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황후 / 조후미
내 이름은 조후미다. 황후 후(后)에 아름다울 미(美)를 쓴다.
처음 만난 사람과 통성명을 나눌 경우, 내 이름을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참 특이한 이름이네요이거나, 늘 끝에만 계시나 봐요인데 그럴 때마다 한자로 풀어 설명하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실없이 웃고 만다.
뒤 후後, 꼬리 미尾 ― 사람들은 대부분 ‘후미’라는 어휘에서 뒤쪽의 끝을 연상하거나, ‘물가나 산길 따위가 휘어서 굽어진 곳’을 유추해 내는 모양이다. 이렇듯 한글로 읽히는 후미라는 이름은 만년 꼬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둡고 습한 이미지가 강하다.
내 이름은 조모께서 해남 대흥사 주지스님을 찾아가서 지어오셨다. 첫 손녀를 얻은 기쁨이 그리도 크셨던지, 진도에서 해남까지 교통편도 어려운 길을 굽이굽이 찾아가서 받아 오신 이름이다.
황후 후后, 아름다울 미美 - 속세를 떠난 승려가 지은 이름치고는 표면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황후皇后라 함은 황제의 정실부인을 이르는 말이니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황후의 것이 아니던가. 스님께서 내 이름자 안에 황후라는 뜻을 넣어 주신 이유가 겨우 육신의 안락함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다행히도 스님은 후后자 옆에 미美도 새겨주셨다. ‘아름답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거나 듣기에 즐겁고 좋은 느낌을 가지게 할 만하다. 예쁘고 곱다. 행동·마음씨가 훌륭하고 갸륵하다’로 정의되어 있다. 아름다움은 외면과 내면을 두루 겸비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심신이 아름다운 황후를 상상해 보라. 그녀는 남편인 황제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과 존경을 받는 가인佳人임에 틀림없다.
황후의 지위에 아름다움까지 덤으로 가졌으니 후미后美는 보통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아름다운 황후가 21세기를 살아간다는데 있다.
무성 영화 같은 세상 속에서 후미后美는 여인1의 단역으로 살아간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단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나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일삼으며, 남편의 양말 시중을 들어야 하고, 가족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청소하다 바퀴벌레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거나 먼지에 취해 재채기를 해대는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이고, 여인 2, 3, 4와 수다를 떨 때는 나긋나긋하다가도 채소가게 주인과 더 주네 마네 흥정 할 때는 싸움닭이 되고 마는 맹순이이며, 대형할인점에서 장이라도 볼라치면 양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대며 버스에 오르는 무식한 팔뚝의 소유자이기도 한 삶.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후미后美의 모습이다.
후미后美라기 보다는 후미後尾의 삶이다.
후미後尾는 도시인으로 동화된 것도 아니고 초월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다. 이 자리의 사람들은 근대화나 산업화가 인류의 정신을 퇴보시켰다고 불평하면서도 문명의 이기에 몸을 맡기고 마는 이중성을 지닌다.
편리함과 시간 절약이라는 미명 아래 네 개의 바퀴에 기대야 할 때 나는 생각한다. 아, 나는 어쩔 수 없는 후미後尾로구나. 자동차에 급제동이 걸릴 때마다 바람 인형처럼 의지意志 없는 몸부림으로 부대끼는 나는 생각한다. 아, 나는 이름만 화려한 후미後尾로구나. 자아나 존재, 실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빈 껍질의 환영이 자동차 안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상황은 운전자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신호등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흰색과 황색 선에 갇힌 채 달려야 한다. 안전이라는 미명아래 가거나 서는 것에 대한 자율권마저 도로교통법에 양보한지 오래다. 경찰차만 봐도 움찔거리는 심리 역시 내가 후미後尾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다.
이렇듯 보잘 것 없는 후미後尾지만 가끔은 세인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후미 后美로 살아가고 싶다.
后美가 사는 세상은 민첩하지 못한 천성이 축복이 되고, 의지의 제동은 오직 자아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곳이다. 목적 없이 길 위에 섰다고 누가 나를 나무랄 것인가. 가고 싶은 곳으로 주저 없이 발길을 옮긴다고 해서 제지당할 일도 없다. 사소함과 소중함 사이를 넘나드는 작은 생명들과의 조우를 맛 볼 수 있으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헝클어진 생각의 매듭을 풀어가는 즐거움이 있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이 바로 후미后美가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내 소유의 자동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튼튼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날 동안 마음껏 걸어 보려는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뒤꿈치가 땅에 닿는 순간 전해오는 짜릿함과 미련 없이 땅을 밀치며 허공으로 튕겨 오르는 발가락의 꼬물거림으로 인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걷기 좋아하는 사람을 세인들은 뚜벅이라 부른다. 뚜벅뚜벅 걸어서 뚜벅이지만, 차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섞여 있다.
뭐 어쨌든 그런 소리쯤은 상관없다. 나는 뚜벅이라 불리는 것이 좋으니까. 뚜벅이라 불릴 때마다 세포 깊숙한 곳으로부터 희열의 공기방울이 퐁퐁 솟아나오니까. 걷는 순간만큼은 본연의 후미后美일 수 있으니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 이면에는 억겁의 사연들이 감추어져 있고, 사연들은 파동으로만 전해지는 작은 소리로 길 위의 뚜벅이를 부른다.
후미后美님, 하늘을 보세요. 어제는 메마른 파랑이더니, 오늘은 진홍빛이네요. 내일은 비가 올까요. 후미后美님, 발밑을 좀 보세요. 보도블록 사이에 씨앗이 숨어 있어요. 이 작은 생명이 혹독한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봄을 맞을 수 있을까요.
나는 목소리를 좇아서 하늘을 보거나 땅을 관찰하기도 하며 가고 싶을 때 가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어 선다. 길이 막혀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돌아갈 수도 있다. 나 아닌 누구도 나를 통제하거나 간섭하지 않으니 걷는 순간만큼은 진정한 후미后美인 것이다.
가볍고 느긋하게 살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뚜벅이로 살며 황후의 지위를 누리고 싶다. 나의 발자국이 찍히는 순간마다 지구엔 더 짙은 푸른색이 남겨질 것이기에 뚜벅이의 삶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련다.
하늘은 오늘도 파란 양산을 펼쳐들고 뚜벅이 황후를 기다린다. *