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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잇사갈, 스블론, 르우벤 지휘관의 헌물
민 7:12-35
12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13 그의 헌물은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14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15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16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17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의 헌물이었더라
18 둘째 날에는 잇사갈의 지휘관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헌물을 드렸으니
19 그가 드린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20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그것에는 향을 채웠고
21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22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23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의 헌물이었더라
24 셋째 날에는 스불론 자손의 지휘관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헌물을 드렸으니
25 그의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26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27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28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29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의 헌물이었더라
30 넷째 날에는 르우벤 자손의 지휘관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헌물을 드렸으니
31 그의 헌물도 성소의 세겔로 백삼십 세겔 무게의 은 쟁반 하나와 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32 또 열 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33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한 마리이며
34 속죄제물로 숫염소 한 마리이며
35 화목제물로 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라 이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의 헌물이었더라
민 7:12-35 / 그러자 각 지파 우두머리들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제단 앞에 봉헌예물을 바쳤다. 첫째 날은 유다 지파의 우두머리인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예물을 바쳤다. 13) 그가 바친 예물은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쟁반 한 개와 70세겔 나가는 은바리 한 개였다. 그는 이 두 그릇에 곡식제물로 기름을 섞은 고운 가루를 가득 채워 바쳤다. 14) 또 10세겔 나가는 금잔 한 개에 향을 가득 채워 바쳤다. 15) 또한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바쳤고 16) 속죄제물로는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으며 17) 화목제물로는 수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를 바쳤다. 이상이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바친 예물이다. 18) 둘째 날에는 잇사갈 지파의 우두머리인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예물을 바쳤다. 19) 그가 드린 예물도 마찬가지로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쟁반 한 개와 70세겔 나가는 은바리 한 개였다. 그도 이 두 그릇에 곡식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가득 채워 바쳤다. 20) 또 10세겔 나가는 금잔 한개에 향을 가득 채워 바쳤다. 21) 그리고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바쳤고 22) 속죄제물로는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으며 23) 화목제물로는 수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를 예물로 바쳤다. 이상이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바친 예물이다. 24) 셋째 날에는 스불론 지파의 우두머리인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예물을 바쳤다. 25) 그가 바친 예물도 마찬가지로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쟁반 한 개와 70세겔 나가는 은바리 한 개였다. 그도 이 두 그릇에 곡식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가득 채워 바쳤다. 26) 또 10세겔 나가는 금잔 한 개에 향을 가득 채워 바쳤다. 27) 또한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바쳤고 28) 속죄제물로는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으며 29) 화목제물로는 수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를 바쳤다. 이상이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바친 예물이다. 30) 넷째 날에는 르우벤 지파의 우두머리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예물을 바쳤다. 31) 그가 바친 예물도 마찬가지로 성소에서 쓰는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쟁반 한 개와 70세겔 나가는 은바리 한 개였다. 그도 이 두 그릇에 곡식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가득 채워 바쳤다. 32) 또 10세겔 나가는 금잔 한 개에 향을 가득 채워 바쳤다. 33) 또한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바쳤고 34) 속죄제물로는 숫염소 한 마리를 바쳤으며 35) 화목제물로는 수소 두 마리와 숫양 다섯 마리와 숫염소 다섯 마리와 일년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를 바쳤다. 이상이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바친 예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에 따라 먼저 유다, 잇사갈, 스불론, 르우벤 지파의 순서대로 각 지파의 지휘관들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날에 예물을 드린 자(12-17) 먼저 유다 지파의 지휘관 나손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물은 130세겔의 은 쟁반 1개와 70세겔의 은 대접 1개를 드렸으며, 그것에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소제물로 드렸습니다. 또한 13세겔의 금 그릇 1개에 향을 채워 드렸습니다. 번제물로 수송아지 1마리와 숫양 1마리와 어린 숫양 1마리, 속죄제물로 숫염소 1마리, 화목제물로 소 2마리와 숫양 5마리와 숫염소 5마리와 어린 숫양 5마리를 드렸습니다.
둘째 날에 예물을 드린 자(18-23) 잇사갈 지파의 지휘관 느다넬은 첫째 날에 먼저 예물을 드렸던 유다 지파와 동일하게 드렸습니다. 본문의 네 지파가 모두 똑같게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거나 아니면 지파들이 함께 모여 결정하여 드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같은 마음으로 헌신했습니다.
셋째 날에 예물을 드린 자(24-29) 비록 지파가 다르고, 드리는 사람이 다를지라도 셋째 날에 스불론 지파의 지휘관 엘리압은 앞에서 드린 유다와 잇사갈 지파와 동일한 것을 드렸습니다. 같은 내용이 반복하여 기록된 것을 볼 때 지루하고 신선함이 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물을 드린 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이름과 예물의 내용이 세세하게 기록된 것은 감격이며, 영광입니다.
넷째 날에 예물을 드린 자(30-35) 넷째 날에는 르우벤 지파의 지휘관 엘리술이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앞서 드린 세 지파와 동일합니다. 르우벤은 혈통적으로 보면 야곱의 첫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 잇사갈 지파, 스불론 지파에 이어 넷째 날에 예물을 드렸음에도 불평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순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의 시계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은 공동체의 결정을 존중하고, 예물을 드리는 순서에서도 질서를 잘 지키며 헌신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제,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비옥한 땅을 가진 한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자신의 논 주변을 굽이쳐 흐르는 수로의 물을 쳐다보던 농부는 물이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 갑자기 아깝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흐르는 수로를 막아 물이 다른 논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벼들이 모두 말라 죽게 생겨버린 사람들은 농부를 찾아가 수로를 열어달라고 사정해 보고 화를 내기도 해보았지만, 농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저 물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농부의 논에 흐르지 못하고 지나치게 많이 고여 있던 물이 썩어버렸고 벼들도 시들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욕심 때문에 농부는 큰 손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 설 교 >
예물(예배)의 정신
민수기 7장 12-89절 / 이한규 목사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도 물론 영이십니다. 이 말은 같은 밥을 먹어도 밥 자체 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의미도 함께 알고 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소나 돼지 등 가축은 어느 그릇에 밥을 주어도 배만 부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도 다르십니다. 여러분이 따님 집에 모처럼 만에 방문 하였는데 개밥 그릇 같은 것에 찬밥을 국도 끓이지 않고 신 김치 하나 달랑 주고 먹으라 하면 아마 다음에는 따님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차리고 그 길로 집을 나올 것입니다. 지난주 오후에 저희 교회에서 KPCA 필라 노회 제 19차 가을 노회가 있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에서 세미나가 있었을 때도 점심식사를 아주 잘 준비하여 주셔서 오신 분들이 잘 드시고 공부에 열중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임직 피택자 분들과 여전도회가 잘 준비하여 대접을 정성껏 하였습니다. 멀리서 오신 사무총장 목사님은 크게 좋아 하시고 기뻐하시면서 음식 뿐 아니라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함께 먹었다고 하시며 오랜만에 대접 받은 마음이 들었다고 흡족해 하셨고 오셨던 모든 목사님들과 같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저녁 한 끼 대접한 식사에도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각 지파를 대표하는 12명의 족장들이 12일간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1. 자원하여 드리는 것
단순한 사건에 대한 반복 기사만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그 예물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에 암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열두 족장의 이름을 나열 한 후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각각 드렸노라 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하나하나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깊음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반복기록하고 있습니까? “아파” “힘들다”“죽겠다!” 우리는 주로 이런 것들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이렇게 “나는 드렸어” “기쁜 마음으로 바쳤어” 베풀었고, 나누었고, 사랑했고, 희생했고, 대접했고 감사 했고, “기뻐했다“ 이렇게 반복 기사를 쓰시면서 사시기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계속하여 드라는 것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베풀어 본 사란이 더 베풀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 만큼 여유가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자 베푸는 자는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렇게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일생 사는 동안에 남의 도움만 받고 산다면 인생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주고 베풀어 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베푸는 교회였습니다. 배푼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푼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을 믿음으로 드리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물로 나아오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장성하여 돈을 버는 자녀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챙겨드립니다. 많은 액수가아니더라도 경제 능력이 없는 무모님들은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귀하게 여기며 뿌듯하게 여깁니다. 이유인즉 그러므로서 부모로 인정받는 다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맛있는 사탕 한 개를 손자에게 주어 빨아 먹게 하고는 봉지는 등 뒤로 숨기고 손자에게 그 입에 있는 사탕 한번 만 달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사탕이 없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손자와 함께 하는 소통이고 교감입니다. 만약 사탕을 할머니에게 준다면 할머니는 봉지째 손자에게 줄 것입니다.
결론 :
예물드림에는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로 손님을 대접하듯 하나님께 드림의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풍성함으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 그런즉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유다, 잇사갈, 스블론, 르우벤 지휘관의 헌물
민 7:12-35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19~21). 이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많이 들었고, 재물과 관련된 구절로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 아는 말씀이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임에도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뒷걸음질 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헌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헌금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아쉽게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강압적이거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했던 헌금, 헌금한 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일,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선한 일로 나를 선대 할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경험이 있다면 헌금이라는 부담을 굳이 짊어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랬고,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안 좋은 경험과 상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느낌이 우리를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이 쓴 편지를 보면 후원과 헌금에 관한 감사 혹은 독촉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뜻을 전달했으며(행 20:27), 바울을 신뢰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줌으로써 주께서 하시는 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우리가 헌금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세상이나 교회에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헌금하는 마음의 순서를 우리는 뒤바꿔야 합니다.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거라는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기에 헌금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을 펼처 헌금하는 장면을 찾아보십시오.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신 은혜 앞에서 감사의 예물을 올려 드립니다. 그 누구도 내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니 나에게 복을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헌금은 강요나 억압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고후 9:7).
성막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법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인구 조사를 하고, 성막을 중심으로 진영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막을 맡아 하나님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행진할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마무리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휘관들에게 예물을 바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요구를 하신 걸까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으니 정확히 알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해보면 하나님은 진영 배치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치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지 확인해 보신 듯합니다. 누구는 앞에서고, 누구는 뒤에서고, 누구는 덜 힘들고, 누구는 더 힘들다면 불평과 불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12지파가 모두 똑같은 예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일치를 확인합니다.
영적 장자인 유다 지파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모두 똑같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130세겔 무게의 은 쟁반 하나와 70세겔 무게의 은 바리(대접, 대야) 하나이며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우고, 10세겔 무게의 금 그릇 하나에는 향을 채워야 했습니다. 번제물로는 수송아지, 숫양, 1년 된 어린 숫양 하나씩이며, 속죄제물은 숫염소 한 마리, 화목제물로는 수 두 마리와 숫양, 숫염소, 1년 된 어린 숫양 다섯 마리씩 준비해야 했습니다. 드린 예물을 모두 합치면 소제물의 밀가루가 채워진 은쟁반이 12개, 밀가루가 채워진 은바리(대접)가 12개, 향품을 채운 금 그릇 12개, 번제를 위한 수소 12마리, 숫양 12마리, 1년 된 숫양 12마리. 속죄제를 위한 숫염소 12마리. 화목제를 위한 소 24마리, 숫양 60마리, 숫염소 60마리, 1년된 숫 양 60마리입니다.
적지 않은 양의 은과 금, 그리고 제사물로 사용된 동물들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성막을 세우는데 이미 상당한 양의 제물이 사용되었으므로 이스라엘 각 지파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또 예물을 드린다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많은 재물을 소유할 필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와 때에 따라 주시는 메추리기와 물이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광야에서 은과 금 그리고 동물이 무슨 소용일까요? 광야에서는 주님만이 나의 도움, 나의 요새, 나의 반석, 나의 산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헌금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큰 부자로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셔서 하나님의 인도함 속에 살게 하실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재물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 마시고, 주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기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헌신하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도 각 사람의 예배를 받으신다
민 7:12-89 / 조용호 목사
◈ 주 해
1. 민수기 7장은 열두 지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내용이다.
1) 1-9절은 열두 지파의 지도자가 성막에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위해 예물을 바친다.
2) 10-89절은 열두 지파의 지도자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단을 위해 예물을 바친다.
3) 예물을 바치는 지파의 순서는 2장에 나오는 진영의 배치 순서와 일치한다.
2. 각 지파의 지도자가 제단에 바치는 예물은 다음과 같다.
1) 성소의 세겔로 130세겔 나가는 은잔 하나와 70세겔 나가는 은종지 하나.
2) 향을 담은 그릇으로써 10세겔의 금그릇 하나
3) 기름으로 반죽한 밀가루를 은잔과 은종지에 가득 담아 드리는 소제물.
4) 수소 한 마리와 수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수양으로 드리는 번제물.
5) 수염소 한 마리로 드리는 속죄제물.
7) 수소 두 마리, 수양 다섯 마리, 수염소 새끼 다섯 마리, 일 년 된 어린 수양 다섯 마리로 드리는 화목제물.
3. 12지파의 지도자가 드리는 예물은 완전히 같다.
1) 열두 지파가 12일 동안 드린 제물의 총합이 84-88절에 다시 언급된다.
2) 위에서 한 지파의 지도자가 드린 예물에 12배가 총합이다.
4. 이렇게 하나님은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 드린 예물을 13번 동일하게 기록한다.
1) 12지파가 드리는 예물이 완전히 동일하기에 묵상 본문에도 11번은 ‘중략’ 처리했다.
2) 지도자들이 드린 예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0-83절은 생략하고 84-88절이면 충분하다.
5. 성경에는 “이하동문”으로 처리하면 되는데 굳이 반복하여 기록하는 일이 종종 있다.
1) 그리고 반복하여 기록하는 대표적인 성경이 바로 “민수기”다.
- 민수기 1-7장까지의 반복만 살펴봐도 다음과 같다.
2) 민수기 1-2장의 전쟁에 나가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계수도 12번이 반복된다.
3) 이스라엘의 진영배치도 간단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 동서남북으로 4번 반복된다(민 2: 3-31).
4) 레위지파의 인구조사도 간단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 게르손, 고핫, 므라리 자손을 각각 기록하여 3번이 반복된다(민 3: 21-37).
- 회막 봉사자 수도 3번 반복된다(민 4: 34-45).
5) 민수기 4장의 레위 가문의 임무도 간단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 33절로 길게 기록한다.
6. 이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가장 많이 반복되는 곳이 바로 7장이다.
1) 12지파의 지도자들이 성막을 섬길 레위인을 위해 드린 헌물은 3절 한절로 기록되었다.
민 7: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
2) 번제단을 위한 봉헌물을 동일한 방식으로 기록한다면 10-83절은 생략하고 84-88절만 기록하면 된다.
3) 성경 말씀 74절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이렇게 길게 반복하신 이유가 있다.
4) 고대시대에는 인쇄술이 없기에 성경을 손으로 필사하였다.
- 그것도 오늘날 같은 볼펜과 종이가 아니라,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하였다.
- 성경을 필사하는 자들은 10-83절을 생략하고 싶지 않았을까?
7. 성경이 같은 내용을 반복할 때, 민수기 10-83절의 반복이 말씀하는 바는 하나님은 각 사람의 예배와 예물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1) 1000명이 모여서 같은 찬양을 고백한다고 하면, 우리는 10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라고 말한다.
- 그러나 천사는 1000번의 예배를 기록하여 하나님께 보고할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떤 찬양을 어떻게 찬양하였는지를 개별적으로 기록하여 하나님께 보고했을 것이다.
2) 이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면서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
- 주일에 수 억명이 예배를 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의 예배를 개별로 받으신다.
- 또한 100명이 예배를 드려도, 나 한사람이 예배하지 않고 그저 참석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이 예배하지 않았다고 기록될 것이다.
8. 구원받는 자들 사이에 있다고 나도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배하는 자들 사이에 있다고 나의 예배도 자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1) 우리 각 사람이 드리는 예배, 봉사, 헌금, 찬양, 기도, 나눔은 각 사람별로 하나님이 보시고 받으신다.
2) 예배 모임에 참석했다고 예배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자만 예배한 것이다.
- 사람들은 모른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를 모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예배하였는지, 종교행사를 한 것인지 다 아시고 보시고 기록하신다.
9. 민수기 7장이 12지파의 지도자들이 드린 헌물을 각각 기록한 이유는 12지도자가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을 드렸기 때문이다.
1) 이렇게 모든 지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자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다.
2) 그래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 말하려 할 때,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민 7:8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10.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임하셨을지는 레위기에서 추측할 수 있다.
1) 레위기 9장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제단에 제물이 모두 봉헌되었을 때 모세와 아론이 성막에 들어갔다.
레 9: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9: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2) 하나님께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처음 드리자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다.
11. 10-83절은 각 지도자들이 드린 헌물을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받았음을 나타낸다.
1) 그리고 89절은 각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드림을 기뻐했음을 나타낸다.
2) 하나님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헌물을 드렸을 때, 그 지도자에게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3)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물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공동체에 나타내 주셨다.
4) 100여명이 예배하는데, 50명은 예배하고, 50명은 종교행사를 한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에 영광으로 나타나시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예배는 모든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다.
5) 그러므로 개별적인 예배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12. 민수기 7:89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봉헌물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1) 레위기 9장에 근거하면,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헌물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축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을 것이다.
민 6: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13. 민수기 7장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물을 드리며 예배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1) 우리 각 사람은 예배모임에 참여하여서 “나의 예배와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2) 그리고 동시에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3) 그럴 때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시며, 복을 주신다.
- 아버지를 가장 기쁘게 하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사랑을 주고 선물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4) 물론 레위기 9장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14. 성막에서 믿음으로 드린 예물을 하나님이 이렇게 기쁘게 받으셨다면,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드려진 아들 때문에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1) 아들이 드린 완전한 제사로 인하여 우리는 단번에 거룩하게 되었다(완료형).
2)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거룩하게 되어(현재형), 온전함에 이른다.
3)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예수께서는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히 9:12). 그로 인하여 아들을 통하여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되신다.
4) 그러므로 아들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하게 하시며 그를 위하여 항상 살아서 기도하신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도우신다.
5) 아들을 힘입어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들을 힘입이 공동체적으로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
◈ 나의 묵상
말씀이 드러내는 비참한 존재
나는 삯꾼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 말씀은 내가 삯꾼임을 다시 고발한다. 나는 99마리의 양을 두고 1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가 아니다. 99명의 성도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1명의 성도를 내버려둔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바라보시는데, 나는 숫자로 성도들을 대하고, 교회를 대하는 버릇이 생겼다. 1명이 예배에 참석하면 마음이 상한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 생명을 흘려보내려고 하지 않는다. 목자는 양을 사랑한다.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참 목자다. 나는 왜 주어진 양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더 많은 양들을 보내 달라고 할까? 여전히 보란듯한 목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양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기도해 주지 못하고, 체휼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것을 회개해야 하는데 말이다. 1마리의 양에게 꼴을 먹이는 목자보다는 많은 양들을 돌보는 삯꾼이 되고 싶어 한다. 나를 부르신 목자 예수님 앞에 할 말이 없다. 주님이 나 한 사람을 향해 흘리신 그 보혈과 나 한 사람을 향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은 무궁하다.
2. 복음이 생명을 조명하다(구속의 은총으로 아버지 품에 안기다).
삯꾼을 목자로 세울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다. 삯꾼에게 그만두라고 하는 대신에 신실한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대해 주신다. 목자의 본을 보여 주신다. 사망에 있는 나를 용납하시고, 배신하는 나를 인자함으로 대하시고, 무정한 나를 긍휼히 대하신다. 기꺼이 길 잃은 내 영혼을 찾아와 주시는 참된 목자이시다. 나에게 실망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고 정죄하지도 않으신다. “아버지 용호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해 주신다. 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긍휼하심을 입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좌로 데려가 주신다. 그 사랑이 내 영혼을 삼킬 때까지 그 사랑을 받아 먹는다. 주님의 긍휼이 나의 완악함을 삼킬 때까지 그 긍휼하심을 받아들인다. 주님의 부활이 내 사망을 삼킬 때까지 그 부활이 내 안에 있음을 선포한다. 내 안에 사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견딜 수 없는 나에게 위로와 사랑을 주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씩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 그 사랑이 자아추구를 이기고 그 생명이 자기를 부인하게 하시기까지 성실하게 일하실 주님을 기대한다. 오늘도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아들로 인하여 은혜의 영광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어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를 찬양한다.
◈ 묵상 기도
끝까지 저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저를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감사합니다. 끝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옵소서. 내 안에 예수생명 있음을 환하게 알게 하옵소서. 그 생명의 능력이 저절로 자아를 부정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옵소서. 주님,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사망을 삼키는 부활생명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좁은 길을 담대히 갈 수 있도록 담대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또 다시 위로를 찾아 헤매던 자가 주의 사랑안에서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속한 기쁨과 평강으로 제 영혼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다음세대와 함께하는 한밤의 기도회가 있습니다. 다음세대가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 주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의 능력
민 14:26-35 / 박용규목사(가창교회)
탈무드에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시몬이라는 광대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을 구해오게 하고 요한이라는 광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얼마 후 두 광대가 돌아와 각각 그들이 담아가지고 온 상자를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시몬의 상자를 여니까 사람의 혀가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요한의 상처를 여니까 역시 사람의 혀가 나왔습니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혀 곧 말이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고 가장 해를 끼치는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귀는 두 개를 만드시고, 입은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두 귀는 언제나 그 문이 열려 있습니다.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많이 듣고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인 입술은 혀를 깊숙히 숨겨두고 이로서 벽을 두고 그 앞에 입술로 문을 닫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을 많이 하면 손해보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장 8절은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사람의 말은 배의 작은 키에 비유됩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방향을 조정하듯이 사람의 말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로 천냥 빛을 갚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이 바로 축복의 말이 되기도 하고 저주의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고 그 인격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주지 않은 권세, 말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말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말을 합니다. 남자는 하루 평균 이만오천 개 정도의 만어를 사용하고 여자들은 삼만 단어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일년 동안 자신이 사용한 말을 책으로 펴낸다면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132권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일평생에 말하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13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까?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담고 있으며 말의 깊이는 그 사람의 경건의 깊이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말은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세워주며 축복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에 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의 말로 자신을 파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파괴시킵니다. 창세기 18장 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를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합니다.
2018년 새해는 저와 여러분들의 말이 죽음의 말이 아니라 생명의 언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탐지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여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모두 진멸하려고 했으나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20세 이상 남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들어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1) 원망과 불평의 말을 제거하라. (27, 28절)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오래 교회를 다녔던 성도들은 대부분 가나안 땅을 탐지했던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이 긍정적 보고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는 해석과, 따라서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긍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말대로 축복하신다는 적용을 너무 쉽게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 없이 긍정적인 말, 긍정의 힘을 갖고 살면 모두가 잘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긍정적으로 살라는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이라는 틀 속에서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신가?“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 “여호와게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 14:8-9) 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긍정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10명의 정탐꾼들은 왜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까? 그들은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들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백성이 어느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1)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때 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27,28절)
여기서 “원망”이라는 말의 뜻은 ‘불평하다’, ‘반역하다’, ‘하나님을 거스린다’는 뜻에 해당합니다. 왜 원망이 생깁니까? 자신이 기대했던 것처럼 되어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환경에 있었습니까?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적으로 출애굽을 했으며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을 나타내시고 반석에 물을 내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니므이 은혜를 잊어버린 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던 하나님의 은헤를 기억했었더라면 원망과 불평의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103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모든 인간들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미화시키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하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과거 애굽에 있을 때 먹었던 오이, 부추, 파, 마늘 등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때 원망과 불평의 말은 계속됩니다. 성경은 원망의 말을 무서운 죄로 규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일 많이 범한 죄가 원망의 말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듣고 계시며 하나님의 귀에 들린대로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원망의 말은 하나님의 듯을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에 축복하고 격려하며 영혼을 세워주고 살리는 말을 할지언정, 말로 무너뜨리는 원망과 불평의 말은 여러분의 입술에서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말을 할지언정, 불신앙의 말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언어의 습관이 곧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모든 사람의 배후에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말이 있습니다. 새해에 변화되고 싶습니까? 가정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입술에 원망과 불평의 말을 제거하시고 감사와 축복과 기적의 말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망의 말을 가장 많이 하는 대상이 부부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보! 우리 기도합시다.”하기보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령, 남편이 회사일로 늦으면 ‘얼마나 회사에 업무가 많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보! 지금 지금이 몇시에요? 뭐하다가 이제 왔어요?”합니다. 밥도 안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늦게 오니까 얼마나 원망이 되겠습니까? 원래 모든 남자들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자기가 배부르면 그냥 자자고 합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당신 저녁 먹었어?”하는 남편은 훌륭한 남편입니다. 아내는 먹고 잘까, 그냥 잘까 하는데 “뭐하고 있어 일찍 자자니까”하면서 강제로 아내를 옆에 눕혀 놓으니 아내는 배가 고픈데 잠이 옵니까? 그러면 남편은 “왜 아직 안자, 고민 있어?”하면서 속사정도 모르고 자기 하고싶은 말만 다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참고 오셨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고 때로는 미숙한 점이 있더라고 서로 사랑으로 축복하고 격려해주십시오. 원망, 불평의 말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함께 하실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입술의 말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35절)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막아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출 19:5-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말슴하십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했을 때 용서해주시고 다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의 말에 대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라고 할 때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성품을 나타냅니다. ‘여호와’라는 고유명사 앞에 1인칭 대명서 ‘나’가 사용된 것은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청중에게”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여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모입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언약을 맺으셔서 하나님 백성 삼으신 목적과 상반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는데, 무엇을 위해서 모였느냐?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기 위해서 모였던 자들이었고 그들을 향해 “이 악한 온 회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에 말한 대로 축복하시기도 하시며 심판하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굉장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치 작은 불꽃이 나무를 태우고 숲을 태우기도 하듯이, 인생을 파괴시키기도 하고 축복할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 그동안 땀흘려 쌓아놓은 축복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 속에 여러가지 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 속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소리만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바꾸심으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바벨탑을 쌓은 인류를 흩으셨습니까? 그들이 하나가 되어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의 언어가 분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 모인 열방의 사람들에게 한 언어로 소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4)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입술의 모든 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미래에 죽고 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성도여러분!
말에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이 축복의 말이든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말이든 언제나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언어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의 말, 비판적이고 정죄하는 말, 거짓된 정보를 진짜인 것 처럼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말, 습관적으로 거짓된 정보를 흘리는 자들은 반드시 그 말이 자신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사단은 언제나 성도들의 거짓된 말을 통해서 교회를 무너뜨려고 합니다. 책임질 수 없는 말, 팩트가 없는 확인되지 않은 말, 소위 ‘카더라’는 말로 인해서 많은 영혼을 실족시키며 다른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는 무서운 범죄를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물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말은 능력이 있어서 그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말, 축복의 말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그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선하고 축복된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채워질 때 믿음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골 3:16-19).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바꾸심으로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는 말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된 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8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원망, 불평의 말보다 축복하고 격려하며 사람을 세우는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통해서 행복이 창조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 길은 하나님 임재 보여주는 순종 훈련처입니다
민 9:15-23 / 최효식 목사(목동영성교회)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민 9: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불러내어 광야 길을 가게 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지나간 자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자기 계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광야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출애굽의 역사, 광야 길의 역사는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는 여전히 살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그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광야 길은 신약시대로 말하면 광야교회입니다. 광야는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조금의 불편함 때문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아직도 그 정신이 애굽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또, 광야는 외부의 적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위험이 있습니다.
첫째, 광야 길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히 보여주는 곳입니다
본문 15~16절을 보면,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라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어 봉헌하는 일이 출애굽기 39장과 40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이 성막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성막 봉헌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고 있다면, 민수기의 기록은 그 성막이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지만 지금 자신들이 왜 광야 길을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합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월절을 그 정한 기일에 지키게 하라”(민 9:1, 2)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목숨과 연관됩니다. 애굽에서 경험한 유월절은 가정마다 장자의 생명을 앗아간 두려움의 날입니다. 적들에게는 슬픔과 애통과 고통의 날이지만,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을 보전한 은혜의 날입니다. 그러기에 이 유월절은 애굽과 공유할 수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만 지킬 수 있는 기쁨과 감사의 절기요, 제사입니다.
일단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이 절기를 지키게 하였으니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불평이 생깁니다. 광야에서는 농사를 할 수 없습니다. 목축도 불가능합니다. 일단 먹을 것이 없습니다. 피난 나올 때 가져온 식량으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습니다. 배고픔과 굶주림의 불평은 본능 중에서도 가장 간절한 불평입니다. 이들의 앞길은 참으로 막막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두 달 보름만에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는 이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그날의 식량을 주신 것입니다. 매일 만나를 주신다는 뜻은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심으로 굶어 죽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되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가 있는 성막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광야 길에서 성막은 단순한 천막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과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법궤와 함께 계신 하나님, 성막에 머무르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곳입니다
18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은 신약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불러내셨다는 뜻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신 것이 바로 ‘교회’,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무리들’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광야의 길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걸어가는 백성들입니다. 40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내 주셔서 영적인 가나안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광야의 삶에서 반드시 따라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18절에서 23절까지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는데 바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입니다. 이 문장이 무려 8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것은 명령을 따라가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라는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가혹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몇 주면 들어갈 수 있는 거리의 가나안을 지천에 두고 하나님은 계속 머무르기만 합니다. 그러다 움직이는데, 이번에도 가나안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 이동합니다.
기록을 보면 38년 동안 무려 41번 진을 옮깁니다. 그 사이에 늙은이들은 죽고, 몸이 약한 이들도 병들어 죽습니다. 애굽처럼 물자가 풍성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진을 옮긴 것입니다. 이 모습을 22절에서 묘사합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순전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 광야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200만명입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이동하는데 그 말씀대로 따라가더라는 것입니다. 200만명이 진치고 있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광야교회는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 길처럼 편안한 요소보다 위험한 일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때 광야를 지나가는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 생각대로 하면 길이 있다가도 없어지고, 주의 말씀을 따르면 없던 길도 만들어지는 줄로 믿고 그 명령을 따라가는 것이 답입니다.
요즘은 선생들도 많고,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옳습니다. 우리는 변치 않는 말씀만 의지해 가야 합니다. 말씀을 나침반 삼고, 말씀을 깃발 삼고 가야 합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 개혁교회 성도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셋째, 광야 길은 직임대로 순종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본문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23절에서도 “명령을 따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것은 광야 길에서 명령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반영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광야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른 길일 수 있습니다. 내게는 거스르는 시기나 방법이라 하더라도 내 생각을 꺾고 순종하는 길이 광야에서 이기는 길입니다.
결국, 이 광야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는 것이 구약을 관통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본디 하나님과 어긋나게 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말씀을 주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이 직임은 민수기 7장 7~9절에서 게르손, 므라리, 고핫의 자손들에게 준 직임들입니다. 성막에서 할 일들을 분업하여 맡겨주신 것들입니다. 각자에게 부여된 이 직임들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의 명대로 그 직임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7장 9~10절에서는 이렇게 약속합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이 시대에 한국교회를 섬기는 우리에게도 주어진 직임이 있습니다. 각각 부르시고 맡기진 달란트에 따라 그 직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직임을 다하는 일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더욱 새롭게 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직임을 다하는 충성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