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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숲으로 갔네
그렇게 혼자서
아무것도 찾지 않는 것
그게 내 뜻이었네
그늘 속에서 보았네
작은 꽃 한 송이
별처럼 빛나며
눈동자처럼 아름다웠네
내가 꺾으려 하자
꽃이 가냘프게 말했네
절 시들도록 굳이
꺾어야겠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 작은 뿌리를 파내어
아름다운 집
뜰로 날라 왔네
그러고는 다시 심었네
조용한 곳에
이제 그 꽃 자꾸 가지 뻗어
그렇게 계속 꽃피고 있네
[작가소개]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출생 : 1749년 8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 1832년 3월 22일 (향년 82세)
독일 연방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바이마르
국적 : 독일 연방
직업 : 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정치인[1]
종교 : 개신교(루터회) → 무종교(범신론)
1. 개요
독일의 작가이자 극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시인이며 한때에는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이자, 같은 문인들에게는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문학의 신화로 여겨진다. 살아있을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 독일을 넘어 서양 철학과 문학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요한 카스파어 괴테(Johann Caspar Goethe, 1710–1781)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추밀고문관)까지 올라 평민층으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거둔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카타리 엘리자베트 텍스토어(Catharina Elisabeth Textor, 1731–1808)도 평민층이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Johann Wolfgang Textor, 1693–1771)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는 출산 당시 난산이었고 산파가 조치를 제때 하지 못해 무호흡 상태에까지 빠졌었다가 인공호흡을 통해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괴테가 태어난 이후 출생한 두 남동생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어버렸고 그 두 사건이 어린 괴테를 한때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무사히 잘 자라서 어린 괴테가 무척 귀여워해 줬고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여섯 형제자매 중 성인으로 자란 것은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 뿐이었다.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문학에 대하여 무척 흥미를 가져서 아들인 요한이 글을 잘 썼으면 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어릴적에 요한은 무척 글쓰기에 흥미를 보여 작문학교에서 교사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며 그때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며 칭찬해줬다.
2.2. 문학으로의 입문
이런 풍족함 속에서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게 해줬다. 괴테는 라틴어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교육받았고 성서와 히브리어, 이디시어 등등도 교육받았다. 아버지 구비한 수많은 장서와 언어 교육 그리고 괴테의 호기심은 그가 문인으로 성장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괴테의 문학적 정신과 문인으로서의 사상은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괴테의 외할아버지는 구세계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했지만 아버지는 프로이센에 의한 신흥 질서를 지지했다. 이런 대립은 어린 괴테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와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이던 당시 독일 일부를 지배할 때, 괴테의 집에 프랑스군 점령군 사령관인 토랑 백작이 머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척 그를 싫어했지만, 10살 무렵의 괴테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백작을 극진히 대접해 친하게 지냈고 백작은 이런 대접에 고마워하며 어린 괴테에게 독일어를 잘하는 프랑스군 부하장교를 시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해줬다. 토랑 백작은 미술과 연극 애호가이기도 해서 프랑크푸르트 시에서는 프랑스 미술과 연극 등 프랑스의 문화를 눈으로 볼 기회가 매일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토랑 백작은 프랑스에 유학 온 반갑게 맞이하여 머물 숙소를 알선해주었고 괴테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칠 때도 서로 편지도 보내고 친근한 사이로 지내게 된다.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거행된 요제프 2세의 대관식은 귀족 사회에 대한 괴테의 시각을 확장시켰다.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입학하여 법륙학을 배운다. 라이프치히 생활 동안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와 다르게 보다 선진적이고 인구도 많았던 그 도시에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피부로 느낀다. 괴테는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도 2년 동안 머물면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이 인연으로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는 괴테의 길이라는 길과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쓰길 좋아하던 괴테는 24살때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나이 겨우 스물다섯인 1774년,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한다. 발표 직후 괴테는 유럽에 유명세를 떨치는데 심지어는 나중에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기만은 못 따라갈 정도였다. 30대 후반에 방문한 이탈리아에서도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작가로 유명했으며 실제로 본인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괴테에게 열변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커다란 유명세와는 반대로 괴테는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 계약 당시 출판사는 별볼일 없는 신인 작가일 뿐인 괴테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서는 무단으로 출판되는 사본이 마구잡이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의 공작 칼 폰 아우구스트이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다. 공무원으로 3년 동안 지내면서 바이마르 궁정 내의 공무원 중 최고 수준으로 돈을 두둑히 받았지만, 공무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와 권태 그리고 문인으로서 정체된 상황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괴테는 과거부터 이탈리아에 품어 왔던 동경과 문인으로서의 침체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어울려 이탈리아로의 여행을 결정했다.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작은 물론 주변 친우들에게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숨긴 채, 저작 활동을 위한 유급휴가를 미리 신청해놓았다가 공작과 친우들과 함께 간 칼스바트(현재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휴가 도중 몰래 새벽녘에 여행을 떠난다. 공작은 괴테가 신청한 기일이 없는 유급휴가와 그의 저작 완성이 수개월 내에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무 업무에 싫증을 느낀 것과 문학에 대한 집념을 이해한 공작은 이탈리아에서의 여행과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를 후원했다. 이때 괴테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여행이 시작하고 얼마 후에는 바이마르의 친우들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출판을 위한 원고도 발송하며 활발한 저작 활동을 이어나갔다.
아우구스트 공작은 괴테가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전처럼 친구로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에게 문학적 성장을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고 이는 문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괴테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괴테가 문학 외의 철학과 식물학, 미술 등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작의 재정적 지원이 있어 그가 생활적으로 여유를 가진 덕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널리 이름을 알린 작가였는데 그쯤에는 유명세가 이탈리아에도 파다하게 퍼져 정체를 숨기고 가명까지 사용한 여행에서도 그의 방문이 소문나 여러 예술가와 위정자의 관심을 끌었다.
독일 본국에 있을 때에도 그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며 만남을 청하는 예비 작가들의 산더미 같은 편지를 받았고 실제로도 많은 문인과 만났다. 빌헬름 텔, 군도로 유명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이다. 이외에도 슐레겔, 노발리스 등이 그의 집을 찾았다.
2.3. 괴테의 여인들
이렇게 곱게 펼쳐진 인생에서 괴테는 무수한 여자와 사귀면서 사랑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오죽하면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괴테와 사귀었던 여자들도 같이 연구해야지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괴테는 연애를 통해 시인으로서의 생명력과 감성을 습득했으며 이는 죽는 그 날까지 마르지 않는 위대한 시상의 밑거름이 되었다. 뿐만아니라 괴테가 만난 수많은 여인들은 종종 괴테가 새로운 분야의 눈을 뜨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괴테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 부프(1753~1828)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였다.
사귀던 여자들과의 나이 차도 폭 넓어서 19살에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란 여자와 사귀었고 그보다 훨씬 뒤인 74살에는 55살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1804~1899)에게 청혼하기까지 한다.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765~1816/당연히 나중에 성은 괴테)와 했으며 그녀에게서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1830)를 얻었다. 그런데 괴테는 크리스티아네와 동거한 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서야 혼인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사했다. 크리스티아네는 평민이어서 주변에서는 괴테의 사실혼을 말렸으며 괴테와 크리스티아네의 관계를 곱게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크리스티아네는 사교적으로 활발한 인물도 아니었고 식자층의 교양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샤를로테 슈타인과의 관계는 이 일로 인해 잠시 껄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아네는 괴테가 가진 작가로서의 자유분방함과 감수성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해 여러 시문학을 남기게 했다.
아내 사후에도 여러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여성이었다. 울리케는 괴테를 만날 당시 17세였다. 사랑을 처음 느꼈을 때 괴테는 이젠 늙은이가 된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무랐지만 내내 사랑을 앓다가 2년 뒤인 1823년에는 울리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공작 칼 폰 아우구스트는 배를 다 잡고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 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의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었다. 괴테는 의사까지 찾아가 이 나이에 혼인을 할 수 있냐는 진단까지 받았고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괴테를 놀리던 공작 아우구스트도 괴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괴테의 부탁을 승낙하여 레베초프 부인을 찾아가 괴테를 소개하고 괴테가 부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뜻을 전한다. 그러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라는 식으로 곤란하단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울리케가 괴테에게 보낸 시선은 연인에 대한 성애라기보다는 이름 높고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 섞인 애정에 가까웠고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 또한 결혼을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혼인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으면서 행복했노라.(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
2.4. 다재다능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 이 책에서 밝힌 대표적인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꽃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중에서 최고수준이었다.
의외로 치의학과 해부학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괴테는 치아가 잇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치아의 뿌리가 되는 뼈대가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 끝에 간악골(앞니뼈)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어권 학계에서는 이 뼈 부위를 지칭할 때 종종 'Goethe's bone'이라고도 부른다. 괴테의 발견 전까지는 간악골이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창조론의 과학적 근거로 쓰이기도 했었다. 인간의 간악골은 유아기의 성장 과정에서 턱뼈와 합쳐지기 때문에 발견이 어려웠던 것이다. 괴테는 인간이 척추동물이고 앞니가 있는데 간악골은 없을 리가 없다고 자부했고 태아의 두개골을 연구하다 마침내 간악골을 발견했다. 괴테의 간악골 발견은 당대 유럽 학계에 피어나던 진화론의 사상적 근거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다만 여러 재능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자로서의 감각은 영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는 허풍까지 늘어놓았다. 물론 현대의 승자는 뉴턴 쪽이 된다. 그런데 괴테가 뉴턴의 학설을 논파하려는 과정에서 빛, 그림자, 색을 탐구하며 집필한 '색채론'은 훗날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미술사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괴테는 회화 속에서의 색 표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러한 점이 색채론의 토대에 반영이 된 것이다. 이 색채론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괴테와 뉴턴의 색채론'에 의해서 재조명되기도 한다.
더불어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바이마르 시의 토목공사를 계획하고 직접 지휘하기도 했으며 프랑스군과 전쟁을 대비하여 물자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 전투에서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1735~1806)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참모라고 쓰고 기록 서기관이라고 읽는다.'라는 조롱까지 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2.5. 말년
괴테는 83세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이를 늘 서글퍼했다.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실러도 만 45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실러는 귀족이 된지 3년이 채 안 되어 이제 좀 잘살게 되면서 글도 본격적으로 더 쓰고자 하는 한창때에 갑자기 가버린 셈인데, 이 때의 일화로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며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실러는 그 해에 사망했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하루종일 작게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겨울을 싫어했던 괴테는 봄이 채 오기 전에 바깥 나들이를 떠난다. 그러나 날은 아직 추웠고 노쇠할 데로 노쇠한 괴테의 몸은 차가운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괴테는 독한 감기에 걸렸다. 담당 의사는 괴테의 사인을 폐렴과 심부전이라고 기록했다. 괴테의 임종 당시 그의 곁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 옷틸리에 폰 괴테(1796~1872), 손자인 베르터 폰 괴테(1818~1885)와 프라이헤르 폰 괴테(1820~1883), 손녀인 알마 폰 괴테(1827~1844) 이렇게 4명이었다. 괴테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었으며 당연히 재산을 그녀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살아 있을 때에 이미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렸기에 괴테의 80살 생일 때는 고향 마을에서 그날을 경축일로 기리며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괴테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만나러 온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의 손을 잡으면서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 다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
또는 하인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사실은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는 게 유언이란 주장도 있다. 괴테의 임종을 지켰던 하인 하프리드리히 크라우제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괴테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요강을 끌어안고 죽었다고 한다.
더불어 괴테는 침대에 누워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괴테는 침대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기댄 채 유언을 남겼고, 침대로 모시려는 가족들에게 그 자리에서 잠들에 해달라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괴테의 행적을 증명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다. 평생을 쓰던 많은 펜이니 책상이니 무수한 흔적은 200년이 되어간 지금도 엄청 많이 남아있으며 심지어 어릴적 편지에서 어릴적 작문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라든지 일기장 등 무수한 유품들이 넘쳐나서 지금까지도 괴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할 정도로 많은 유품들이 소중히 간직되고 있다. 덕분에 온라인에서 확인되는 이야기 상당수는 잘못 와전된 것이 아니라면, 사실로 증명된 이야기들이다.
이렇듯 일생을 위대한 인물로 살아왔고 개인 소장품까지 유물처럼 남긴 괴테였지만 그의 핏줄만큼은 이어지지 않았다. 괴테의 아들 아우구스트는 로마 여행 도중 40대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트는 아내 옷틸리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괴테는 어려움을 겪었다. 옷틸리에는 괴테 사후에 바이마르를 떠나 빈으로 갔다가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왔지만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고 전해지는데 괴테의 손녀인 알마는 17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고, 두 손자는 할아버지 괴테와는 다르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해 자식이 없는 독신으로 살다 60대에 세상을 떠났다.
2.6. 괴테와 격동의 시대
괴테가 살았던 18세기 중반과 19세기 초반은 그야말로 세계가 격동하는 시대였다. 그가 17살일 무렵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범세계적 전쟁인 7년 전쟁이 벌어졌고 그 여파가 미국 독립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흥망성쇠를 목격했고 후에 이어지는 빈 회의로 인한 유럽의 격변까지 몸소 모두 겪었다. 또한 그의 일생 동안 산업 혁명의 전조가 유럽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륙 간의 연결과 식민지 사업이 완전히 정착한 상태였다. 과학의 발전, 합리주의와 관념론 등등 여러 철학 사조와 개념의 대두, 불가침의 권위가 사라진 종교와 교회 등 괴테는 '절대적 개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태어나 새로운 시각이 점차 열리게 되는 시대를 살았다. 바로 그러한 배경이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문학 운동의 사상적인 토대가 된다. 문학에서의 '질풍노도'라는 개념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괴테의 대표작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괴테의 저작 일생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관념론과 계몽주의적 사상의 연결은 구 시대와 새 시대의 다리에 있던 그의 시대가 문학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이처럼 괴테의 시대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전복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기존의 정서라는 것은 금이 가고 대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괴테는 사회 제도적인 역할로서의 결혼에 대해서도 회의가 있었다. 괴테는 신분, 재산, 나이 등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결혼의 범위'에 전혀 구애를 받지도 않았다. 괴테의 연애 감정은 괴테 본인이 느끼는 사랑과 여성의 아름다움에 의한 것이지 사회적 통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전 연인 관계는 숱하게 많았던 괴테가 한 번의 혼인만 치룬 것도 그런 성향과 무관하지 않았다. 괴테와 연인 크리스티아네의 결혼 또한 순전히 당사자들만의 의지는 아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괴테가 신부를 찾아 결혼하길 종용했고[28]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괴테는 연인 크리스티아네와 아들 아우구스트의 신변에 두려움을 느꼈다. 괴테는 가족이 법적으로도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있길 바랐고 그 책임감이 결혼에 대한 회의도 무르게 하여 크리스티아네와 결혼을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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