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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네팔에 다녀왔습니다. 장로 은퇴와 더불어 해외에 교회 하나 개척하려고 준비해 왔는데 마침 우리 교회도 뜻을 같이하여 네팔의 치트완시의 산골마을 너우모레 교회를 작년 10월에 완공을 하고 우기를 지나 건기인 1월 초에 우리 목사님 부부와 나의 아내와 같이 봉헌식에 다녀 왔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2024년 1월 9일 화요일 맑음 ,000 너우모레 교회까지 가기 위해 5시에 출발한다. 치트완으로 가서 오늘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너우모레 교회에 가서 봉헌식을 참석하기 위함이다. 오후 2시에 개회예배를 드리기 위해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7-8시간을 꼬박 걸려서 가야 한다. 밤 새 달려온 10시간 넘는 비행의 여독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3시 반에 일어나(현지시각) 세수하고 면도를 한다. 그 시각에 일어나야 어제 일정을 대강 기록하고 출발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내도 그 시간에 일어났는가 보다. 4시 56분에 밖으로 나가니 벌써 목사님 부부와 이종덕 목사님, 기사와 가이드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다가 우리의 가방을 차 위에 올려놓고 포장을 덮은 다음 우리는 깜깜한 새벽을 가르며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는 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치트완 가는 길. 시내 골목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 이 도로는 카트만두 시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이 길을 두 시간 달리면 다시 이 길로 들어서는 순환도로다. 아스팔트가 깔린 그 도로를 달리다가 확장공사가 한창인 산길로 접어든다. 여기 위치는 해발 1,300m정도란다. 여기서 줄곧 해발 0m정도까지 내려가면 치트완 유네스코 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더 서두르는 이유는 무글리 삼각지대(천안삼거리라고 표현함) 분기점에 이르면 도로 공사로 말미암아 10시경에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공사를 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시간이 지체되어 오늘 일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일전에는 그 시간에 맞추지 못한 팀들이 있었는데 8시간을 꼬박 기다려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신경을 써가며 우리는 길을 달린다. 조금 지나니 넓은 도로지만 포장이 안된 부분을 지난다. 우리와 반대 차선을 대형 버스와 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이 차들은 인도에서 물건을 싣고 들어오는 트럭과 관광을 위해 들어오는 관광팀의 버스인데 정말 아슬아슬한 비킴을 번갈아가면 도로를 메운다. 한참 가다가 보니 밤하늘에 환한 별들이 무수한 산자락을 본다. 이 불빛들은 산속의 집들의 불이라고 한다. 정말? 저 높은 산의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정말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행진처럼 보여진다. 나는 드라마에서 보던 극한 직업을 생각한다. 남미 산악지대에서 도로사정이 극히 좋지 않은 곳을 낡은 트럭을 가지고 짐을 싣고 뚫고 나가는 트럭기사들의 극한 직업을 보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이다. 우리 앞을 지나가는 낡은 트럭들은 차 주변에 울긋불긋 그림을 그리고 푹 패이고 구불그리고 산바위를 깨고 있는 고갯길을 새벽에 달리는 것이다. 현지 목사님은 만약 우리가 우기철에 이 길을 간다면 정말 어려운 사정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이고 잘못하면 갈 수 없는 사고들이 일어난다고 하신다. 서고 달리는 일을 반복하며 동이 틀 무렵까지 달려간다. 우리가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무글이에 도착하여 차와 과일을 먹으려고 했는데 열심히 달려나오다 보니 그곳을 벌써 지나치고 말았다. 거기에는 커피를 마실수 있는 작은 가게가 있었고 또 여기 과일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만 지나쳐 오고 만 것이다. 조금 더 가다가 화장도 갈 겸 점심도 먹을 겸 커피도 마실 겸하여 길 옆의 허름한 공터에 주차를 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계단을 오르면 뷔페처럼 음식이 진열된 곳에 접시가 놓여 있고 종업원이 설명을 하고 있다. 쉬기도 할 겸 식사도할 겸 한 햄릿 레스토랑이란다. 정원에 꽃이 상당히 많이 있고 화장실도 좋고 식사를 하는 공간도 있다. 접시를 들고 원하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종업원이 음식을 집어준다. 담긴 접시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면 둥근 탁자가 있고 탁자 밖으로 한쪽으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의자가 둘려있다. 우린 목사님 부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부푼 구운 빵과 부침개 같은 둥근 밀가루 부침과 여러 가지 야채를 튀긴 튀김, 그리고 감자 볶음 등등이 있는데 우린 맛이 별로여서 가지고 온 음식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커피를 시켰는데 맛이 영 별로여서 다 마시지도 못하고 인사를 한다. 나오면서 보니 정원이 매우 아름답다. 사르비아 꽃은 잎은 우리나라 사르비아와 같은데 꽃은 엄청 컸다. 그리고 화단 주위의 꽃들도 모두 싱싱하다. 여기는 여름 기온인 듯 저쪽 산기슭에는 바나나 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도 있고 길 주변에도 바나나 나무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길거리에서도 바나나를 걸어놓고 팔고 있다. 그런데 조금 가고 있으니 경찰이 우리 기사를 불러 세운다. 기사는 노란색 종이를 들고 경찰 쪽으로 불안한 모습으로 찾아간다. 알고 보니 번호표시판이 붉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등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 푸른색 표식을 한 차는 손님을 태울 수 없는 자가용 차라고 한다 우리 차는 붉은색이기는 한데 파란색으로 영업신고를 하고 그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번호판을 바꾸지 못하여서 걸린 것이다. 차 위에 실은 우리의 짐이 손님의 표적이 된 것이다. 증명서를 내어놓아도 역시 돈을 주어야 한다. 만원을 달라고 하는데 기사는 우리 목사님에게서 오천 원짜리 둘러 바꾸어 한 장을 주면서 겨우 통과를 하였다. 그런데 또 한참 가다가 또 다른 경찰에게 검문을 받는다, 이런 경우에 맞지 않는 돈도 지불해야 한다니 기사들은 걱정꺼리가 늘었다. 가는 동안 우리 이종덕 목사님은 네팔에 대한 이야기를 사이사이 해 주신다. 주로 땅값과 집값에 대한 이야기들인데 여기 땅값과 집값이 엄청 비싸서 내집 마련하기는 우리나라나 네팔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남자들은 외국으로 가서 일을 하는데 그 가장 선호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이다. 엘리트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 보기 어렵다고 한다. 치트완 공원지역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치트완 공원도시는 네팔에서 6번째 큰 도시다. 4차선 포장도로가 제일 맘에 들었다. 그 도로위로 월남에서 볼 수 있는 오토바이 행렬이 지나간다. 여기도 오토바이가 엄청 많다. 자동차는 값도 비싸서 살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휘발류값이 엄청 비싸 오토바이를 사용한다고한다. 여기서는 한식을 하자고 한다. 치트완 시내에는 한식집이 두 군데 있는데 그 한 곳이 바로 여기다. 깔끔하고 아늑해 보이는 식당앞에 이름이 써 있다. 한국음식점이란 간판이다. 들어가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다. 나는 김치찌개 그리고 다른 분들은 비비밥과 여러 가지를 시켜 배불리 먹는다. 저녁 7시까지 참야야 한다니 맘껏 먹어두자. 다시 출발하여 산길을 간다. 골목길을 한참 달리다가 냇가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우린 하차를 한다. 차위의 짐은 그대로 두고 몸만 내려서 작은 트럭 두 대에 나누어 탄다. 현지 목사인 와이바 목사와도 만났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체험하지 못한 산길을 간다. 아찔한 산길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맞추픽츄의 산길을 그대로였다. 그러나 여긴 정말 좁고 자갈이 깔려 있고 냇가에는 내려오다가 만 작은 바위들이 널려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엄청 많은 벌통들이 놓여 있는데 여기 꿀은 맛이 일품이란다. 이중에도 꿀 이야기가 나오니 사모님의 아버님이 벌을 길렀다는 이야기며 아프기만 하면 아버지가 꿀을 먹여주던 이갸기. 아내가 질세라 자기 아버지가 벌을 길러 꿀을 따며 그것으로 자기 결혼자금을 했던 이야기..... 꿀 이야기로 힘든 길은 조금은 위로를 받으며 올라간다. 눈물나는 한 시간동안 우린 2000미터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간다. 구불거리기는 얼마나 구불거리는가? 아찔한 절벽이 차 차바퀴를 따라 온다. 90도라는 표현을 쓰면 좋을 것 같다. 절벽 저쪽 언덕을 바라본다. 그 산 8부능선에 구불거리는 층계 밭이 있다. 남미의 언덕이라든지 중국의 쿤밍 언덕에 또는 양삭의 유채를 심은 언덕, 베트남의 층계 밭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층계밭은 그 놀라움을 넘어섰다. 박짝이던 산 별들이 이런 산비탈에 사는 사람들의 불빛이었나 싶을 정도의 광경 또한 놀랄만하였다. 한 번 구르면 수백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한 급경사에 있는 밭에 무엇을 심을 수 있을까? 여기는 옥수수와 감자가 주산물이고 그것을 주식으로 먹고 산단다. 기사는 한번에 차를 돌리지 못하고 뒤로 물러 갔다가 반동을 이용하여 한 고비를 돌고 또 올라가면 그런 고비를 만난다. 어찌나 털털거리고 뒤뚱거리고 흔들렸던지 아내는 내장이 서로 뒤섞이는 것 같다고 하더니 한참 지나니 몸이 탁 풀어지고 말았다. 측은하여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주고 안아주며 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여기가 다인줄 알았다. 거기서 우린 콜라 한 병을 사서 한 잔씩 나누어 마신 후에 다시 차를 다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위로하며 조금만 더 가자고 한다. 산 정상이 다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 이 고통은 우리만의 고통이 아닐 것이다. 기사와 가이드는 더 말한 필요가 없지...... 돌고 내려가고를 얼마나 반복하여 내려가다가 우리가 목적한 아우모레 교회에 도착한다. 길 양쪽에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 여럿이 우리를 바라보기도 하고 교회에 거의 다 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는 땅바닥에 아기 하나를 안고 누워 있기도 한다.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였다. 따뜻한 햇볕을 쬐는 중이라고 한다. 거기를 돌아가니 사진에서 보던 교회 정문이 나타난다. 좁은 마당위에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을 사람들이 있다. 어린 아이와 어른 들이 같인 비율로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봉헌식을 시작한다. 현관문 앞에 자물쇠를 채우고 테이프를 세 줄로 늘어 놓았다. 가위 세 개를 준비했는데 와이바 목사님과 우리 채종석 목사님 그리고 나 셋이서 테이프 컷팅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열쇠를 열고 문을 들어가니 중앙에 강단이 보인다. 의자는 없고 중앙에서 양쪽을 낡은 양탄자를 깔아 놓았다. 벽은 벽돌을 쌓아 놓은 그대로 페인트 칠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깔끔하고 정성을 보인 모습이 선하다. 이종덕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온 길로 시내에서 물건을 들고 들여와야 하기에 벽 몰탈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기 건축자재는 작은 차로 길까지 올라오고 나머지는 사람들이 몸에 이고 지고 나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여기 작은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와이바 목사님은 이러한 산골 교회를 25개나 건축하고 우리가 세운 교회가 하나 더해서 26개의 교회를 개척하셨단다. 또 더하여 말씀하기를 앞으로도 세 개 정도의 교회가 필요하니 후원자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이제 봉헌식이 진행된다. 자리는 남녀로 구분하여 앉지만 양쪽이 모두 차서 나머지는 밖에서 듣는다. 어림잡아 세어보니 160명이 넘는다. 밖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 하면 200명이 된다고 한다. 식은 찬송으로 시작한다. 와이바 목사님이 사회를 보시고 말씀도 전하신다. 이종덕 목사님이 작은 소리로 번역을 하여 알려준다. 모두가 감사하단 인사와 기쁘단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찬송하고 우리 목사님의 5분간 인사말씀을 하신다. 미리 나에게 나도 5분을 주어 인사를 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와이바 목사님은 그냥 넘어가신다. 나중에 이종덕 목사님이 나에게 인사를 할 시간을 달라고 하여 그 때 다시 나를 단상에 올라오게 하여 기회를 주었다. 무슨 말을 할까? 여기서는 라마스떼라고 하지 않고 자이머시라고 한다고 한다. 아라스떼는 힌두교의 인사말이고 자이머시는 기독교의 인사라고 한다. 마치 하나님과 하느님과의 차이라고 할까? 자이머시라고 먼저 인사를 하고 감사의 치사를 목사님들과 선교사와 여기 성도들에게 하였다. 나는 60년 전의 우리 어일 때의 교회를 이야기하였다. 믿는 사람도 적었고 교회도 제대로 된 교회가 아니라 흙벽돌로 구멍이 난 그런 교회였다고 했다. 그런 교회가 지금은 아주 큰 교회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회로 나가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지금 여기 너우모레 교회보다 못하던 교회였고 지금 여기 교회도 그런 모습으로 조금 후에는 엄청 발전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하였다. 너우모레 교인들이 서로 협력하고 노력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장래에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여러분은 더 나은 나라의 일꾼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예수님의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말씀을 이룰 주인공이라고 말해주었다. 식이 끝나고 와이바 목사님을 우리 목사님과 나에게 그리고 우리 사모님과 아내에게 여기 모자를 씌어주고 목도리를 감아주는 행사를 하였다. 우리 앞에 어떤 젊은 사람이 성경책에 줄을 긋고 노트하며 열심히 경청하는 것을 보고 미래의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예감도 하였다.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이 준비를 우리가 돈을 미리 주고 지역 주민에게 대접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해가 넘어갈 즈음이라 더 머물수 없어서 나오기로 하였다. 많은 음식을 나누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우리는 오던 길을 다시 가야 한다. 산 너머로 오는데 학교를 마친 아이들 서너명이 코너에 가방을 던져놓고 놀고 있다. 학교 가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그냥 달려오기는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천진난만한 그 애들이 이제 진학하여 이곳을 희망을 주는 곳으로 발전시키기를 기도하며 돌아온다. |
첫댓글 교회만 왔다 갔다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 많은데 물질을 드리고, 그리고 고생스런 여정을 기꺼이 감내하시어 척박한 외국의 시골에 위치한 개척교회의 봉헌식에 다녀오신 글을 읽으니 너무 귀하여 뭉클합니다.
그 곳 주민들의 신앙심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오지 중 오지인 곳에 교회를 개척하시는 믿음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은퇴 후 땅끝까지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시는 믿음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창대한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