공식적 허가 받은, 한인의 실업과 교육을 장려할 목적을 가진 합법적 단체로서 권업회를 발기하였다. 1911년 6월 1일, 57명의 대표가 참석한 발기회에서 선생이 발기회장으로, 홍범도 장군이 부회장으로, 총무 김립, 서기 조창호, 재무 허태화 등이 간부로 선출되었다.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고 개최된 1911년 12월 17일의 권업회 공식 창립대회에서 선생은 도총재(都總裁) 유인석(柳麟錫)에 이어 김학만, 이범윤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이어 1913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개최된 로마노프황가 300주년기념행사에 한인대표단 단장으로서 7명의 대표들과 참석하였다.
선생은 이후 권업회가 지방파쟁으로 인한 오랜 침체에 벗어나고자 개최된 권업회 특별총회(1913년 10월 10일)에서 회장에 취임하면서 권업회 재건에 나섰다. 아울러 선생은 1913년 말 최봉준, 채두성, 박영휘 등 원호인(러시아국적취득자) 지도자 3인과 함께 ‘한인아령이주 50주년기념 발기회’를 조직했다. 1914년 2월 1일의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다시 선출되는 등 선생은 어느 때보다도 활동이 활발했던 1914년의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1914년 2월 3일부터 7일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지방대표원회의에서 10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서 기념식을 개최하고 포셋트(목허우)에 한국식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기념행사발기회는 연흑룡주총독 곤닷찌의 허가를 받았다. 이어 3월 25일에 30여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권업회 회관에서 개최된 지방대표원회의에서 ‘한인아령(俄領) 이주 50주년기념회’가 조직되었는데, 선생이 기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일부 러시아당국자들의 반대입장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추진되던 ‘50주년기념행사’는 결국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면서 과거 전쟁까지 치룬바 있는 러시아와 일본은 밀접한 동맹국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외무상 모토노 타로는 1915년 8월 러시아당국에 보낸 메모에서 선생을 비롯하여 이동휘, 이상설, 이동녕, 이종호, 이강, 이범윤, 정재관 등 28명의 한인지도자들을 일본당국에 넘겨주거나 시베리아 오지로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선생에 대해서는 권업회 창건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의 독립달성을 위해 1만 5천루블의 기금을 모았다는 혐의를 적시했다.
선생은 1915년 11월 3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을 후원하기 위한 휼병금(恤兵金)을 모금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휼병회(恤兵會) 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생은 1916년 7월 또 다시 러시아당국에 체포되는 수난을 당했다. 선생은 슬라뱡카에서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다. 다행히 선생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첫째 사위 김야곱 안드레예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러시아혁명후 민족적 지도자로 러시아혁명 후에도 선생은 꾸준하게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계속했다. 1917년 7월 7일자로 된 일본외무성의 첩보자료에는 “일반선인(鮮人)의 고로(故老)로 추앙받고 있는” 선생이 ‘귀화선인단(歸化鮮人團)의 대표자’로서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노병소비에트를 방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또한 연추읍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0월혁명 후인 1918년 여름 체코군의 봉기를 계기로 일본군이 무력 개입하였고, 선생의 집이 있던 슬라뱡카에도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자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생의 부인은 옷가지, 침대, 귀중품만을 갖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 이어 선생의 가족은 일본군을 피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군자치회의 의원과 검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러시아 각지로부터 온 지역 및 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선생은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선생이 러시아국적을 취득한 원호인을 대표하는 원로이며, 이동휘가 국내로부터 망명한 여호인들을 대표하는 애국투사임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회에서 조직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러시아혁명과정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중립선언은 대회직후 발생한 체코군의 봉기와 일본, 미국 등 열강의 무력개입으로 이를 실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8년 말에 개최될 예정인 반볼쉐비키적인 시베리아의회(독립의회)에는 2명의 의원을 시베리아의회에 참여시키기로 하였다. 선생은 한명세와 같이 2명의 한인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임하였다.(대신에 김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가 선출됨).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러시아의 한인들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한인사회의 양대축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두 지역의 한인들이 각각 파견 대표문제를 논의하였던 바, 선생은 양측에 각각 선정한 예비후보에 포함되기도 했다. 결국 파리강화회의 파견할 최종 대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로 결정되었는데, 당시 선생은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상설의회 의원으로서 최종대표를 결정한 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선생은 러시아 한인들의 중앙기구였던 전로한족중앙총회가 3․1운동을 전후하여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외교부장에 선출되었다.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주요간부를 보면 의장 문창범(文昌範)을 비롯하여, 부의장 김철훈(金哲勳), 서기 오창환(吳昌煥), 선전부장(宣戰部長) 이동휘, 재무부장 한명세(韓明世)였다. 한편, 선생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한인 학살만행 1920년 4월 4-5일, 일본군은 1920년 초 이래 득세하기 시작한 러시아혁명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브스크, 스파스크. 포셋트 등지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에 대한 불의의 습격을 가했다. 일본군이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하여 4월참변으로 불리고 있는 이 사건으로 1천여 명의 러시아혁명군과 소비에트․빨찌산부대의 대원들, 그리고 일반주민들이 살해되고 고문을 당했다.
4월 4일 당일 아침 선생은 아침 일찍 집을 나갔고, 둘째 아들인 최 파벨 페트로비치 역시 빨찌산부대와 함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를 떠났다. 선생은 저녁 늦게 귀가하였다. 부인과 딸들은 일본군의 보복을 걱정하며 선생에게 빨찌산부대로 도피하라고 독촉했다. 선생은 도피할 것을 거절하면서,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일본인들의 기질을 안다. 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라며 부인과 딸들을 설득했다.
결국 다음날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카피톤 등 3명의 인사들과 함께 재판 없이 만행적으로 총살되었다. 상해에서는 상해거류민단의 주최로 3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과 순국한 인사들을 위한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추도회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각부 총장 전원이 참석하였으며, 국무총리 이동휘가 선생의 약력을 소개했다.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1921년 상해임정 대표단이 선생의 유족들이 살고 있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를 방문하여 부인과 자녀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아령(俄領)에 있는 한인사회의 개척자,’ 러시아 ‘한인사회의 제일인물,’ ‘시베리아동포의 대은인(大恩人)’으로 추앙받았던 선생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위해 투쟁하다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뒤에 남은 선생의 부인과 10명의 자녀 등 유족들의 앞날에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녀들이 겪은 정신적 상처의 깊이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첫댓글 서점에 가면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