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밤의 기온이 점차 내려가 이슬이 맺는 한계점인 결로점(結露点)에 이르러 대기 중에 수증기가 응집되어 이슬이 풀잎이나 물체에 맺힌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 백로(白露)이다. 다시 말하면 ‘밤 기온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히면서 가을 기운을 완연하게 느끼는 시기’이다. 이 백로는 24절기 중에 열다섯 번째로서 음력으로 8월의 절기에 들기 때문에 양력으로는 9월 8일이나 9일 경이며, 이날 태양의 황도는 165도에 위치한다.
무더운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이 오는 길목인 백로 무렵에 계절의 변화는 사람만의 느낌이 아닌가 보다. 미물에 지나지 않는 새들도 계절의 변화를 귀신이 곡할 정도로 꿰뚫고 있음이 분명하다. 새들의 행동 양태를 자세히 살핀 결과 북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여름을 보낸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며, 모든 새들이 먹이를 저장하여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한다고 일갈하고 있다.
그 옛날 중국에서는 백로의 입기일부터 추분까지 보름 동안을 닷새씩 3후로 구분해 자연현상의 변화를 이렇게 이르고 있다. 초후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에는 모든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했다.
우리의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추석이 들어있는 계절로서 대체적으로 장마가 물러가고 중후와 말후쯤이 되면 쾌청한 날씨가 이어져 모든 곡식이 옹골지게 여문다. 특히 조석으로는 다소 서늘한 가운이 감돌아도 한 낮에는 초가을의 노염(老炎)*이 내려 쬐면서 일조량이 많아져 벼의 순조로운 등숙(登熟)을 촉진하는가 하면 밭작물과 갖가지 과일을 충실하게 영글게 하는 한편 맛을 더욱 좋게 영향을 미친다. 물론 흔치 않은 경우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 무렵에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하는 조냉현상(早冷現狀)이 나타나 농작물의 성장이나 결실에 해를 끼쳐 소출이 대폭적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런가하면 뒤늦은 태풍(대표적인 예가 1959년 9월 15∼18일 우리나라의 중남부를 통과하며 가공할 정도의 막심한 피해를 입혔던 사라호 태풍(Typhoon Sara)임)이 몰려올 경우 거의 다 지어 놓은 농사를 하루 이침에 몽땅 망치는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절기마다 나름대로 피하고픈 일이나 세시에 맞는 습속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백로에 전해지는 내용은 어떤 것이 있을까. 거의가 벼농사에 대한 내용으로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먼저 곡창 지대인 전남 지방에서는 백로 전에 서리가 내리면 시절이 좋지 않다고 여겼으며, 벼의 경우는 늦어도 백로 전에 출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충남 지역에서는 늦게 모내기를 한 벼의 경우 백로 이전에 출수해야 먹을 수 있으며, 백로 이후에 출수하면 먹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한편 제주에서는 ‘백로 전에 출수하지 못한 벼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이라고 하고, 이 경우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백로 전에 서리가 내리면 농작물이 말라 죽는다고 믿었다. 그런가하면 경남에서는 백로 전에 출수한 벼는 잘 영글지만, 그 이후에 출수한 것은 제대로 여물지 못해 쭉정이가 된다고 여겼다. 아울러 백로에 벼 이삭의 상태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예로부터 백로가 지나면서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하면서, 잠시 쉬는 모양새가 계속된다. 이런 느슨한 틈새의 쓰임새를 유용하게 활용하여 평소에 일 때문에 문안드리지 못했던 어른들을 찾아뵙거나 오랫동안 친정 나들이를 하지 못했던 며느리에게 친정에 가서 낳아 주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근친(覲親)을 보내는 풍습도 있었다.
‘흰 이슬’이 내리는 절기인 백로에 행하거나 기원했던 풍습이다. 먼저 ‘이슬을 먹는 습속’이다. ‘백로에 콩잎 위에 내린 이슬을 새벽에 손으로 훑어 먹으면 속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한편 모든 과일은 제철이 따로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백로를 대표하는 과일은 포도이다. 그런데 포도는 자고로 ‘다산의 상징’하는 과일로 치부했다. 이런 연유에서 옛날에는 매년 첫물의 포도를 따면 먼저 사당에 고하고, 먼저 맏며느리에게 한 송이를 먹였다고 한다. 이는 포도송이처럼 자식을 주렁주렁 출산하라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데서 유래한 습속이다. 그리고 옛 선인들 중에는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는 ‘백로에서 추석까지’가 포도의 계절임을 암시하는 글귀이다.
곧이곧대로 사전적인 해석을 하면 백로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흰 이슬’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이슬의 아름다움’을 서정적 측면에서 관조하여 나타낸 문학적 표현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계절이 백로 무렵에 이르면 장마는 걷히고 조석으로 이전과 다른 기온 변화를 실감한다. 그래도 초가을 한 낮은 노염이 온 누리를 가득 메워 기온을 높이고 일조량을 한껏 늘려 들녘의 오곡백과가 충실하게 열매를 맺으며 오달지게 영글도록 작용하는 조화로운 계절로서 농사일에서 다소 비켜서서 허리를 펴고 편한 숨을 쉴 틈을 향유할 자유가 주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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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염 : 우리는 ‘가을에 비정상적으로 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현상’ 다시 말하면 ‘가을의 반짝 더위’를 노염(老炎)이라고 부른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미국에는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가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이 개념을 노부인의 여름(old wives summer)이나 물총새의 날(halcyon's day)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영국에서는 성(聖)마틴의 여름(St. Martin's summer) 혹은 성루크의 여름(St. Luke's summer)이라고 한다.
원래 인디언 서머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하는 기상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일주일 정도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가끔은 서리가 내린 뒤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한편 이 말은 비유적으로 절망 가운데 뜻하지 않은 희망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2011년 8월 28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