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도 대기업의 본사나 벤처기업, 사무 빌딩, 우량 은행들이 밀집해 있는 부자동네 강남구 삼성동은 번쩍이는 높은 빌딩, 잘 정비되어 있는 거리, 그 거리를 오가는 총총걸음의 사람들의 얼굴에도 윤기가 흐른다. 한밤에도 불야성을 이룬 도심, 명문 고교가 모여있는 서울의 8학군인 이곳,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선릉이 있다.
선정릉(또는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선릉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부 서면 학당리로 주변이 논밭이었 으나 개발되어 빌딩이 빼곡히 들어서면서 빌딩 숲 속의 섬처럼 보인다. 강남 특유의 정경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 로 큰 규모로 수백 년 전의 왕릉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선릉
정자각
수복방(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곳) 제향공간(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자각,예감,수복방,수라간,비각 등이 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년(중종 25) 8월 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로 예종 원년(1469) 11월 예종이 승하함에 경복궁에서 즉위하였으니 춘추 13세였다. 세조 대왕비 윤씨가 성종 7년(1476)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하 였고‘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빛나는 문화 정책을 펴나 간 시기였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완성 되었고,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의 편찬을 통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였고,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대외적으로는 압록·두만강의 건주야인(建州野人)과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여 변방을 굳 건히 하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여 민생과 체제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왕비와 후궁의 암 투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아들 연산군이 패륜 임금이 되기도 하였다.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왼쪽 언덕에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 되어 있다.
조선왕릉에는 몇 가지 기본틀에 의해 왕릉을 중심으로 각종 장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석상 좌우의 망주석,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의 문관석인과 석마 그리고 한 단 아래에 무관석인과 석마가 의례적으로 서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 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 원, 묘로 구분하였는데 왕과 왕비는 물론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물론 왕의 자리에 오른 왕의 친부모의 무덤을 `원'이라 했으며, 나머지 왕족의 무덤은 묘라 불렀다. 여기서 추존왕이라 함은 실제로 재위하지 않았으나 자손이 왕위에 올라 왕이나 왕비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능을 포함한다. 추존덕종(성종부), 추존원종(인조부), 추존진종(정조양부), 추존장조(정조부 사도세자),추존 문조(헌종부)는 능으로 조성되어 왕릉에 포함되어 능으로 조성된 경우이다. 반면에 조선왕조 임금 중 제10대 연산군과 제15대 광해군은 왕으로 재위는 했지만 폐위되어 묘로 조성되었기에 왕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현왕후릉 선정릉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맨 먼저 성종대왕릉과 계비 정현왕후릉이 보인다.
성종릉 왼쪽 언덕의 정현왕후릉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성종대왕의 왕릉인 선릉에서 20여 분을 산책로를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정릉(靖陵)이 나온다. 정릉靖陵은 제11대 왕인 성종의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연산군을 폐위시킨 유명한 중종반정의 중종 능이다.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도 정릉(貞陵)이지만 한자가 다르다.
홍살문
중종(1488 ~ 1544)은 성종의 둘째아들로 형인 연산군이 폐위된 후 왕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권력기반이 약했 다.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세력을 끌어들여 개혁을 도모했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이 기득권세력의 강 한 반발에 부딪혀 정치적 혼란만 가중된 채 좌절하고 만다. 문정왕후, 장경왕후, 단경왕후의 권력다툼으로 순탄 치 못한 삶을 살다간 중종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을 점령한 왜군은 정릉을 파헤치고 시신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추후에 유성룡이 사 람을 시켜 능 주위에서 시신을 찾게 하였으나 중종의 시신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생전의 중종을 기억하는 사람들 에게 시신을 확인시켰으나 그들이 말하는 중종과 시신은 달랐다. 결국 중종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묘지의 주인이 불분명한 능인 셈이다.
재실
재실 내부
중종의 왕릉인 정릉(靖陵)에서 제사를 지낼 때 한강물이 재실까지 들어와 배를 타고 제사 준비를 하였다는 기록 으로 보아 현재의 한강과는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잠실 롯데백화점 앞에 있는 석촌호수는 원래는 강줄기 로 한강의 일부였다고 한다.
500년 된 은행나무
아이가 태어나고 청년으로 자라고 늙고 죽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고 수없이 임금이 바뀌고 전쟁도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자리를 지켜온 나무 삶과 역사의 증인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이 큰 어른 같다.
선릉은 답사도 하고 휴식 공간으로도 그만이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일 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 이 나 수리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으나 정비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릉과 정릉을 연결하는 길이 잘 정리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2009년 6월26일 스페인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 위원회에서 조선왕릉(Royal Tombs of theJoseon Dynasty) 40기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확정했다. 조선왕릉은 유교적, 풍수적, 전통 관습을 근간으로 독특한 건축양식과 조경양식은 물론 제례의식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오며 전체적인 통합관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어 우수한 문화적 가치를 지님으로 세계적인 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받았다.
조선왕릉은 단지 왕의 주검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철학과 사상, 제례, 그리고 건축ㆍ토목양식, 미의식,생태관을 총 망라한 문화의 결정체임을 새롭게 인식한다. 왕릉 40기 중 반 이상은 학창시절 주로 소풍장소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제는 가보지 못한 곳도 방문해보고 가 본 곳은 재방문하여 새로운 안목으로 새롭게 살피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