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6월11일 화요일.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제1독서 사도행전 11,21ㄴ-26; 13,1-3
복음 마태오 복음 10,7-13
◈ [서울]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019년 다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안식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작년 8월에 시작했는데 이제 2달 정도
남았습니다. 안식년을 하면서 필요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교구에서
특별한 장소를 지정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입니다. 동창 신부님의 배려로 편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미사 할 수 있고, 식사와 청소도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안식년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3개월은 제주
엠마오 연수원에서 충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동창 신부를 도와서 1달 정도 머물었습니다. 지난 4월에는
안식년을 지내는 다른 신부님들과 남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다음
달에 유럽 성지순례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제가 원해서 이루어진 것도
있고, 동창 신부의 배려와 도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간에는 물리적인 시간과 신학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변화와 생성을 주도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한 달 30일, 1년은 365일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모든 것을 품어줍니다. 제게도
물리적인 시간이 주어졌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꽃은 피었다가 지고,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물리적인 시간과 더불어 춤을 춥니다. 고고학,
유전공학, 생물학은 물리적인 시간의 흔적들을 찾아냅니다. 앞으로
남은 지구의 시간, 태양계의 시간을 계산합니다. 우리의 인식과 상상을
넘어서기는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은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특히 신약성서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충만한 시간,
기회의 시간, 약속의 시간,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을 사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때’가 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는 시간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묶인 이가 해방되고, 갇힌 이가 자유를 얻는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합니다.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천년도 마치 하루와 같은 때입니다. 온 우주가 함께하는
때입니다. ‘Fortune favors the Brave(행운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다.)’
라는 말처럼 행동하는 시간입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해주고, 마귀를
쫓아내며,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 부활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생활은 물리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을 거꾸로 흘러가는 연어처럼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약속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0,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안티오키아 교회를
사목하기도 하였고, 바오로와 함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공동체에
전달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의 파멸이 곧 복음선포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세상은 이제 다른 나라가 오고 있고 그 나라가 자기의
뒤를 이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명하여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꺼려하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니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이들이 되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들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 선물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탐욕을 단죄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9절) 보수를 받지 않는
사도들이기 때문에 돈을 지닐 필요가 없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이처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지니는 것도 금지 되었다.
여행 보따리는 세속 물건에 대한 관심을, 여벌 옷은 이단이나 율법 같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파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한 사람을 찾아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다음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시며 평화를 비는 말과 몸짓으로 표현하라고
하신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 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생명을 줄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망해도 이득인 사랑 장사
2019년 다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망해도 이득인 사랑 장사>
복음: 마태오 10,7-13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는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
환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 주간만 나의 처방을 따른다면 당신은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처방이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남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를 궁리해서 그걸 실천하면 됩니다.”
값비싼 약이나 까다로운 처방을 내릴 것을 기대하고 찾아온 많은
환자들은 대부분 이 싱거운 처방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방을 따른 사람에게는 당장 특효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남을 돕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더니 우울증이
없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은 부메랑이라고 합니다. 반드시 주는 만큼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돌아올 것을 위해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부활이
없었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기쁘려면 기쁘게
해 주어야하고 사랑받으려면 사랑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랑도 원금이 보장되는 장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내가 평화를 빌어주는 사람이 그 평화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그
평화는 소진되지 않고 다시 나에게 돌아옵니다. 사랑은 준만큼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사처럼 이익까지 얹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제자가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음식을
청했을 때 모욕 받고 매 맞으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라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없는 것을 가지게 되니 항상 이익인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투자할 때 원금을 잃지 않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한다고
합니다. 그러려면 투기성 투자보다는 안전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10년은 가지고 있지 않을 주식은 구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갑자기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기다리다보면
꼭 오르고야마는 그런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이 그를
세계에서 가장 투자를 잘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도 반드시 이득을 내는 장사라고 믿으면 누가 사랑에 투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투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손해 보는 일이 없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어주십시오. 결코 손해 보는 일 없이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를 받아들이면 나에겐 평화가
사라질까요? 배로 늘어납니다. 평화를 줄 줄 아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당신 평화로 더 채워주실 것이고 또한 나 때문에 평화를 얻은 사람이
또한 나에게 평화로 보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랑의 투자법은 ‘선교’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성령께서는 내려오시면 우리를 선교의 길로 이끕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누구를 사랑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누구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로 파견
받습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길이 그 기쁜 마음을 유지하고 커가게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100% 수익이 보장되는 가장 안전한 장사입니다. 그 보상은 영원한
사랑이고 영원한 행복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
바르나바 사도!
2019년 다해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 바르나바
사도!
예루살렘에 본산을 두고 있었던 그리스도교 모공동체이자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최초로 정착되기 시작한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큰 관심, 즉 기도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교회는 신생 안티오키아 교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감독 한
명을 임명했는데, 그가 곧 바르나바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며, 바르나바는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용기를 고취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키프로스 출신이고, 직업은 레위계 성직자였습니다.
금수저 가문 출신으로 예루살렘에 금싸라기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용모에 탄탄한 학문, 깊은 신앙 등,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당시의 대세남이었습니다.
원래 바르나바는 열두 사도의 일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두번씩이나 사도라는 호칭으로 기록될만큼, 교우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사도들에게 갖다바쳤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그는 초대교회의 한 멤버로서 날개를 달고 열심히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로부터
홀대받고 의기소침애 있었으며, 곤경 중에 처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르소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습니다. 바르나바는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예루살렘 모교회
공동체와 바오로 사도 사이를 부드럽게 중재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만 1년 동안
의기투합했습니다. 두분의 합심 결과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신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회 공동체
조직도 안정되고 강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르나바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첫번째 해외 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되었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바오로 라는 큰 인재를 알아봤고 지지한 것이 아닐까요? 바르나바
사도는 지금은 비록 곤경 중에 처해 있지만, 바오로야 말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서 적임자임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갔고, 용기를 불어넣고 격려했으며, 일으켜 세웠습니다.
또한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유다 세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문호가 활짝 개방될 수 있도록 바오로 사도와 함께 완고했던
예루살렘 모 교회 공동체를 설득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이 모든 일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착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1일 화.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거저 받은 새날입니다.
거저 받은 공짜의 생명입니다.
공짜로 받은 물과 햇빛입니다.
우리를 위해 거저 주시고 거저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결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거저 받은 것이기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저 받은 것이기에
우리또한 거저 주어야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실은 두고 떠나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욕심을 허무시듯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주고받는 모든 관계안에 거저 주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나눔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거저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거저 주어야 할 사랑과 용서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6월11일(화) 구원자 예수
오늘은 ‘구원자 예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46절 말씀에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요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또
오실 예수님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막은 3500년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이 땅의 오실 예수님의 정확한 모형입니다.
어떤 학자는 “구약의 장막을 확대해 놓은 것이 신약의 예수요, 예수의
생애를 축소시킨 것이 신약의 성막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의 모든 성물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을 담고 있으며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사명으로 직접 연결되고 있는 복음입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이며 복음도 예수이고 교회의 머리도 예수이고
장막도 예수에 관한 것입니다. 성막은 죄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양의 가죽, 복음 다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모형과 그림자 복음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받을 이름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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